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화. 선단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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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뒤, 적하봉 산허리의 거대한 동굴 안에 한립이 나타났다.
주변을 둘러본 그는 손가락을 튕겨 검기들로 산을 두부처럼 잘라내 거대 동굴 속에 십여 개의 작은 방을 만들어냈다.
그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매를 펄럭여 원숭이 떼를 풀어놓았다. 원숭이 떼들은 기쁜 얼굴로 새 거처를 구경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곧장 동굴 입구로 가서 적하봉에 오른 것을 확인한 붉은 털 후왕은 한립에게 돌아와 절을 올렸다.
“이제 이곳에서 머물면 된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산 정상의 내 시종들을 찾거라.”
따뜻한 한립의 목소리에 후왕이 끽끽 답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신영이 사라진 뒤에도 후왕은 다른 원숭이들을 불러 모아 한립이 있던 자리를 향해 절을 올리게 했다.
적하봉 정상의 동부로 돌아간 한립은 방에 돌화로를 두고 겹겹이 금제를 펼쳐둔 다음 밀실로 들어갔다.
종문의 집사 임무 세 가지도 완수했고, 중수진륜 제련도 일단락되었으니까 이제 단약을 제련할 때였다.
* * *
보름 뒤, 종명산맥 중부.
산 아래쪽과 정상은 뚱뚱한데 산허리는 잘록하게 들어간 호리병박 모양의 기이한 산봉우리가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호로봉(葫芦峰)이라 불리는 이곳은 어룡봉처럼 촉룡도에서 가장 중요한 산봉우리 중 하나였다.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은 천장 높이의 산 아래에는 질 좋은 영천(靈泉)이 있어 자욱한 영기가 이곳을 사시사철 푸르고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 주었다.
산 정상 인근은 강력한 방어용 진법으로 뒤덮여 있어서 제자들은 물론이고 장로도 반드시 산기슭의 전송대전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었다.
산봉우리의 경계가 삼엄한 원인은 단 하나였다.
촉룡도의 거의 모든 단약이 보관되어 있고 종문에서 오랜 세월 배양한 연단사들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호로봉에서 선인들을 위해 단약을 제련할 수 있는 지단사는 그중에서도 가장 신분이 높은 자들이었다.
진선경 초기에 이른 수사들도 적게는 백 년 길게는 수만 년이 걸려야 선규를 하나 뚫을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어려움은 배가 되었다.
적절한 단약의 보조가 있어야만 수련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단약들은 수만 년 된 영초들의 재료가 필요했고 심지어 보조 재료도 진귀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경험이 풍부한 지단사도 걸핏하면 실패해서 성공률이 극도로 낮았다.
한립은 인근 임전각에서 나와 호로봉 산기슭의 처마가 길게 뻗은 금색 대전으로 들어갔다. 주변의 수호진법과 긴밀하게 연결된 호로봉 장성으로 통하는 유일한 출입구였다.
웅!
신분을 증명한 그는 중앙의 전송진을 통해 사라졌다가 얼마 후 호로봉 정상 주홍색 대전 안에서 나타났다.
내부 배치는 시장의 약방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계산대 뒤로 칸칸이 나누어진 진열대가 서 있었고 그 중 지계 단약들이 든 칸은 눈부신 금제가 펼쳐져 있었다.
대전 안의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곳을 담당하는 집사장로 두 명 외에 단약을 구하러 온 내문장로 복색을 한 사람 몇 명이 다였다. 한립을 보고 호리호리한 체격에 상냥하게 생긴 중년 집사장로가 다가왔다.
“저는 엽남풍이라 합니다. 선약각(仙藥閣)의 집사를 맡고 있지요. 무엇이 필요하셔서 오셨습니까?”
“저는 려비우입니다. 수련보조용 단약을 구할까 하는데요.”
“아, 려 수사셨군요. 제가 몇 가지 추천을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사의 수행이면 통원단(統元丹)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열 알이 든 약병 하나당 공적점 2백 점이 필요하지요. 조금 더 좋은 물건을 구하시려면 짐령단(朕靈丹)도 좋은데 가격이 나가는 편이라 한 병에 공적점 5백점이 필요합니다. 단약의 개수는 똑같이 10알이 들어있고요.”
엽풍남은 미소를 머금고 막힘없이 설명해주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한립도 단약의 가격을 듣고 흠칫 놀랐다.
집사입무 세 가지를 완수한 그도 공적점이 5백에 이르지 못했는데 단약 한 병이 5백점이라니 너무 비쌌다.
“짐령단은 확실히 가격이 상당하군요.”
“그야 물론이지요! 종문 전체에서 호언 대사께서만 제련할 수 있는 단약이라 수량도 얼마 되지 않아서요.”
