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84화 (1,341/2,000)
  • 1584화. 문답(問答)

    *

    돌아간 한립은 백소원 무리가 소동초에 의해 송과령 인근의 어느 골짜기로 옮겨진 것을 발견했다. 골짜기에는 시험 담당자인 방우와 다른 두 무리의 제자 십여 명도 함께 있었다.

    척환우 무리 중에서 네 명의 수사가 육신이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사상자는 없었지만 다들 죽다 살아난 얼굴이었다.

    골짜기 안의 바위에 앉아 있던 소동초도 약간의 부상을 입은 듯했다.

    “그자는 잡으셨습니까?”

    한립이 돌아온 것을 본 소동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한 것이었다.

    “육신은 망가트렸지만 원영은 정체 모를 피의 술법을 사용해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나마 려 형께서 제때 와주셔서 제자들이 무사했습니다. 제 쪽은 잠깐 방심을 한 사이에 그만……. 하아, 그래도 육신만 사라졌지 목숨은 부지해서 종문에 고할 말은 있겠어요.”

    소동초는 연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소 형께서 보시기에 이번 시험을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시험에 진선경 수사가 나타나 제자를 납치해 가려고 했는데 그럴 수야 없지요. 반드시 여기서 시험을 중단하고 먼저 종문으로 돌아가 보고를 해야 합니다.”

    “옳으신 결정입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렇지, 이것들은 몇몇 장로들이 성의 표시를 한 것인데 려 형의 몫입니다.”

    소동초는 갑자기 품에서 저물대 하나를 꺼내 한립의 건네주며 전음으로 말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한립은 예의상 한마디를 하고 저물대를 받아 넣었다. 그가 오늘 제때 나서지 않았으면 소동초가 몹시 곤란해졌을 것이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날아가지 않고 원래 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갔다.

    이번 일을 통해 기고만장하던 응석받이 제자들도 철이 좀 들었는지 척환우와 당천은 훨씬 과묵해져 있었다.

    소동초가 앞서가고 중간에 내문제자들이 그리고 마지막에 한립이 걸어갔다.

    백소원은 낯선 이의 입에서 백 가 노조의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극은 걷다 서다 하면서 삼세번을 고민하다 결국에는 은근슬쩍 뒤쪽의 한립에게 다가갔다.

    그가 막 말을 걸려고 할 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손 수사, 오랜만일세.”

    “아……. 정말 려 형……. 아, 아니, 려 장로님이 셨군요!”

    “과해뇌주에서 속인 일로 마음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멍하니 려 형이라 부르다 공손하게 말을 고치는 손극을 보고 한립이 웃음 지었다.

    “마음을 상하기는요……. 다만 려 장로님께서 촉룡도 내문장로로 계신 줄 알았으면 어렵사리 다른 분을 찾아 입문하는 조건으로 보물을 바치지 말고 장로님을 찾아갈 것을 그랬습니다.”

    “하하, 나도 생각하지 못했군. 그때 수사가 이곳으로 향하는 줄 알았다면 함께 왔을 텐데 말이야! 과해뇌주에서 손 수사와 함께 마신 술맛이 아직도 입안을 맴도는데, 요 며칠 멀리서 자네의 화연주를 보면서 침만 삼켰지 뭔가.”

    “려 장로님께서 맛보고 싶으시다면 당연히 드려야지요. 아직 몇 병이 남아 있습니다.”

    “손 수사, 부탁할 일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는가?”

    한립은 갑작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지요.”

    놀란 손극이 서둘러 말했다.

    “내 영보로 손 수사의 화연주 비법을 바꾸고 싶은데 혹시 가능한지 모르겠군?”

    “아…….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술은 다른 선주와 달리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이라 바깥세상에서는 빚는 법이 실전된 지 오래입니다. 가문에서 엄히 금하는 것을 제가 몰래 갖고 나온 것이고요. 허나 려 장로님께서 두 번이나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려 장로님께 비법을 바치겠습니다. 제가 수행은 낮아도 은혜를 모르는 그런 사람은 아니니까요.”

    난처한 얼굴로 설명하던 손극은 결국에는 결정을 내렸다.

    “바칠 것까지는 없네. 자네는 비법을 알려주고 나는 영보를 주는 공정한 거래를 하지! 이 검은 자네의 수행으로는 아직 다루기 어렵겠지만 앞으로 열심히 수련해서 잘 써주게.”

