1589화. 금선들의 논의
*
쉬쉬쉭!
검은 구렁이로 변한 검은 기운이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그 모습에 한립은 냉소를 흘리며 몸에서 검은 물빛과 함께 동그란 고리 허상이 나타나 맹렬히 회전했다.
무시무시한 힘이 퍼져 나와 그를 속박한 기운을 끊어냈고, 자유를 되찾은 금색 뇌검은 거침없이 검은 구렁이와 맞닥뜨렸다.
파치칙! 콰쾅!
금색 뇌전들이 검은 구렁이를 휘감고 폭발했다. 애달픈 비명을 흘린 거대 구렁이는 몸이 터져 검은 연기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잉!
그걸 본 한돈이 냅다 몸을 돌려 검남색 빛줄기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흥!”
서늘한 코웃음 소리가 한돈의 귓가에 파고들어 끔찍한 두통을 일으켰다. 불에 달군 송곳이 머릿속을 파헤치는 고통에 요수는 참혹한 괴성을 질렀고 둔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음 순간, 금색 거검이 번득 한돈의 입속으로 찔러 들어가 요수의 배를 뚫고 나왔다. 남색 핏물이 작은 폭포를 이루면서 호수로 떨어져 내렸다.
한돈은 빠르게 생기가 사라지고 눈이 멍하게 풀렸다. 체내의 원영도 달아나지 못하고 검기에 말살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립의 손짓에 금색 뇌검이 네 개로 갈라져 그의 체내로 돌아왔다. 그는 신속하게 남색 빛을 날려 한돈의 시체를 감쌌다.
촤륵!
거대한 복어 요수의 몸을 남색 얼음이 둘러싸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았다. 시체를 갖고 돌아가는 것이 임무의 목표였기에 너무 많은 피를 잃을 수는 없었다.
* * *
고운대륙, 어느 성안 구석에 위치한 저택 밀실.
유생 복장을 한 중년인이 새빨간 연단 화로 앞에서 정좌를 하고 있었다.
우웅!
갑작스레 화로가 몸을 떨더니 그 안에서 묵직한 폭음이 작게 울리고 타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안색이 어두워진 유생 중년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웅.
그때 그의 품에서 푸른빛이 반짝였고, 서둘러 여우 모양의 푸른 가면을 쓴 그는 거대한 화면을 불러냈다.
그 중앙에는 저물대가 하나 둥실 떠 있었다.
“임무를 등록한 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완수했다고?”
놀란 유생 중년인이 저물대를 끌어와 풀어 보았다. 방대한 한돈의 시체가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아주 깔끔하게 죽였어! 나라도 진선급 한돈을 온전하게 시체를 보존하면서 죽일 수는 없었을 텐데……. 교십오, 이전에는 못 들어보던 인물인데 물건이 나타났구만.”
* * *
그 시각. 한립도 무상맹 가면을 쓰고 푸른 화면에서 저물대를 취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극품영석 한 무더기가 들어있었다.
수량을 확인한 한립은 즐거운 얼굴로 다음 임무를 고르기 시작했다.
* * *
뇌폭해양 모처.
허공에 밀집한 먹구름에서 굵은 뇌전들이 마구 떨어져 해양을 가르고 있었다.
쿠콰콰쾅! 쿠쾅! 펑!
해양 깊은 곳에 있는 새까만 섬 인근에서 여러 빛덩이들이 교전하며 하늘을 쩌렁쩌렁 울려 주변의 뇌폭 소리가 다 묻히고 있었다.
격전을 펼치는 이들 중, 한쪽은 가면을 쓴 진선경 수사 다섯으로 두 명은 푸른색 가면, 세 명은 남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다른 한쪽은 백 마리가 넘는 뇌전 박쥐로 한 마리 한 마리가 통나무 같은 커다란 몸을 보라색 뇌전으로 휘감고 대승기 수사에 버금가는 기운을 발산했다.
뇌전 박쥐의 수가 적지 않았지만 무상맹 수사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고 다들 강력한 보물을 지녀 계속해서 뇌전 박쥐들을 죽여나갔다.
검은 장창이 박쥐의 몸을 찌르고 들어가 상처를 타고 은색 뇌전을 뿜었다.
펑!
뇌전 박쥐는 역설적이게도 뇌전에 터져 죽고 보라색 구슬만을 남겼다. 푸른 장포를 입은 사내가 재빨리 나타나 보라색 구슬을 챙겨갔다.
그의 가면에는 교십오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청포 사내는 쉬지 않고 다음 박쥐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펑!
검은 장창은 뇌전 빛을 눈부시게 발산하며 박쥐의 몸을 찔러 들어갔다.