쓴웃음을 짓는 한립을 보고 엽남풍이 사정을 설명했다.
‘호언 대사?’
호언 대사라는 칭호에 한립은 회백색 낡은 장포를 입고 종일 술독에 빠져 사는 추레한 노인네를 떠올렸다.
그 노인네가 고계 지단사였단 말인가!
“두 종류 다 마음에 차지 않으시면 이 춘림단(春霖丹)을 가져가셔도 좋고요. 가격은 짐령단보다 낮고 약효는 통원단보다 좋습니다.”
“선약각에서 단약의 약방도 판매하는지요?”
“아……. 직접 연단을 해보려 하십니까?”
“그런 것은 아니고, 우연히 막 지단사에 이른 분을 알게 되어서요. 약방과 재료만 가지고 가면 원하는 단약을 제련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놀란 엽남풍을 보고 한립은 대충 둘러댔다. 그 소리에 엽남풍은 할 말은 많지만 참는 표정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약방과 재료를 어중이떠중이에게 넘기느니 이곳에서 제값을 주고 단약을 사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일 거라는 충고를 하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통원단과 춘림단의 약방은 구하실 수 있지만, 짐령단은 호언 대사의 허락이 없이는 함부로 판매할 수 없습니다.”
“가격은 어떻게 되는지요?”
“통원단 약방은 공적점 50점, 춘림단 약방은 150점입니다.”
웃으며 답하는 소리를 듣고 한립은 잠시 머뭇거렸다. 어떤 약방을 사는 것이 좋을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하하, 두 약방의 재료를 확인하시고 선택하셔도 됩니다.”
“수고스럽겠지만, 그럼 재료를 알려주시지요.”
엽남풍은 손끝으로 허공을 그어 푸른 서책을 하나 불러냈다. 그가 펼쳐서 넘겨준 부분에는 춘림단에 필요한 재료 목록이 적혀 있었다.
“5만 년 된 규룡초(虯龍草) 한 뿌리, 5천 년 된 단해화(斷海花) 세 송이, 풍호사(風戽沙) 한 줌, 3천 년 된 유라과(幽羅果) 일곱 개…….”
한립은 손으로 재료를 하나씩 짚어가며 꼼꼼하게 따져보았다.
총 15가지 영약들은 극히 오래된 영초들이 대부분이어서 가장 무난한 조건이 3천 년 된 영초였다.
“선약각의 영약 재료들을 구할 때도 공적점으로 교환하는 것입니까?”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특별히 진귀하거나 오래된 영초들은 선원석으로만 계산하셔야 하고 나머지는 선원석 혹은 극품영석으로 값을 치를 수 있습니다.”
“춘림단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구하려면 영석을 얼마나 내야 할까요?”
“흐음……. 주재료인 규룡초만 선원석 7개가 필요하고 나머지 영약들은 다 합쳐서 대략 극품영석 2천 개 정도면 됩니다. 물론 전부 선원석으로 계산을 하셔도 되고요.”
엽남풍의 말을 듣고 한립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지닌 선원석과 극품영석을 다 털어도 몇 번 제련해볼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
“통원단 재료 목록은 몇 장 앞쪽에 있으니 넘겨보시지요.”
한립이 서책을 몇 장 넘겨보려 하자 엽남풍이 알려주었다.
그의 말대로 두 장 앞쪽으로 넘기자 통원단 재료 목록이 보였는데 가장 첫 줄에 5만 년 된 촉령초(燭苓草)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동부 안 약재밭에 비슷한 연식의 촉령초가 몇 뿌리 쑥쑥 자라고 있었다. 빠르게 나머지 십여 가지 보조재료들을 훑어보았지만 더는 지닌 것이 없었다.
“촉령초를 제외한 나머지 영약재료들을 구하려면 얼마면 되겠습니까?”
“주재료인 촉령초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극품영석 천2백 개면 충분합니다.”
이 말에 한립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약방과 재료를 사가도 여러 차례 실패해가며 경험을 쌓아야 하는데 일단 그나마 저렴한 통원단으로 연습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통원단 약방으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영패를 주시지요.”
한립의 장로 영패를 받은 엽남풍은 공적점 50점을 제하고 돌려주었다.
“통원단의 주재료인 촉령초를 제외하고 나머지 재료들을 10회분 제련할 량을 구하고 싶습니다.”
약방을 자세히 살핀 한립은 가진 영석을 탈탈 털어 나머지 재료들을 사들였다.
* * *
3개월이 금방 지나갔다.
내내 밀실에 틀어박혀 있던 한립은 약방 연구에 열을 올렸다.
꼼꼼하게 모든 연단의 단계를 머릿속으로 곱씹어서 상상 속에서는 단약을 백번 천번도 넘게 연습해 보았다.