    한립은 저물대를 건네주었다. 신원수에게서 빼앗은 금색 장검이 든 저물대였다.

    손극은 황송하다는 얼굴로 저물대를 받고는 정체 모를 재질로 된 낡은 두루마리 종이와 새빨간 술병을 바쳤다.

    한립은 술병만 넣어두고 낡은 종이는 내용을 확인한 다음 따로 옥간을 꺼내 기록하고 돌려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살갑게 대화를 나누다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을 다른 제자들도 알고 있었다.

    손극이 내문장로와 퍽 가까운 관계인 것을 안 이들은 부러워하면서 손극을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가문에 진선경 수사가 버티고 있어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거기다 그들이 볼 때 ‘려 장로’가 소 장로보다 더 대단해 보였다.

    그가 보호한 당천 일행은 멀쩡하게 돌아왔는데 소 장로가 보호한 척운우 일행은 네 명이나 육신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몇몇 여수사들의 눈빛도 묘하게 달라졌다.

    * * *

    촉룡도로 돌아온 후, 소동초는 방우에게 제자들을 조양전으로 데리고 가라 이르고 자신은 급히 종문 고위층에게 고하러 갔다.

    이번 시험에서 그가 책임자 중 가장 수행이 높았으니 종문에 설명해야 할 책임도 그에게 있었다.

    특히 출발하기 전에 장로들에게 받은 것도 있었으니 육신이 사라진 제자들에 대해서도 입을 싹 씻을 수는 없었다.

    한립은 그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소동초와 인사를 나누고는 경운동으로 가서 태현전 뒤쪽 편전으로 향했다.

    편전은 여전히 한적했고 반쯤 열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추레한 노인이 심심한 얼굴로 책상 뒤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술맛이 아무리 좋아도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었는데……. 며칠 사이에 그 많던 술이 다 떨어졌구나…….”

    한립은 주홍색 호리병을 들고 나발을 불어대는 노인의 푸념을 들으면서 다가갔다.

    “보아하니 세 번째 임무를 마친 모양이구나. 일 처리가 아주 빠른 녀석이야! 그중에 마음에 드는 여인은 없더냐?”

    “시험은 중간에 사고가 생겨 중단되었습니다. 하지만 담당한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데, 이런 경우 임무를 완수한 것으로 인정이 되는지요?”

    한립은 간단히 현빙산맥에서의 일을 보고하고 자신의 장로 영패를 내주었다.

    “걔들이 시험에 통과하고 말고는 너랑도 상관없고, 나랑도 상관없지! 너는 네 할 일만 다 했으면 임무 완수인 거다.”

    노인을 영패를 받아들고 공치책을 불러내서 임무에 해당하는 공적점을 기록해주고 돌려주었다. 그러나 그는 영패를 챙겨 넣고서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냐? 집사 임무는 끝난 것으로 아닌데 따로 네 번째 임무라도 수행하려고?”

    힐끗 그를 본 노인이 탐탁지 않게 물었다.

    “농담도 잘하십니다. 그보다 이전에 도병에 관해 하신 말씀은…….”

    “그만, 그만! 선주 비법을 갖고 오지 못하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 도병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해주지 않을 테니 괜히 힘 빼지 말라고.”

    “너무 서둘러 거절하지 마십시오. 오늘 임무도 마쳤겠다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선배님과 술 한 잔 더 해도 될지요?”

    한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웃음 지었다.

    “요 며칠 너무 바빠서 새로 술을 빚을 시간도 없었다. 지금 나 먹을 술도 아까운 판에 네 녀석에게 줄 것이 있겠느냐? 지난번에 흥이 올라서 퍼준 술이 아까워서 지금도 속이 쓰리단 말이다! 괜히 노부의 도병에 대해 떠보려 들지 말고 썩 꺼지거라!”

    호언 노인은 들고 있던 주홍색 호리병까지 허리춤으로 감추면서 축객령을 내렸다.

    “선배님의 술을 얻어 마시려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한 잔을 올리려고 하는데도요?”

    “허허, 네 녀석이 내게 술을? 노부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어쭙잖은 술을 내놓았다가는 욕을 한 바가지나 쏟아부을 수도 있다! 도병의 일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너를 경운봉 밖으로 냅다 걷어찰 수도 있단 말이다.”