콰직.
주변 박쥐들이 분노에 차 날카롭게 울어대며 굵은 보라색 뇌전이 그를 향해 사방에서 밀려들었다.
틈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뇌전 공격 한가운데서 그는 유유히 보라색 구슬을 챙겨 온몸으로 은색 뇌전을 발산했다.
그가 두른 은색 뇌전 보호막은 무슨 신통인지 보라색 뇌전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가 없었다.
청포 사내는 뇌전 박쥐들 틈을 오가며 순식간에 네다섯 마리를 격살했다. 다른 네 명의 수사들은 그의 위용에 분분히 혀를 찼다.
뇌전 박쥐 열댓 마리가 모여서 뇌전의 힘을 쏘아대면 진선경인 그들도 맞기 부담스러웠는데 청포 사내는 거침없이 요수 떼에 뛰어들어 날뛰고 있었다.
수사들도 뇌전 박쥐들이 당황해하는 사이 무리와 떨어진 뇌전 박쥐를 공격해 잡는 중이었다.
반 시진 뒤 검은 창이 마지막 뇌전 박쥐를 찔렀다.
펑!
박쥐 요수의 몸에서 나온 보라색 구슬도 청포 사내 차지였다. 백 마리가 넘던 뇌전 박쥐 중 절반 가까이를 그가 혼자 격살했다.
그는 일행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은색 뇌전 빛을 번득이며 어디로 날아갔고, 나머지 넷도 씁쓸하게 시선을 마주친 뒤 각자 갈 길을 갔다.
뇌폭해양 어딘가에서 모습을 드러낸 청포 사내는 푸른 화면을 띄워 모호한 인영을 불러냈다.
“뇌복정주(雷蝠晶珠) 47개입니다.”
한립은 보라색 구슬들을 허공에 불러냈다.
“임무 규정에 따라 선원석 47개를 지급하겠습니다.”
모호한 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에 구슬들을 보내고 선원석 한 무더기를 받은 한립은 또 다른 임무는 뭐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 * *
3년 후, 적하봉.
푸른 둔광이 멀리서 날아들어 조용히 정상에 내려섰다. 약간 창백한 얼굴의 한립이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곧장 동부로 들어간 그는 밀실에 앉아 무상맹 가면을 쓰고 화면을 불러냈다.
그의 손에는 악귀 도안이 그려진 검은 영패 세 개가 들려있었다. 법결을 던져 넣고 이번 임무에서 얻은 영패들을 전송한 그는 대가로 선원석 36개를 받았다.
그런데 보상을 받은 그의 얼굴이 어딘가 떨떠름했다.
이번 임무는 고운대륙 변경에 숨어 사는 사수(邪修) 무리를 죽이는 것이었는데 그들이 부리던 진법과 비술이 강력했고 맹에서 파견한 6명도 푸른 가면 회원 중에서는 고위층인 듯싶었다.
임무를 수행하면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번 일행들은 대부분 촉룡도 수사들로 특히 무리를 이끄는 대장은 절정의 비검술을 사용했다.
한립은 그 대장이 사용하던 비검술을 보고 웅산 부도주를 떠올렸다. 무상맹 가면으로 기운으로 감추고 있었지만,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 * *
몇 년 후, 촉룡도 만장 산봉우리 위에 있는 커다란 대전 안.
둥그런 높은 천장을 8개의 두꺼운 기둥이 받치고 있는 대전은 무척 넓었다.
기둥에 새겨진 용들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거나 서로 눈빛을 마주치며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워낙 사실적이라 무척 생생했다.
대문 위 편액에는 용신전(龍神殿)이라는 세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고 그 아래도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거대한 용 조각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8개 기둥의 용들을 조각한 솜씨가 일품이라면 편액 아래 용 조각은 아주 투박해서 심지어 용 비늘도 제대로 파내지 않아 완전히 다른 사람의 작품 같았다.
다만 이 투박한 조각상은 두 눈에서 세상을 오시하는 거만함이 느껴졌고 대전 안쪽으로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가 위압감을 주었다.
그 앞에는 낮은 탁자 위에 향초와 제를 지낼 때 쓰이는 과일 같은 것들이 올라가 있었다.
이날 대전에는 세 명이 서 있었다.
보라색 장포를 입은 위엄 있는 중년 사내는 구양규산, 보기만 해도 사람을 홀리는 절색의 백포 부인은 백소원의 스승인 운 도주였다.
마지막으로 금포를 입은 땅딸막한 사내 웅산 부도주가 그들과 약간 떨어져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곧 걸음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더 나타났다.
단정하지 못한 회백발에 붉은 코를 지닌 노인을 한립이 보았다면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냈을 것이다.