이전에 꽤 연단을 해보았지만 워낙 정교한 작업이라 사소한 실수가 결과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마침내 처음으로 통원단 제련을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방석 뒤쪽 탁자에 놓은 향로에서 청회색 향초가 타면서 흐릿한 연기를 내뿜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향기가 밀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립은 가부좌를 한 채 눈을 감고 모든 잡념을 지우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 앞에는 불꽃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보라색 청동화로와 푸른 비단 위에 놓인 촉령초를 포함에 열댓 가지 재료들이 놓여 있었다.
청동화로는 신원수 동부에서 가져온 것으로 통원단 제련을 하기에 충분히 좋은 물건이었다.
한립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손바닥을 펼쳐 수평으로 들어 올리자, 보라색 청동화로가 서서히 떠올랐다.
이어서 그의 입에서 원영의 불길에 뿜어져 나가 화로를 가득 채웠다.
우웅!
청동화로 표면의 고풍스런 주술문양과 불꽃 문양들이 밝게 달아올라 붉은 기운을 내뿜었다. 열기가 충분히 오르자 그는 촉령초를 손바닥 위로 불러들였다.
휘웅!
푸른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나타나 촉령초를 맷돌처럼 갈아 미세한 분말로 만들었다. 촉령초 분말은 청동화로 속 화염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슬슬 밀실 안에 짙은 약향이 번지기 시작했다.
한립은 세심하게 불을 조절하면서 약방에 따라 순서대로 재료를 집어넣었다. 하루를 꼬박 새우고도 밀실 안의 불길을 꺼지지 않았다.
댕!
청동화로가 서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립은 화로의 뚜껑을 열고 진한 약 내음 속에서 긴장된 눈길로 무언가를 찾았다. 화로 안에는 새까만 재와 가루 비슷한 것만 남아 있을 뿐 단약은 한 개도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첫 번째 시도는 대실패였다.
가루를 묻혀 손끝으로 비벼보고 냄새를 맡은 한립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불 조절을 잘못해서 단약이 응결하기 전에 온도를 너무 높인 것이 문제였다.
원인을 파악한 그는 반나절 휴식 뒤에 두 번째 시도에 들어갔다.
* * *
열흘 뒤, 같은 밀실 안.
한립 앞에는 작은 무덤처럼 검은 가루 아홉 덩이가 쌓여 있었다. 그것은 아홉 번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계속 불 조절을 못해 단약을 망치자 그도 울적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립은 잠시 연단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화력을 높이다가 단약이 뭉쳐지면 적정한 온도를 맞춰야 했는데 그 순간이 너무 찰나여서 포착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적어도 십여 번은 실패해가면서 감을 익혀야 할 듯싶었다. 아마 그래서 지단사가 아주 드문 것이 분명했다.
진귀한 재료들을 산처럼 쏟아부으면서 연습해야 겨우 경지를 높일 수 있는 분야였다. 문제는 그는 그럴 여력이 되지 않았고 지금 남은 재료로는 한 번밖에 더 시도해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단약이 뭉쳐지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을까? 미간을 좁히고 있던 그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팟-!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자 등 뒤로 금색 고리가 떠올랐다. 바로 진언보륜이었다.
보륜 표면의 열네 개의 반투명한 시간 도문이 기이한 법칙 파동을 발산해 밀실 내 공기의 흐름을 느릿하게 만들었다.
한립은 법칙 파동의 영향력을 한 장 내외로 조절해서 선령력 소모를 줄인 다음 원영의 불길을 뿜어서 청동화로에 불을 일으켰다.
불길이 화르륵 치솟는 속도가 이전보다 세 배는 느려져 화염의 궤적이 보였다.
영약 재료들을 분말로 만들어 차례로 화로 속에 넣는데 진언보륜의 영향 탓에 모든 과정이 훨씬 느리게 진행되었다.
한립은 명청령안으로 화로 속의 변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하루면 될 제련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만 한립은 몇 번은 통원단 제련을 더 해본 것처럼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특히 단약이 뭉쳐지는 시점을 파악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서서히 화로의 불길이 줄어들고, 진언보륜을 몸속으로 돌려놓은 한립은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쏟아보았다.
검은 가루 속에서 무언가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용 눈알 크기의 단약 여덟 개가 은은한 금빛을 띠고 있었다.
단약들을 집어 든 한립은 굉장히 만족했다.
약방에는 통원단 제련에 성공하면 열댓 개를 얻을 수 있다고 했지만 겨우 10번의 연습 끝에 단약을 얻은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진언보륜이 있으면 앞으로도 단약 제련 성공률을 대폭 높일 수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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