    호언 노인은 눈썹을 한껏 끌어올리고 경고했다.

    탁!

    그 말에도 한립은 긴장하지 않고 책상 위에 비취색 옥 잔을 두 개 올려놓았다.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매끈한 옥 안에 가느다란 금사가 섞여 기이한 무늬를 만들어냈다.

    “큼, 금사옥잔(金絲玉盞)? 잔은 나쁘지 않아…….”

    핀잔을 주려던 노인이 옥잔을 보고는 헛기침을 했다.

    별다른 대답 없이 새빨간 술병을 불러낸 한립은 나무 재질로 된 병마개를 퐁! 하고 열었다.

    짙은 술 향기가 순식간에 편전을 가득 메우고 호언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빨간 코를 킁킁거렸다.

    “어서어서! 아직도 안 따르고 뭐하는 것이냐! 노부의 잔부터 채우거라. 이 향기라니, 뱃속에서 빨리 술을 부으라고 벌써 난리가 났다!”

    몸이 책상에 반쯤 엎어진 노인이 한립이 든 술병을 주시했다.

    쪼르륵!

    한립은 곧바로 책상의 금사옥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호언 노인은 조급하게 굴던 것과 달리 술잔을 들어 유심하게 관찰을 했다.

    선홍색 술은 화염처럼 뜨끈한 붉은 빛을 머금고 있어서 찰랑이는 물결을 따라 화염이 일렁이는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노인이 술잔을 기울여 살짝 입술을 적시고는 당장에 눈을 부릅떴다. 참지 못하고 술잔을 꺾어 술을 입안에 털어 넣자 맑은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 온몸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반쯤 눈을 감은 노인은 술맛의 여운을 감상했다.

    만족스러운 노인의 표정에 한립의 입가에도 잔잔히 미소가 맺혔다.

    “녀석아, 이렇게 좋은 술은 어디에서 난 것이냐? 노부가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술이라니.”

    호언 노인은 한참 만에 입맛을 다시면서 입을 뗐다.

    “화연주라는 술입니다. 황란대륙에서 생산되는데 빚는 방법은 오래전에 실전되어서 지금은 구하기 어렵지요.”

    “뭐라! 실전되었다고?”

    웬 청천벽력 같은 소리냐는 듯 호언 노인이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재빨리 냉정을 되찾은 그가 한립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흥, 실전된 술을 네 녀석은 어찌 구했고?”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알고 싶은 것은 화연주를 빚는 비법을 알려드리면 선배님이 도병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을 제게도 알려주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그 말에 노인이 약간 고개를 숙이고 고민했지만 한립은 상대가 곁눈질로 새빨간 술병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을 보았다.

    과연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에잇, 그까짓 것! 이것도 인연이라 할 수 있으니, 그 화연주와 선주를 빚는 방법을 넘겨주면 노부도 도병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마.”

    “그건 안되겠습니다. 분명 술을 빚는 비법만 갖고 오면 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저도 화연주는 이것 한 병뿐인데 그냥 드릴 수야 없지요.”

    “그냥 줄 수는 없다? 답답하게 말 돌리지 말고 말해 보거라. 그래, 또 뭐가 탐나서 그리 뜸을 들이는 것이야?”

    “하하,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이온데, 이 영초는 어떻게 화분에서 키우시는 것입니까?”

    멋쩍게 미소 짓은 한립은 궁금하던 바를 질문했다.

    “으하하, 난 또 뭐라고! 그건 진짜 별것도 아니다. 알려주마, 알려주면 될 게 아니냐!”

    호언 장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립은 상대가 통 크게 답하는 것이 의아했는데 화분에 심는 법을 듣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약을 화분에 심는 방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는데 영약에 적합한 용기를 찾는 것과 충분한 영력을 공급할 영액을 배합하는 부분이 어려웠다.

    호언 장로가 지닌 검은 화분은 그 자체로 천지영기를 흡수하는 법보라서 영약이 땅속이 아닌 얼마 안 되는 화분의 흙 속에서 살아남게 해주었고, 이 방법으로 키울 수 있는 영약의 종류도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렇게 제한이 많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 난 약속을 지켰다. 어서 화연주와 그 비법을 주거라.”

    호언 노인은 즐겁게 웃음을 흘리며 그를 재촉했다. 한립은 술병과 복제해 놓은 비법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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