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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80화 (1,337/2,000)
  • 1580화. 관례

    *

    “구체적인 기준은 상황에 맞게 알아서 판단하면 될 것이야. 저들이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면 나서지 말게! 어차피 진전제자가 되기 위한 시험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니까. 결과가 어떻게 되든 자네들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것이네. 암위로서 따르는 것이니 실질적으로 시험관과 마찬가지라고. 공평무사하게 처신하게. 알아듣겠나?”

    “예!”

    자포 사내의 말에 소동초와 한립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할 말을 마친 자포 사내는 옆의 백포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이 아무 말 없자 사내는 곧 몸을 돌려 둔광을 일으켜 날아오르고, 백포 부인은 한립과 소동초 특히 한립을 지긋이 바라보다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순간, 한립은 눈빛이 달라졌다가 곧바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한립과 소동초는 그들이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소 형, 조금 전 구양 도주께서 서열 9위의 구양규산 도주가 맞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종문의 금선 도주 13분이 매 10만 년마다 돌아가며 문파를 관리하시는데 지금 종문을 관리하는 분이 구양 도주님이지요. 그저 운 도주님께서는 함께 오셨다가 말 한마디 없이 돌아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보아하니 아끼는 제자 아이가 마음에 걸려서 왔다 가셨나 봅니다.”

    “저들이 출발하려 합니다. 저희도 움직일 준비를 하시지요.”

    그때 한립이 의식으로 주전 상황을 파악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벽 너머 주전에서 방우가 내문제자들을 이끌고 바깥으로 나가고 있었다.

    “허허, 조급해하실 것 없습니다.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따라가도 되니까요.”

    소동초는 걱정하지 말라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편전 안에 내문장로 복색을 한 회백발 노인이 들어섰다.

    노인은 그들을 살피다 얼른 소동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허허, 소 장로 이거 오랜만에 뵙는군요.”

    “왕 장로 아닙니까? 이렇게 뵙게 되어 기쁘군요.”

    소동초는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노인을 맞이했다. 한립은 짐작하는 바가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회백발 노인은 소동초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고, 직접 그를 편전 입구까지 배웅했다.

    떠나기 직전에 노인이 티 나지 않게 저물대 하나를 소동초의 손에 들려주고 휙 하니 사라졌다.

    노인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이번에는 중년 거한이 편전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도 내문장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소 장로, 이번에도 암위 임무를 맡으셨군요!”

    곁눈질로 한립의 존재를 살핀 거한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소동초에게 인사를 했다.

    “공교롭게도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 범 장로.”

    소동초가 웃으면서 다가가자 중년 거한은 쓸데없는 인사치레를 생략하고 저물대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그 뒤로도 편전은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일고여덟 명이 줄이라도 선 것인지 차례대로 들어와서 뭔가를 전해주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 제자 혹은 후손들이 시험을 잘 치를 수 있게 봐달라고 왔다 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낯선 얼굴에 수행도 진선경 초기밖에 안 되는 한립보다 늘 암위 임무를 맡는 진선 중기의 소동초에게 성의를 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동초는 한 번도 거절하는 법 없이 선물을 받는 족족 다 챙겨 넣었다.

    조용히 한쪽에 앉은 한립은 시종일관 아는 척을 하지 않고 속으로 운 도주가 가기 전 은밀히 남긴 말을 되뇌는 중이었다.

    그녀는 반드시 백소원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는데, 소동초의 안색으로 보아 그는 이런 당부를 듣지 못한 듯했다.

    충분히 곱씹어볼 만한 이야기였다.

    “려 형, 이제 시간이 된 것 같으니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소동초는 더는 찾는 사람이 없자 그제야 한립을 불렀다.

    “그러시지요.”

    * * *

    종명산맥 북부의 어느 임전각.

    임전각 바깥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다른 촉룡도 경내보다 추운 이곳은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대전을 빠져나온 한립과 소동초는 곧바로 북쪽으로 날아갔다. 반 시진 후, 속도를 줄인 그들은 수만 리 밖 고공에 거대한 선박이 운해를 뚫고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허허, 이제 여유롭게 따라가면 되겠습니다. 말이 나와 말인데 백소원과 함께 입문하셨다면 아직 촉룡도에 오신지 백 년도 안 되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바깥과 비교하면 본종이 어떤지요?”

