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81화 (1,338/2,000)

1581화. 세 가지 길

*

“손 사형, 제가 같이 가서 불편하신 것은 아니시지요?”

두 무리가 사라지자 백소원이 손극 무리 앞으로 가서 빙긋 웃음 지었다.

“무척 환영할 따름입니다.”

손극이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자 다른 이들도 앞다투어 자신을 소개하고 인사말을 건넸다.

그때 백여 리 떨어진 눈 덮인 산 위에는 한립과 소동초가 기운을 숨기고 잠복해 있었다. 얇은 물의 장막에 백소원과 다른 제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백 가 아이가 말 몇 마디로 강력한 경쟁 상대 둘을 가장 위험한 길로 보내버리는군요. 제법 머리가 비상합니다.”

“타인이 속인 것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우둔하게 속는 자신을 단속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소동초가 재미있다는 듯 칭찬하자 한립이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

“허허, 그 말씀이 맞습니다. 미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요? 둘 중 누가 목숨을 건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는지 구경하는 재미가 있군요.”

“백소원의 선조 중 한분이 촉룡도의 내문장로였다고 들었습니다. 소 형께서도 아시는 분인지요?”

“알고말고요. 아마 수천 년 전에 실종된 백봉의 장로를 말하는 것 같은데, 기량 장로와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와는 오가며 몇 번 만난 사이에 불과하고요.”

“무슨 일 때문에 종문을 나섰다가 실종된 것인지도 아십니까?”

“아, 그건 말이지요……. 사실 종문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었습니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갔다는 말도 있고, 원수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목숨을 잃었다는 말도 있고요. 제 생각에는 진선경 후기 최고봉에 올랐던 백 장로가 당시 금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모처에서 생사관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고 봅니다. 암암리에 도는 소문으로는 종문에 보관된 백 장로의 원혼정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하니까요.”

소동초의 대답에 한립은 이 일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내막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소동초는 물의 장막에서 백소원 등이 하얀 눈에 뒤덮인 설지침송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손을 뻗었다

“우리도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려 형.”

그들은 더 이상 날지 않고 숲속으로 내려가 의식으로 세 방향으로 흩어진 내문제자들의 동태를 파악했다.

한동안 멀리서 그들을 따라가던 한립은 무의식중에 미간을 좁혔다가 원래 표정으로 돌아갔다.

* * *

손극, 백소원 등 총 6명은 나지막한 비탈을 따라 현빙산맥 안쪽으로 저공비행을 했다.

산속에는 빙설 계통의 기운을 지닌 요수들이 눈 속에 기운을 숨기고 있어서 고공비행을 하면 오히려 표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출발하면서 손극이 길잡이 역할을 맡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에 손극은 사발처럼 생긴 법보를 머리 위에 띄우고 하얀빛으로 전신을 보호하면서 네 개의 푸른 비도가 주위를 맴돌게 하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손극은 거울처럼 매끈한 작은 황토색 방패도 한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 뒤로 다른 네 명의 남수사들이 각자의 방법과 보물로 몸을 보호하고 사방을 경계했다.

일행 중 가장 끝에서 이동하는 백소원은 옥고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보호막으로 온몸을 보호하면서 옷 위에 은백색 빛을 반짝이는 하얀 면사 옷을 걸치고 있었다.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인 탓에 이동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수행이 그리 낮지 않은 요수들이 주제도 모르고 몇 번 덤벼든 것을 제외하면 일행에게 큰 위험은 닥쳐오지 않았다.

산맥 깊숙이 진입할수록 주변 온도는 점점 더 떨어졌다.

땅속에서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고 눈보라가 사방에서 몰아쳐 연허기 수행을 지닌 손극 일행도 점점 몸을 떨기 시작했다.

백소원을 제외한 다른 수사들은 벌써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운공을 해가며 추위를 몰아낸 수사들은 온도가 더 내려가자 전문적으로 추위를 막아줄 기물을 평소 지니고 다니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운공해서 냉기를 막아내는 것은 법력 소모가 극심했기에 나중에 교전이 벌어지면 그것 때문에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제게 약간의 술이 있는데 불 속성 재료로 빚은 것이라 약간이지만 추위를 몰아내 줄 겁니다. 다들 괜찮으시면 맛이나 보시지요.”

