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3화. 중수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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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각, 설타령 심처.
척환우를 포함한 다섯 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야트막한 언덕 뒤에 숨어 있었다.
처절한 격전을 벌이기라도 한 것처럼 대부분 심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들 옆 허공에는 소인 두 명이 둥실 떠 있었다.
육신이 훼멸한 일행의 원영이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언덕 전방 수백 장 거리에 있는 검은 빛의 진법에 고정되었다.
진법 아래쪽에는 거대 요수의 시체가 엎어져 있었고, 진법 안에는 소동초가 갇혀 요란하게 술법을 써대면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빛의 진법은 더없이 단단해서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부서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 *
그 시각, 송과령 깊은 곳까지 진입한 손극과 백소원을 비롯한 여섯 명은 점점 더 손발이 잘 맞아서 비교적 실력이 강한 요수들도 잘 처리하고 있었다.
“손 사형, 지도에서 보면 이곳에서 천여 리 앞이 설구수(雪鳩獸) 활동 지역이라고 되어 있어요.”
백소원은 손극과 나란히 비행하면서 눈 덮인 전방을 응시했다.
“성격이 고약한 녀석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손극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소원이 둔광을 멈추고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멀리 수풀 속을 쳐다보았다.
거의 동시에 멈춰선 손극이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냈고, 나머지 네 수사들은 흩어져서 미리 준비해둔 보물을 방출했다.
“콜록, 콜록……. 꼬맹이들이 제법 실력이 있구나.”
탁한 기침 소리와 함께 새하얀 장포를 입은 키 크고 야윈 노인이 유유히 수풀 속에서 걸어 나왔다.
“어째서 그곳에 숨어 계셨던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선배님.”
백소원은 놀란 와중에도 공손히 물었다. 사실 그녀는 상대의 수행과 기운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몸에 지니고 다니던 보물이 경고하지 않았으면 결코 누군가 숨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손극 등도 비슷한 생각인지 눈짓을 교환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네가 백소원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허허, 월화선체를 지닌 한 송이 꽃이 따로 없구나! 잔말 말고 노부와 함께 가자꾸나!”
야윈 노인은 백소원을 훑고 담담히 말했다.
“본종 장로께서 가까이 계시니 경거망동하시지 마시지요!”
백소원은 표정 변화 없이 외쳤다.
“허허, 호기를 부리는 것은 좋으나 너희 촉룡도 암위는 이미 노부에게 속아 다른 곳에 갇혀 있다. 얌전히 노부를 따라가겠느냐 아니면 강제로 끌려가겠느냐?”
야윈 노인은 조소했고 그 말에 손극 등은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종문에 기댈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여러 경로를 통해 알음알음 소문을 들어 시험에 암위가 있을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실은 정심환(定心丸)을 복용하는 것보다 효과가 좋아서 안심하고 시험을 치를 수 있었는데 뜻밖에도 암위가 갇혀 있다니 어쩔 수 없이 겁이 났다
“저는 선배님을 처음 뵙는데 어찌 이러시는지요.”
눈을 데구루루 굴린 백소원이 표정을 풀고 질문을 했다.
“허허, 줄곧 너희 백가 노조의 행방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나를 따라가면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저희 노조님을 아십니까?”
“백봉의 장로라면 알다마다.”
노인은 여유롭게 답했다. 백소원의 얼굴에 머뭇거리는 기색이 떠올랐다. 영리한 그녀였지만 이런 상황에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했다.
“백 사매, 저런 말에 넘어가선 안 되네! 수사를 속여 납치하려는 거야.”
그 모습에 손극이 얼른 입을 열었다.
“압니다. ……노조님을 안다면 신물을 꺼내 보여주시지요!”
백소원은 짧게 답하고 노인에게 신물을 요구했다.
“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노부의 인내심도 여기까지다! 말이 많으면 일을 그르치기 쉬우니까.”
노인은 표정이 서늘해지며 손바닥을 펼쳐 금빛 찬란한 탄환을 쏘아 보냈다.
펑!
탄환이 터지면서 커다란 그물로 변해 백소원 일행을 덮쳤다. 깜짝 놀란 백소원은 발끝으로 지면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지만, 수행 차이가 너무 나서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손극과 나머지 수사들은 더더욱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팟.
그 순간, 백소원 앞 허공에 아무 징조도 없이 흐릿한 인영이 나타나 손을 저었다.
촤륵!
검은 액체 덩어리가 날아가 맹렬하게 날아들던 금색 그물을 바닥에 처박았다.