    “종내의 공법과 자원이야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그것들을 얻고자 한다면 치러야 할 대가도 적지 않더군요.”

    한립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종문 내에 기반이 없는 우리 같은 산수 장로들은 특별한 기연을 얻지 못하면 더 높은 경지로 나가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렵지요! 입문할 때 받은 공봉을 써버리고 나면 이후로는 능력껏 알아서 헤쳐나가야 하니까요. 진선경에서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면 정말 금산은해(金山銀海)를 퍼다 날라도 부족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입문 십여만 년 만에야 겨우 중기에 이른 것 아니겠습니까.”

    “입문할 때의 공봉이요? ……그게 무엇입니까?”

    “당연히 촉룡도에 입문할 때 받는 극품영석 5백 개와 선원석 3개 말입니다. 큼, 당초 입문할 때 누가 안내를 해주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기량 장로입니다.”

    소동초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뜻은 명확했다. 한립이 입문 공봉으로 받아야 할 극품영석과 선원석을 기량이 빼돌렸다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한립은 겉으로는 약간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기량의 행동은 촉룡도 내에서 흔히 벌어지는 관례일 것이다.

    오히려 소동초의 말을 듣고 나니 그간 기량이 이유 없이 베푼 친절에 품고 있던 경계심이 많이 사라졌다. 조금 전 소동초가 동급 수사들에게 거둔 성의도 마찬가지였다.

    인계, 영계 심지어 선계도 통용되는 규칙들은 비슷비슷해서 어쩐지 선인들의 세계가 범인들의 세계보다 더 세속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웅산 부도주의 비검 제련이 실패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소동초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그 일이라면……. 웅 부도주께서 바깥에 말을 전하지 말라고 했으니 따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허허, 여기에 우리 둘뿐인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게다가 우리가 소문내지 않는다고 종문에 아직 그 일을 모르는 장로가 있기나 할 것 같습니까? 벌써 파다하게 소문이 나서 다들 얼마나 배를 잡고 웃었는지 모릅니다.”

    그 말에 한립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당시 거대한 검진을 펼치느라 웅 부도주가 선원전의 마사장로에게 상당한 양의 선원석을 빌려 가서, 그걸 아직도 갚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열 받은 마사장로가 쳐들어가 갚으라고 재촉하는 통에 둘이 싸우기 직전까지 갔었다는 소문이 종문 내에 쫙 퍼졌어요! 얼마나 부도주 체면이 떨어지는 일입니까…….”

    소동초는 이런 일화들을 꽤 아는지 한립과 날아가면서 미주알고주알 별 이야기를 다 들려주었다.

    한립은 그런 추문이나 뒷소문에 관심이 없는 편이었으나 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슬쩍 그가 관심이 있는 화제를 꺼내 가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촉룡도에서 장기간 머물 계획이라면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종문 내부의 알력 다툼에 휘말리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절친한 벗처럼 쉼 없이 떠들어댔다.

    그리고 줄곧 북쪽으로 이동한 탓에 주변 기운이 떨어지고 눈보라가 거세져서 한동안 폐관 수련을 해온 한립은 오랜만에 설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 * *

    보름 뒤.

    백소원 등 촉망받는 내문제자들을 태운 선박이 드디어 종명산맥 북부 어느 거대한 산맥 앞에서 멈추었다.

    바로 시험 장소인 현빙산맥이었다.

    종명산맥 북부에서는 세 번째로 큰 지맥인 현빙산맥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었고, 주로 설지침송(雪地針松)이라는 나무가 잘 자랐다.