손극이 둔광을 멈추고 새빨간 술병을 꺼내 들었다.

“술이요?”

이런 위급한 상황에 갑자기 술 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머뭇거리며 시선을 교환했다.

쪼르륵.

손극은 잔을 하나 꺼내서 술병의 술을 따랐다. 찰랑이는 선홍색 액체는 화염처럼 불빛을 발산하며 주변 온도를 높여주었다.

동시에 향긋한 술 내음이 퍼져 백소원도 맛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술입니다!”

검미(劍眉) 청년이 술에 대해 좀 아는지 바로 칭찬을 했다.

“임 형께서도 술을 즐기십니까? 변변치 않지만 한잔하시지요. 이런 추운 날씨에는 그만인 술입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손극이 술잔을 건네자 검미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서 쭉 들이켰다. 목을 타고 넘어간 술은 뱃속에서 후끈한 열기를 일으켰다.

열기는 영성을 지닌 것처럼 빠르게 사지와 백골로 퍼져 온몸에 훈기를 불어넣었다.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던 검미 청년은 한참 후에야 기운을 다스릴 수 있었다.

“정말 좋은 술입니다! 천상의 맛이 따로 없군요. 손 형, 이 술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화연주(火涎酒)라 합니다.”

손뼉을 쳐가며 찬사를 하는 청년을 보고 손극이 미소 지었다.

“이름도 좋군요! 제가 예전에 10대 선주로 불리는 청리주도 맛을 보았었는데 그것도 이 화연주에는 못 미치는 듯합니다.”

검미 청년은 몹시 신이 났다.

이 술은 더없이 맛이 좋을 뿐 아니라 손극의 말대로 한기를 밀어내는 효과도 뛰어났다. 그의 몸은 따사로운 햇살처럼 은은하게 붉은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른 수사들도 의심 없이 한 잔씩 얻어먹고 좋아했다. 그들은 술을 즐기지 않아 맛은 잘 모르겠지만 몸에서 한기를 몰아내는 효과가 무척 뛰어났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화연주의 열기는 체내를 돌면서 한기를 몰아내고 운공을 하느라 소모한 법력까지 약간 채워주고 있었다.

“화연주는 뒷심이 있는 술이라 열기가 반나절은 지속되지만 서서히 흩어질 겁니다. 백 사매도 한잔하지.”

“고맙습니다, 손 사형.”

손극이 웃으며 권하자 백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화연주를 얼마나 지니고 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검미 청년의 질문에 다른 수사들도 관심을 보였다.

술 한 잔으로 반나절을 버틸 수 있다면 여섯 명이 술병 하나로 현빙산맥에서 한 달을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그건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직 여러 병이 남았으니 이번 시험이 끝날 때까지 충분히 마실 수 있을 겁니다.”

손극의 대답에 수사들도 근심을 덜 수 있었다.

“손 형의 도움은 마음 깊이 새겨 놓겠습니다. 이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맞습니다. 저도 이번에 입은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키 큰 청년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다른 수사들도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그러실 것 없습니다. 다들 동문인데 서로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손극은 평온하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기뻐하고 있었다.

촉룡도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술 몇 병으로 인심을 얻고 종문 내에서 인맥을 넓힐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이때 수천 리 밖의 한립도 얼굴에 희색이 스쳤다가 곧 침음했다. 그의 옆에는 언제부터인가 소동초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전진하던 손극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으로 진정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산맥에 진입하자마자 원영급에서 화신급에 이르는 설호(雪狐) 4, 50마리가 양쪽에서 튀어나와 으르렁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선주를 함께 나눠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해 빠르게 전투 진형을 갖추었다.

수행이 가장 높은 백소원, 검미 청년, 손극 세 사람이 맨 앞에 서서 초승달 비검, 보라색 금속 방망이 그리고 네 개의 비도를 동시에 날렸다.

쉬이익!