“이럴 수가!”
야윈 노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려 장로님?”
겨우 똑바로 선 백소원은 뒷모습만 보고 한립을 알아보았다. 그녀 앞에 나타나 노인의 공격을 막아준 사람은 바로 한립이었다.
“당신 말대로 말이 많아서 일을 그르치게 되었군요. 게다가 난 분명 줄곧 이곳에 있었는데 어째서 갇혀 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입니까. 저 아이들이 종문으로 돌아가 나를 발고하기라도 하면 공적점이 깎인단 말입니다.”
한립은 제자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야윈 노인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어쩐지 사라진 인영의 기운이 똑같은데도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했더니……. 속지 않았다고 한들 겨우 진선경 초기인 놈이 노부를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야윈 노인이 냉소하며 손에서 불러낸 7개의 비검으로 검진을 이루어 한립을 공격했다. 주술문자가 큼지막하게 박힌 비검들이 하얀 화염을 머금고 하얀 솔개처럼 쇄도했다.
그걸 본 한립은 두 손을 펼쳐 검은 중수로 사람 크기의 검은 교룡 형상을 만들어 일곱 비검이 이룬 하얀 솔개와 충돌하게 했다.
콰콰쾅!
폭음과 함께 하얀 불똥이 튀어서 주변 눈들이 치지직 거리면서 자욱한 증기로 변했고, 눈이 녹다 못해 설지침송 십여 그루는 나무까지 활활 타올랐다.
“백 사매, 저분이 누군지 압니까?”
손극이 한립을 보고 이상하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본종 내문장로이신 려비우 장로님이십니다.”
노인과 한립의 싸움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백소원은 그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빠르게 답해주었다.
그 말에 손극은 그야말로 대경실색했다. 려 장로는 과해뇌주를 같이 타고 온 인물과 이름이 같았고 기운도 비슷했다. 문제는 기운은 비슷한데 수행은 천지차이라는 점이었다.
그때 야윈 노인이 괴성을 터트렸다.
비검들이 변한 하얀 솔개가 두 날개를 펼치고 강렬한 화기를 뿜어내 한립의 검은 교룡이 슬슬 밀리고 있었다. 한립은 신속히 수결을 맺으면서 주문을 외웠다.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팔뚝 크기의 검은 원반이 그의 등 뒤에 떠올라 강렬한 물의 기운을 내뿜었다. 바로 중수진륜이었다.
“가라.”
그러자 텅 빈 죽통(竹筒)이 울리듯 웅웅 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흐릿하게 변한 중수진륜은 쾌속으로 회전하면서 하얀 솔개를 향해 날아갔다.
불 솔개에 가까워진 중수진륜에서 물의 도문이 밝은 남색 빛을 머금어 물의 법칙의 기운을 방출했다.
이에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진 야윈 노인은 당장 금빛 찬란한 부적을 쏘아 보내 중수진륜과 하얀 솔개가 충돌하기 전에 솔개 속으로 흡수시켰다.
쿠릉.
하얀 솔개는 금색 부적에 힘입어 이전보다 더욱 작열하는 하얀 불구슬로 변해 중수진륜과 부딪쳤다.
콰앙!
절반은 고온의 화염, 나머지는 청량한 돌풍으로 이루어진 충만한 기운의 파랑이 그곳을 중심으로 퍼져나가 주변의 수풀을 난도질했다.
다행히 손극 등은 진작 뒤로 물러나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채채채챙!
꺾인 나무들 속에서 금속성의 충돌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검은 태양과 같은 중수진륜이 쾌속으로 회전하면서 비검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하얀 태양과 대치 중이었다.
한립이 손짓을 하자 물러나던 중수 교룡이 다시 하얀 불구슬을 향해 꿈틀꿈틀 움직였다.
펑!
둔중한 폭음과 함께 하얀 불덩이 속의 검은 교룡이 일곱 자루의 비검에 잘려나갔고, 대량의 검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후우웅!
바로 이때, 중수진륜의 물의 도문이 돌연 강렬한 흡인력을 발생시켰다. 갈라진 검은 액체들이 삽시간에 진륜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전보다 더 묵직해진 중수진륜이 회전하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해 하얀 불덩이를 서서히 뒤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야윈 노인은 불덩이와 중수진륜의 충돌로 시야가 가려져 한립이 더 많은 법력을 불어 넣은 줄로만 알고 전력을 다해 하얀 불덩이를 조종했다.
