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6화. 후왕의 선물
*
2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휙-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있던 한립은 손을 저어서 서서히 회전하는 검은 중수진륜을 불러냈다.
쿠쿠쿵.
밀실 허공이 진동하는 통에 공기가 벽을 때려서 울림이 생겨났다. 한립은 미소를 머금었다.
2년 넘게 동부에서 나서지 않은 그는 꾸준히 중수진륜에 중수를 흡수시키면서 지기화신에게 정기적으로 수정알갱이를 보내주었다.
중수진륜은 스물 댓 번 정도 중수를 흡수하고 위력이 적어도 세 배는 강해졌지만, 그 후로 흡수 속도와 양이 현저히 감소했다.
거의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그럼에도 이미 중수진륜의 위력은 놀라운 단계까지 이르러 있었다.
한립은 중수진륜을 잡아채서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쿠릉.
동부의 대문이 열리고 그가 나타나자 인근 건물에서 손부정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장로님을 뵙습니다.”
“나를 기다린 이유가 무엇이냐?”
“영지 내의 밭들은 정비를 마쳤습니다. 어떤 영초를 심으실 계획인지 여쭙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립의 물음에 손부정이 공손히 답했다.
“무엇을 어떻게 심을지는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이다.”
“예.”
손부정은 그가 준 저물대를 받아들고 얌전히 물러났다.
장원을 거닐던 한립이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진법이 설치된 산 아래 밭에서 몽천천 등이 바삐 무언가를 하고 있었고, 적하봉 인근에는 쌍두사응수가 날아다니면서 순찰을 돌고 있었다.
영지에 사람은 많지 않아도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미소를 지은 그의 신형이 번득 사라져 적하봉 아래 폭포 옆에서 나타났다.
눈 덮인 골짜기 안의 폭포가 얼어붙어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 규모가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적하봉 자체가 영기가 짙은 덕에 수목들은 잘 자라고 있었다.
끽끽끽!
중수진륜을 불러내 술법을 펼치려던 한립이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수풀 속에 원숭이 떼들이 즐겁게 떠들며 놀고 있었다.
붉은빛이 반짝이고 그 안에서 붉은색 털 원숭이 한 마리가 날아들어 한립 가까이에서 멈추었다.
후왕이었다.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덩치도 커지고 털도 불타는 것처럼 선명하고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수행이 늘어 영성이 높아졌구나.”
끼끼끽!
붉은 후왕은 고마움을 담은 눈빛으로 공손하게 절을 올렸고, 나머지 원숭이 떼들도 몰려나와 엎드렸다.
“내 약간의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네 자질이 뛰어나고 이곳 환경이 좋아 지금의 수행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내 도움이 없었어도 조만간 이리되었겠지.”
뒷짐을 쥔 한립은 담담히 말해주었다.
그러나 붉은 후황은 고개를 저으며 마치 무슨 말을 하는 듯 끽끽거리면서 손을 저었다. 그러자 원숭이 떼 중 한 마리가 노란 호리병을 들고나와 한립 발치에 내려놓았다.
은은한 향기가 퍼지는 것을 보니 술인 듯했다. 한립은 바닥의 호리병박이 아니라 붉은 후왕을 쳐다보았다.
“설마 줄곧 여기서 나를 기다린 것이냐?”
후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끽끽거렸다.
이에 한립은 약간 감동이 일어 손을 저어 푸른 빛 한 덩이를 수십 개로 분리해 원숭이들의 몸에 스며들게 했다.
원숭이 떼는 들떠서 끽끽대고 펄쩍펄쩍 뛰어댔다. 그리고 붉은 후왕에게는 따로 단약 하나를 던져 주었다.
냉큼 입을 벌려 단약을 삼킨 후왕은 붉은빛이 넘실거리다 한참이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요기가 늘어난 후왕은 퍽 좋아하며 노란 호리병박을 한립 쪽으로 밀어주었다.
“너희가 빚은 술인가 보구나? 원숭이들의 후아주(猴兒酒)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다. 오늘 그 맛을 보게 되겠구나.”
미소를 지은 한립은 호리병박을 끌어와 뚜껑을 열었다. 향기가 열 배는 진하게 느껴져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립은 약간 놀랐다.
순박한 원숭이들의 성의를 보아서 맛이나 보려고 했는데 후아주의 품질이 상상을 뛰어넘었다.