초승달 비검은 번득 빛나며 기다란 빛줄기로 늘어나 정면을 갈랐다.

휘휘휘휙.

밝은 빛을 머금은 보라색 몽둥이는 수백 개의 몽둥이 허상을 만들어내 쇄도했다.

콰앙!

푸른 비도들은 수십 배로 커져서 거대한 칼날로 요수들을 내리쳤다. 설호들은 순식간에 밀려든 공격에 화신급 열댓 마리가 즉사하자 기세가 주춤했다.

그 잠깐의 머뭇거림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 지었다. 그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나머지 셋이 바삐 손을 움직여 빛을 머금은 법보들로 공격을 쏟아부었다.

쿠릉.

다양한 빛이 난무하고 폭음이 이어졌다. 법보의 빛이 가셨을 때는 수십 마리 설호들이 잘게 썰려 핏물 위에 흩어져 있었다.

진한 피비린내가 설산 위에 진동했다.

멀리 허공에서 한립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문제자들의 위기 대처 능력이 나쁘지 않았고, 특히 백소원 손극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해서인지 토착 수사들과는 확실히 다른 면모가 보였다.

북한선역의 거대 종문인 촉룡도는 외부 수사들이 부러워할 만한 수련환경과 자원을 제공해 직계 내문제자들을 빠르게 성장시켰지만, 그 폐단도 명확했다.

이 시험만 보아도 종문의 핵심이 될 제자들을 키우기 위해 고위층들이 얼마나 신경을 기울이는지 알 수 있었다.

백소원 일행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다른 경로로 간 두 무리도 요수들의 습격을 받고 있었다.

설타령 경로에서는 척환우 등이 독수리의 머리에 기이하게 큰 입을 지닌 빙설 계통 흉조(凶鳥) 떼와 마주쳤다.

입에서 하얀 얼음 화살을 뿜어대는 짐승들은 족히 백 마리가 넘었고 전부 화신급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척환우 무리는 수가 많고 강력한 보물을 지니고 있었으나 대부분이 실전 경험이 부족했다. 그들은 성격이 포악하고 살의로 가득 찬 흉조들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된 대처도 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댔다.

그들은 전부 둥글게 서서 서로의 방어 보물을 연결해 반원형의 보호막을 형성하고 쏟아지는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겨우 화신기 요수들에 불과하니 당황할 것 없습니다. 모두 내 지시에 따라 절반은 계속해서 보호막을 지탱하고 나머지 반은 공격합시다.”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척환우가 일갈했다. 그러자 일행은 그 소리에 마음을 안정시키고 지시에 따라 행동했다.

보물들이 각기 다른 빛을 분출해서 허공의 하얀 흉조들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공격에 어쩔 줄 모르던 때와 달리 정신을 차리자 수행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드러났다. 흉조들이 하나둘 뚝뚝 떨어져 바닥에 처박히고, 일각 만에 전투는 종결되었다.

대부분 흉조들은 격살 당했지만 일부는 달아나 버렸다.

척환우 일행은 안색이 약간 창백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들은 흉조 사체들과 자욱하게 퍼진 피 냄새 속에서 점점 의지를 굳혔다.

“겨우 화신기 요수들 때문에 두려워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모두 보았다시피 차분하게 응전을 하면 이런 요수들은 우리의 상대도 되지 못합니다.”

척환우는 소리를 높여 수사들의 사기를 북돋고, 다른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연이어 말을 하려는데 곁에 있던 수사가 나서서 덧붙였다.

“척 형, 피 냄새가 퍼지고 있습니다. 한시바삐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움찔한 척환우가 그의 말에 바로 일행들을 출발시켰다.

팟.

허공에서 파동이 일고 흐릿한 인영이 나타났다.

바로 소동초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휙! 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백호산곡 경로의 상황도 비슷했다.

당천 무리도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인 경험이 많지 않아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흉악한 요수들을 상대로 한동안 쩔쩔맸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은 진짜이고 수중에 귀한 보물도 많아서 다행히 부상 없이 요수들을 물리치며 나아갈 수 있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