그 사이 한립은 손을 저어 허공에 검은 중수 교룡을 한 마리 더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중수교룡이 하얀 불덩이가 아닌 중수진륜을 향해 날아갔다.
팟!
중수 교룡이 스며든 진륜은 검은빛이 진해지고 체형이 약간 커져 더없이 묵직해졌다.
엄청난 물의 기운에 야윈 노인은 마치 산에 깔린 것처럼 숨을 쉬기가 곤란한 느낌을 받았다.
노인은 다급히 수결을 맺어 하얀 불구슬을 조정하면서 입에서 손가락 크기의 금색 목각 인형을 분출했다.
팟.
금색 목각 인형은 즉시 흐릿하게 사라져서는 귀신처럼 한립 머리 위에 나타나, 삼척 장신의 절굿공이를 든 금갑 괴뢰로 변해 한립의 머리를 으깨려 들었다.
중수진륜으로 검은 구슬을 튕겨낸 한립은 민첩하게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금색 비늘이 돋으며 순식간에 두 배로 부풀어 오른 그의 팔이 절굿공이를 쳤다.
뻑!
괴력을 품은 금색 주먹과 절굿공이가 부딪쳐서 사나운 파랑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 충돌음이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중수진륜도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폭음이 들려왔다.
한립이 날려 보낸 중수문뢰가 터지는 소리였다. 은색 뇌전들이 주변 백여 장을 뒤덮고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 있었다.
노인의 비검이 변한 하얀 불덩이는 그 충격으로 흩어졌지만 중수진륜은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회전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비검 일곱 자루 중에서 다섯 자루가 중수진륜의 무지막지한 무게와 힘에 가루가 되었고 본명 비검이 망가진 노인은 기혈이 엉망이 되어서 울컥 피를 토했다.
‘말도 안 돼!’
그는 피를 닦아낼 여유도 없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오랜 세월 몸속에 품고 배양한 금갑괴뢰가 도자기처럼 부서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남은 비검 두 자루를 챙길 여유도 없이 바로 몸을 날려 쾌속으로 달아났다.
챙강!
거의 동시에 금갑괴뢰가 산산조각이 났다.
“려 장로님, 적이 도망치고 있어요!”
백소원이 멀리서 큰소리로 외쳤다. 한립은 노인이 날아간 방향을 힐끗 보았지만 급히 뒤를 쫓지는 않았다.
그저 손을 저어 중수진륜과 노인이 남겨 두고 간 비검 두 자루 그리고 금색 그물로 변할 수 있는 탄환을 저물탁에 집어넣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수많은 은색 뇌전들이 몰려들어 커다란 뇌전 진법을 이루고 반짝이고 있었다.
콰르릉 콰쾅!
천둥소리가 들리자 은색 진법과 함께 종적을 감춘 그는 백소원과 남은 제자들을 멍하게 만들었다.
진선경 수사와 그들의 실력 차가 너무 크고 빨라 한립과 노인이 벌인 결투를 제대로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십여만 리 밖, 설원 상공.
입가에 피를 묻힌 야윈 노인은 전력으로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얼어붙은 그의 얼굴에서 공포가 느껴졌다.
미리 알아본 바에 따르면, 려 씨 성의 장로는 촉룡도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선경 초기 산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직접 붙어보니 이미 진륜법보를 지닌 데다 괴이한 신통을 부려 달아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콰릉!
상대가 쫓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던 노인 위에서 갑자기 천둥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든 노인 위로 물항아리 굵기의 은색 뇌전이 흑발의 푸른 장포를 입은 사내를 품고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사내는 한 손에 뇌전으로 둘러싸인 검은 장창을 들고 있어 천신(天神)이 강림하는 것처럼 보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달은 야윈 노인은 두 손으로 비늘 방패를 들어 올려 머리를 막았다.
콰앙!
중수 장창은 수직으로 방패를 뚫고 노인의 정수를 지나 가슴까지 꿰뚫었다. 다급히 노인의 머릿속을 빠져나온 금색 갑옷을 입은 소인이 한립이 다른 수를 쓰기 전에 피부가 붉게 물들어 핏빛 안개로 흩어져 사라졌다.
한립은 방대한 의식을 퍼트려 수만 리를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다. 천천히 노인의 몸에 박힌 중수 장창을 뽑은 그는 상대의 저물탁만 챙겨서 돌아갔다.
모든 것이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저물탁 안에는 쓸만한 법보도 몇 가지 있고 선원석이 십여 개나 들어있어서 여기까지 쫓아온 수고가 아깝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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