한 모금 삼키자 특유의 향이 번져 호언 장로의 거처에서 맛본 선주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술맛이 느껴졌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술을 빚은 것이지? 비결이라도 있느냐?”
한립이 흥미로운 얼굴로 묻자 붉은 후왕은 머리를 쥐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비결이 있구나!’
한립은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원숭이들의 후아주 비결을 알아내면 쓸 곳이 있었다. 호언 장로가 겉보기에는 정신이 없어 보여도 내력이 심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좋은 관계를 형성해 두면 나쁠 것이 없었다. 단약 몇 개를 꺼내 거래하려는데 붉은 후왕이 끽끽! 소리를 치고 몸을 돌려 달려갔다.
“…….”
한립이 그냥 보고 있자 후왕은 얼마 가지 않아 고개를 돌리고 또 끽끽 울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이에 한립은 원숭이를 쫓아갔고, 바람처럼 달려간 후왕은 십여 리 밖 훈훈한 바람이 부는 어느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바깥보다 훨씬 온난한데도 단단한 바위들만 가득하고 풀은 보이지 않았다.
쏴아아아!
그곳에도 꽤 규모가 있는 폭포가 떨어져 물보라가 치고 있었다. 후왕은 거침없이 펄쩍 뛰어 폭포 속으로 들어갔고 한립도 그 뒤를 따랐다.
폭포 뒤에는 커다란 동굴이 뚫려 있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은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동굴을 중심으로 몇몇 작은 동굴들이 연결된 이곳은 원숭이들의 소굴인지 사방에서 가냘픈 끽끽 소리가 들리고 아기 원숭이들이 몇 마리 얼굴을 들이밀고 후왕의 팔에 매달렸다.
이어서 어미로 보이는 원숭이가 나와서 한립을 경계하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크릉!
붉은 털 후왕의 낮은 으르렁거림에 어미 원숭이가 깜짝 놀라 눈을 내리깔고 작은 동굴 속으로 돌아갔다.
후왕은 한립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끽! 울고 계속해서 동굴 깊은 곳으로 달려갔다. 가장 안쪽 동굴은 넓지 않았는데 사람 키만 한 화로 안에서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회백색 화로는 돌로 만든 것인지 가운데가 둥그렇게 움푹 파여 있고 고깔 모양의 덮개가 덮여 있었다.
주술문자가 새겨진 화로는 평범해 보이지 않았는데 어떤 기운도 풍기지 않아 그냥 보통의 화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붉은 후왕은 뭐라 뭐라 떠들더니 펄쩍 뛰어올라 화로 위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서 은은하게 붉은빛을 띠는 액체가 후아주의 향기를 머금고 끓고 있었다.
아직 다 된 것이 아니라 과실의 껍질과 씨앗 조각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한립은 바닥에도 어지럽게 과실의 껍질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후아주를 이것들로 담았단 말이냐?”
그가 바닥의 껍질과 씨앗을 가리키자 후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화로를 자세히 살피던 한립은 눈을 반짝였다.
아무리 천지영기가 짙은 종명산맥에서 자랐다지만 그것들은 흔한 야생과실들이었다. 이런 과실로 선주와 비견될 만한 술을 빚은 것은 이 신비로운 화로 덕이 분명했다.
한립은 손바닥을 돌 화로에 가져다 대고 천천히 선령력을 주입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푸른빛을 방출하면서 선령력의 양을 늘린 한립이 동시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돌 화로 표면의 주술문자 8개가 잠깐 반짝이다가 어둑해졌다.
한립은 기쁜 얼굴로 선령력과 의식을 회수했다. 역시 돌화로에 무언가가 있었다.
“이 화로는 어디서 난 것이지?”
한립의 질문에 후왕은 머리를 갸웃거리다가 동굴 곳곳을 가리키면서 끼끽 울어댔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말이냐?”
후왕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 안에 신비한 화로가 들어있었다니 누군가 이 안에 숨겨 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어떤 사연으로 여기까지 굴러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술을 빚기에 최상의 보물인 것만은 확실했다.
끽끽! 끼끼끽!
이때 다른 원숭이 떼가 바깥에서 몰려 들어와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놀기 시작했다.
