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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88화 (1,345/2,000)

1588화. 주머니 사정

*

두 달 후, 적하봉 아래의 밭에 한립이 나타났다.

제련한 단약의 효과가 아주 좋아서 줄곧 밀실에서 수련하다가 오늘에야 나온 것이다.

손부정과 다른 시종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고, 몽운귀도 언제 돌아왔는지 그들과 함께 있었다.

적하봉 인근 대량의 땅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리가 되어서 위에서 내려다보면 장관이었다.

화독을 품고 있던 붉은 안개가 걷힌 다음 토양도 차차 원래 모습을 되찾아서 이제는 불 속성 영약이 아니라도 심을 수 있었다.

한립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지만 은신한 것은 아니라서 곧 한 시종이 그를 발견했다.

“장로님!”

황급히 예를 올리는 그를 보고 나머지 시종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려 장로님, 나오셨습니까!”

몽운귀, 손부정 등은 한립과 오랜 시간 보고 지내면서 어느 정도 그의 성격을 알게 되어 더는 많이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래, 그냥 둘러보던 중이니 너희는 하던 일을 계속하거라. 몽운귀는 나를 따라오고.”

“예!”

한립과 몽운귀는 산 정상 쪽으로 날아올라 동부로 들어갔다.

“나를 대신해서 동분서주하느라 수고가 많았구나. 수확은 있었느냐?”

“수고라니요. 려 장로님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제자의 영광입니다. 이것들이 몇 년간 구해온 것들이니 살펴주십시오.”

몽운귀는 저물법기를 꺼내 바쳤다. 의식으로 내용물을 살펴본 한립은 이채를 띠었다.

“잘 구해왔구나.”

처음 그에게 영약 종자를 구해오라고 했을 때 그리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수행이 낮은 만큼 손에 넣을 수 있는 영약 종자도 제한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보니 구해온 종자 하나하나가 진귀하고 그중 몇 가지는 통원단을 제련하는데 필요한 보조 재료도 있어서 앞으로 연단에 들어가는 영석을 크게 아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일부 낯선 종자들에도 관심이 갔다. 돌처럼 생긴 구멍이 숭숭 뚫린 종자에서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과찬이십니다. 어쩌다 보니 운 좋게 구하게 된 것들입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몽운귀는 한립이 인정해 준 것에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립은 약간의 종자를 다시 내주었다.

일부는 몽운귀가 구해온 것이고 일부는 그가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산 아래 밭에 심고 잘 키우거라.”

“예, 알겠습니다.”

“종자를 찾는 일은 끝난 것이 아니니 계속 특별한 영약의 종자가 없는지 주의를 기울이거라. 이건 너에게 주는 것이니 가져다 쓰고.”

분부를 내리던 한립이 법보가 든 저물대 하나를 따로 내주었다.

“감사드립니다, 장로님!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니 맡겨만 주십시오!”

몽운귀를 내보낸 한립은 동부 안 약재밭으로 가서 따로 챙겨둔 종자들을 꺼냈다.

구불구불한 씨앗, 옥구슬 같은 씨앗 그리고 콩알 크기에 오돌토돌한 씨앗도 있었다. 통원단과 춘림단을 제련할 때 필요한 보조재료용 약재 종자였다.

씨앗들을 심고 영액을 부은 한립은 점점 넓어지고 풍족해지는 약재밭을 보고 무척 흐뭇했다. 거원 괴뢰를 불러다 집중적으로 키워야 할 몇 가지 품종을 알려준 그는 몸을 돌려 약재밭을 나왔다.

* * *

밀실로 돌아온 한립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통원단 8개가 효과가 썩 괜찮아서 두 달간 거의 10년의 수련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그 속도를 유지하려면 대가가 적지 않았다.

진언보륜으로 연단 성공률을 높였으니 다른 쓸모가 있는 공적점으로 단약을 교환하는 것은 어리석고, 관건은 연단 재료를 어떻게 손에 넣느냐는 것이었다.

장천병의 신비한 영액은 지기화신에게 보내 중수 제련을 도울 수정알갱이를 제련하고 촉령초 및 몇 가지 영초들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나머지 재료들은 사들여야 했다.

남은 영석이 얼마 되지 않아서 일전에 전리품으로 얻은 물건들을 팔아 치운다고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한립은 무상맹의 푸른 가면을 불러냈다. 영석을 벌 방법은 다양했지만 그의 신분으로는 무상맹에서 임무를 받아 보수를 챙기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편리했다.