그는 바로 호언 노인이었다.
노인 옆에는 검은 치마를 입고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차가운 눈빛의 여인이 함께 있었는데 꽤 젊어 보이는 여인은 손톱이 이상하게도 짙은 보랏빛이었다.
그밖에 검은 의복을 입은 사내도 스물몇 살밖에 안 돼 보였다.
잘생긴 얼굴을 지닌 청년은 금발을 늘어트리고 얼굴도 약간 금빛에, 등 뒤에는 금색 고리까지 하나 매고 있었다.
“호언 수사, 진 수사, 원 수사 오셨습니까! 이렇게 다섯이 모인 게 얼마만 인지 모르겠습니다.”
구양규산이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을 맞이했다.
백포 부인도 그들이 나타나자 옅은 미소를 지었는데 다른 둘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호언 노인만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 뭔가 원망이 어려 있었다.
“웅산이 세 분 도주님들을 뵙습니다.”
웅산은 진지하게 그들을 향해 예를 올렸다.
대전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웅산은 상대하지 않고 공손히 거룡 조각상을 향해 예를 올린 다음 구양규산과 운 도주를 바라보았다.
특히 호언 노인은 어딘가 어색한 얼굴로 백포 부인의 시선을 피해 구양규산만 보고 있었다.
“종문 일이야 구양 수사께서 알아서 처리하면 될 일을 어찌하여 도주 회의를 소집하신 것입니까?”
검은 치마 여인과 금발 청년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호언과 같은 생각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세 분을 귀찮게 해드리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현빙산맥에서 시행한 핵심제자 시험에 변고가 생겨, 그 일로 논의를 해야 할 듯싶습니다.”
구양규산이 진지하게 늘어놓은 말에 진작 그 일에 대해 알고 있던 호언 노인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 뒤의 금발 청년도 코웃음을 치는 게 알던 사실 같았고, 검은 치마 여인만 처음 듣는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구양규산은 모두를 위해 현빙산맥에서 발생한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다행히 시험을 관리하던 장로급 두 명이 제때 대응을 해서 흉악한 놈의 육신을 멸했다고 합니다. 원영은 달아났지만 시험에 참가한 제자들은 목숨을 잃은 이 없이 무사히 돌아왔고요.”
“무사히 돌아왔단 말이 나오십니까? 제자 넷이 육신을 잃었습니다. 자질이 극히 뛰어나서 본종의 동량이 될 인재들이 이제 남의 몸을 갖고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 두 장로는 호위 임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니 중벌을 내려야 마땅합니다.”
처음부터 냉소하던 금발 청년이 목소리를 높였다. 촉룡도의 13도주들도 출신에 따라 본토 도주와 산수 도주로 파벌이 나뉘었다.
금발 청년은 본토 도주로 이번 시험에서 육신을 잃은 제자 넷 모두 본토 출신인 것에 마음이 상한 듯했다. 게다가 호위를 선 두 장로들은 하필 또 산수 출신이었다.
“그 말씀은 오해가 있으십니다. 조사해본 결과 납치범인 진선경의 적은 실력도 상당했고 미리 기이한 진법을 펼쳐두고 두 장로를 함정에 빠트렸습니다. 적을 죽이고 제자들을 지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오히려 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운 도주가 귀밑머리를 넘기면서 반박했다. 운 도주는 산수 출신이고 그녀 옆의 구양규산도 그러했다.
“아니, 그건 아니지요. 호위 임무를 맡았으면 돌발 상황에 대처해 제자들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네 명의 제자가 육신을 잃었으면 호위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금발 청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원 수사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는 스스로 가장 잘 아실 겁니다.”
“뭐라고요!”
“됐습니다, 원 수사께서도 그만하시지요. 지금은 구양 수사께서 종문을 관리할 때이니 모두 수긍할 만한 결정을 내리실 거라 믿습니다.”
호언 노인이 목청만 높이는 금발 청년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호언 수사. 안심하고 계셔도 됩니다.”
구양규산이 웃으며 이렇게 답하자 금발 청년도 못마땅한 기색을 유지한 채 입을 다물었고 냉소를 흘린 백포 부인도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두 호위 장로들과 시험에 참가한 제자들에게 들은 적에 대한 자료입니다. 저보다 다들 견문이 넓으시니 같이 검토해주십사 청하게 되었습니다.”
구양규산은 옥간 세 개를 꺼내 나눠주었다.
“웅 부도주도 박식한 사람이니 함께 살펴보세.”
구양규산은 곁의 웅산에게도 따로 옥간을 내주었다. 웅산이 고개를 숙이며 옥간을 받아 의식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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