몇몇 원숭이들은 힐끔힐끔 동굴 안쪽을 살피기도 했는데 함부로 화로가 있는 동굴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 돌 화로를 가져가고 싶은데 줄 수 있겠느냐?”
잠시 바깥을 쳐다보던 한립이 붉은 털 후왕을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물론 그냥 가져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약이든 영과(靈果)든 네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 알아서 골라보거라.”
한립 앞에 한 무더기의 물건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후왕은 단약과 영과를 보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였지만 힘차게 고개를 저어 유혹을 떨치고 손으로 멀리 적하봉 방향을 가리켰다.
그걸 본 한립은 침음했다.
“……너를 적하봉으로 데려가 달라는 뜻이냐?”
끼끼끽!
후왕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바깥에서 떠들고 있는 원숭이들을 가리켰다.
“쟤들도 다 같이?”
한립의 물음에 후왕은 잔뜩 희망을 품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 원숭이 떼도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갑자기 조용해졌다.
“좋다, 다만 적하봉은 이곳보다 영기가 짙은 대신 훨씬 추울 텐데 너희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후왕은 한립의 말을 듣고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자신이 있다면 잠시 후 같이 돌아가자꾸나. 너희는 일단 거처를 옮길 준비를 하고 있거라.”
한립은 쌓아 둔 물건을 거두었다.
흥분한 후왕은 곧바로 바깥으로 나가 재잘대기 시작했다.
끼기기긱! 끼끽!
원숭이 떼가 그 소리를 듣고 흥분해 환호하며 동굴을 뛰어다녔다. 이에 한립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푸른빛으로 돌 화로와 안에 담긴 후아주를 챙겨 넣고 흡족하게 동굴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푸른 빛줄기는 폭포를 벗어나 수천 리 밖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풀이 거의 자라지 않은 눈 덮인 황량한 산봉우리 몇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가볍게 숨을 내쉰 그가 두 손을 교차해 훅! 하고 중수진륜을 떠오르게 했다. 중얼중얼 주문 외우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에서 선령력이 보물 속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갔다.
검은빛을 방출한 중수진륜은 몇 배로 커져서 무시무시한 영기의 압력을 폭발했다.
솨아아아.
검은 빛의 파문이 파도처럼 퍼져나가 주변 만 리의 천지영기가 요동쳤다. 수많은 남색 빛 알갱이들이 급속도로 몰려드는 것을 본 한립은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중수진륜이 쾌속으로 돌면서 검은빛과 물의 도문의 남색 빛이 섞여 흑남색의 태양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무형의 파동은 점점 강렬해져서 광풍과 함께 허공을 격렬하게 진동시켰다.
쿠르릉!
한립이 팔을 휘젓자 중수진륜이 검은빛과 남색빛을 가득 머금고 거대한 빛줄기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지진이 난 것처럼 산봉우리들이 흔들리고 눈 덮인 지면에서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라 광풍에 흩어졌다. 거대한 기류에 고공의 구름이 다 출렁이고 있었다.
수천 리 밖 적하봉에서도 진동이 느껴져서 나무에 쌓인 눈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산 아래에서 밭일을 하던 손부정과 시종들은 놀라 시선을 마주쳤지만 아무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몰랐다.
“려 장로님께서 공법을 수련하고 계신 걸까요? 진동이 산 정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느껴진 것 같은데요?”
“일대에서 장로님을 제외하고 이런 현상을 일으키실 분이 있더냐. 막 출관을 하셨으니 그간 익힌 공법의 위력을 시험하고 계시던가 아니면 새로 제련한 보물을 살펴보고 계신 것이겠지.”
누군가 입을 열자 손부정이 진동이 밀려든 방향을 바라보면서 의젓하게 답했다. 몽천천도 존경스런 눈빛으로 같은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수천 리 밖에서는 아래쪽 상황이 드러났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깊은 구멍이 길게 파여서 마치 땅을 두 쪽으로 가른 것 같았고, 그 지하에서 붉은 용암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원래 있던 황량한 산봉우리는 가루가 되어 사라진 뒤였다. 한립 옆에는 중수진륜이 원래 크기로 돌아가 서서히 회전하는 중이었다.
중수진륜을 전력으로 발동하느라 선령력을 3할이나 소모한 한립은 안색이 조금 창백했으나 표정은 좋았다.
중수진륜의 위력은 웬만한 후천선기 못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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