종문 내에서 임무를 맡아 영석을 모으면 너무 눈에 띌 테고 그의 실력이 알려져 성가신 일이 생길 수 있었다.

또한 종문 내 임무보다 무상맹 임무가 보상이 후했다.

한립은 가면에서 푸른 화면을 불러내 임무 구역에서 촉룡도 인근 임무를 찾아보았다.

임무도 많고 내용도 다양해서 재료나 단약 영보를 구해오는 것부터 요수를 죽이거나 사람을 암살하라는 것도 있었다.

이런 평범한 임무 말고 특수한 임무들도 눈에 띄었다.

지단사들을 모집해 모종의 단약을 제련하거나 진법에 정통한 진선급 수사들을 모아 어느 유적의 금제를 파훼하러 가는 임무, 대량의 진선들을 모아 신원 불명의 신비한 수사를 포위 공격하는 임무도 있었다.

임무를 훑어 내려가던 한립의 표정이 묘해졌다. 일명 ‘천남제일검수(天南第一劍修)’의 행방을 찾는다는 임무에 적잖은 보상이 걸려 있었다.

한립은 피식 웃어넘기면서도 눈빛이 가라앉았다.

당시에는 다들 급히 자리를 떠나느라 아무도 그가 남긴 글자를 발견하지 못했으나 나중에 천검봉 수사들이 그의 장난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임무를 등록한 사람은 당연히 천검봉 사람일 테고 무상맹 신분으로 보면 웅산일 게 분명했다. 아마 글자를 남겨놓은 천남제일검수가 비검도 가져갔을 거라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한립은 자신이 인계에 있을 당시 천남제일검수였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에 들킬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웅산 부도주도 무상맹 일원이라니 그의 생각보다 무상맹의 세가 대단했다. 그 밖에 백봉의를 찾는다는 임무는 절로 백소원을 떠올리게 했다.

한립은 어차피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어느 항목에서 멈추었다.

천한지(天寒池)라는 곳에 있는 진선급 요수 한돈(寒豚)을 죽이고 시체를 가지고 돌아오면 되는 임무로 보상이 무려 극품영석 4천 개나 되었다.

천한지는 종명대륙 북쪽, 현빙산맥보다 더 북방에 있는 고운대륙에서 악명이 자자한 지대로 전선 강자들도 수도 없이 목숨을 잃은 곳이었다.

한립은 손을 뻗어 그 임무를 수락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몇 달 후.

차가운 바람과 눈보라가 쳐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고운대륙 극북 지역.

눈 덮인 산봉우리 몇 개가 우뚝 솟아 묵묵히 바람의 채찍을 견디고 있었다. 누런 얼굴의 중년 거한이 멀리 하늘 끝에서 날아들어 산봉우리 중 하나에 내려섰다.

무상맹 가면으로 용모를 변화시킨 한립이었다.

봉우리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호수가 있었는데 그 색깔이 먹처럼 새까맸다.

괴이하게도 기온이 낮은데도 호수는 전혀 얼지 않아 바람이 불 때마다 출렁였고 그 위로 검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검은 안개는 치명적인 냉기를 머금고 있어 눈보라 치는 고공보다 아래쪽이 더 추웠다. 바로 ‘천한지’였다.

한립은 산봉우리를 가볍게 박차고 천한지 쪽으로 날아갔다.

휘이잉!

삭풍이 스산하게 불어대는 천한지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이곳에는 영초와 같은 꽤 많은 천지 보물들이 자생해서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수사들을 끌어드리고 있었다.

그런 수사들은 검은 물속에서 생활하는 강력한 요수들과 싸우거나 아니면 먹이가 되었다.

한립은 수면 가까이 날아가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첨벙!

별안간 앞쪽에 물보라가 일고 거목 크기의 요수가 튀어나왔다. 검은 비늘로 뒤덮인 악어 요수의 커다란 입에는 섬뜩하게 빛나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가득했다.

머리 양쪽에 달린 툭 튀어나온 노란 눈동자는 한립을 먹잇감이라 생각하고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립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손가락에서 푸른빛을 쏘아 보냈다. 달려들던 검은 악어가 뻣뻣하게 굳어버리자 한립은 쩍 벌린 요수의 아가리 사이로 쉭 하고 지나가 버렸다.

그가 지나가자 악어 요수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기다랗게 잘려 내장을 쏟으면서 호수로 추락했다.

그러나 한립은 관심을 두지 않고 전진해 짙은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몇 시진의 비행으로 천한지 깊숙한 곳까지 이른 그는 수시로 합체기 이상의 실력을 지닌 수중 요수들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손짓 한 번으로 그것들을 물리쳤다.

그러던 중 그가 눈을 반짝이면서 멈춰 서서 호수 바닥을 바라보다 손을 휘저었다. 푸른 빛줄기가 물속으로 파고들었다.

촤앗!

잠시 후 거무튀튀한 물체가 푸른빛에 휩싸여서 물 밖으로 날아올랐다.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해초는 흑성조(黑星藻)라 불리는 호수 밑바닥에 사는 해조류로 한돈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였다.

이렇게 큰 흑성조라면 분명 한돈을 유인해 낼 수 있을 것이었다.

팟.

한립은 손바닥을 펼쳐 맷돌 크기의 남색 물체를 불러냈다. 모종의 요수 내장은 냄새가 아주 지독했다.

상비수(象鼻獸)라는 요수의 내장으로 역시 한돈을 불러내는 데 효과가 있어 무상맹을 통해 영석을 치르고 구한 것이었다. 내장 속에 하얀 부적을 숨긴 한립은 그것을 검은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촤륵!

뼈가 시린 냉기가 남색 내장을 감싸 꽁꽁 얼렸다.

검은 얼음덩어리로 변한 내장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도 그 코를 찌르는 냄새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더 멀리까지 퍼졌다.

감응부인 하얀 부적을 넣어 두었으니 요수가 내장을 물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우두커니 서 있지 않고 계속해서 날아갔다.

천한지 면적이 이렇게 넓은데 흑성조 한 덩이로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반나절 뒤 또 다른 흑성조를 찾은 그는 감응부를 심은 상비수 내장을 남겨 두고 그곳을 떠났다.

보름이 흐를 동안 그는 수십 개의 흑성조를 찾아 매번 상비수 내장을 한 덩이씩 던져놓고 이동했다.

그는 더 이상 흑성조를 찾아다니지 않고, 흑성조들이 깔린 중심에 몸을 숨겼다.

‘이걸로 충분해야 할 텐데…….’

여러군데 뿌려놓은 상비수 내장이 한돈을 유인하기에 충분해서가 아니라 상비수 내장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 * *

두 달 후의 어느 날.

호수 위로 엄청난 굉음이 수천 리 밖까지 들렸다. 천한지는 바다라도 되는 듯 커다란 파도가 일어 구름까지 닿을 기세로 출렁였다.

그 파랑의 중심에는 한립과 바다 돼지라 불리는 흑남색 복어 요수가 있었다. 몸집은 그리 크지 않아 거목만 했고 온몸에 흑남색 가시가 가득 박혀 있었다. 게다가 꼬리는 전갈처럼 갈고리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복어 요수를 뒤덮은 검은 기운 속에는 수시로 사람과 동물의 얼굴 허상이 떠올라 꿈틀거려서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바로 한립이 찾던 한돈이었다. 요수는 진선급의 방대한 기운을 내뿜었다.

이이잉!

어린아이가 우는 듯한 괴상한 소리를 내는 한돈은 광택이 나는 커다란 꼬리를 번개처럼 휘둘러서 한립을 공격하고 있었다.

갈고리형 꼬리가 움직일 때마다 희미하게 법칙의 기운을 머금은 남색 빛이 튀어나와 주변 수천 리에 하얀 성에와 얼음 조각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한립은 엄청난 냉기에도 두려움 없이 굵은 푸른 검기 두 개를 교룡처럼 움직여 검기의 그물로 남색 빛을 막아냈다.

열 받은 한돈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요수의 본명 한기는 강력하기 짝이 없어서 적의 체내에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어 우세를 점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눈앞의 인류 수사는 한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이때 한립은 체내의 중수진륜을 서서히 회전해 외부에서 침입하는 한기를 모조리 진륜 속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그가 손을 쫙 펼치자 뻗어 나온 네 개의 검빛이 집채만 하게 커져서 날아드는 남색 빛을 깡그리 가루로 만들었다.

이어서 네 검빛이 하나로 뭉쳐진 거검이 굵직한 금색 뇌전들을 품고 한돈을 베었다.

이이잉!

마치 금색 뇌전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듯이 한돈은 몸을 떨며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무형의 파문이 퍼져 알 수 없는 힘이 무형의 족쇄 역할을 했다.

한립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니까 금색 뇌검과 중간에서 우뚝 멈추었다. 낮게 으르렁거린 한돈은 전신의 가시를 번뜩여 주변의 검은 기운들을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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