    줄기가 길게 자라고 가지들이 수북한 설지침송은 이파리가 바늘처럼 가늘어서 한랭한 북부의 기후 속에서도 산맥을 지키고 서 있었다. 수북하게 눈이 쌓인 나무들은 작은 탑들이 가득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산맥 남부의 광활한 지대에서 제자들이 선박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비행 보물을 회수한 방우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을 데리고 이곳에 도착했으니 내 임무는 일단락 지었다. 이곳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경로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알아서 계획을 잘 세워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바란다. 나는 한 달 동안 이곳에서 너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방우는 낮은 산봉우리 위로 훌쩍 날아올라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얼마 후, 이십여 명의 제자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었다.

    척환우와 당천 주위에 각각 몇 명이 모여들어 함께 행동하기로 했고 조양전에서는 백소원 주위에 있던 여수사 몇 명도 그 두 무리에 들어가 있었다.

    손극과 같은 산수 출신 몇 명도 무리를 이루는 중이었다. 척환우가 홀로 서서 지도를 살피는 백소원을 보며 그녀에게 걸어갔다.

    “백 사매, 나와 다른 사형제들은 설타령(雪駝嶺) 쪽 노선으로 가기로 했어. 위험하긴 해도 설종현웅이 자주 출몰하는 산맥 중앙에 가장 가까우니까 말이야. 이동하면서 의외의 수확을 얻을 수도 있을 텐데, 우리랑 같이 가보지 않겠어?”

    친근하게 말을 거는 척환우의 잘생긴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설타령 노선은 저도 고려를 해보았는데 경로가 짧은 대신에 강력한 요수를 마주칠 가능성이 다른 곳보다 몇 배로 높더라고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백소원은 아름다운 얼굴을 찡그리며 두렵다는 듯 말했다.

    “백 사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절대 사매가 위험에 처하게 두지 않을 테니까.”

    척환우는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치면서 장담했다.

    “척 수사의 말씀은 그럴듯합니다만, 그 실력으로 백 사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요? 그걸 어찌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백소원이 대답하기 전에 당전이 끼어들어서 같잖다는 얼굴로 말했다.

    “당 사형, 그렇게까지 말씀하진 마세요. 척 사형은 그냥 좋은 뜻으로 하신 말씀일 거예요.”

    그걸 본 백소원이 미소를 머금고 척환우를 대신해 해명했다. 그 말에 가슴이 뜨거워진 척환우가 당천에게 사납게 쏘아붙였다.

    “내가 백 사매와 동행을 하건 말건 그게 수사와 무슨 상관이라고 나서는 겁니까?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시지요!”

    “백 사매, 나와 진 사제 그리고 다른 사형제들은 백호산곡(白狐山谷) 노선으로 가기로 했네. 설타령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수확은 적겠지만 위험은 그만큼 줄어들지. 어차피 우리의 최종 목표는 설웅(雪熊)이니까 다른 것들은 큰 의미도 없고 말이야. 우리와 같이 가지 그래?”

    당전은 척환우의 도발을 깡그리 무시하고 백소원을 향해 물었다. 백소원은 두 손을 꼭 쥐고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였다.

    척환우와 당전이 더 설득해보려 할 때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음, 저는 손극 사형 무리가 가는 송과령(松果嶺)으로 가보려고요.”

    그 소리에 척환우와 당전이 당황한 것은 물론 이미 송과령 쪽으로 걸어가고 있던 손극 무리까지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손극과 같이 있던 산수 몇 명은 기분이 좋아졌다.

    안 그래도 몇 명 없는 여수사들이 다들 척환우와 당전 무리에 가담해 서운했는데 가장 미색이 고운 백소원이 그들과 동행한다니 이보다 반가운 일이 없었다.

    ‘하아…….’

    유일하게 손극 입가에만 쓴웃음이 걸렸다 사라졌다.

    그는 평화롭게 시험을 치르고 싶었는데 백소원이 콕 집어 자신을 지목한 탓에 원치 않던 갈등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표정을 정리하고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척환우과 당천이 그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은 당연했고, 그들은 심지어 미리 결정한 경로를 바꾸어 백소원과 동행을 할까도 고민하고 있었다.

    “저는 두 사형처럼 수행이 고강하지 않아 가장 안전한 경로를 선택했어요. 이번에는 동행할 수 없지만 오랫동안 우러러보던 두 분 중 누가 이번 시험에서 일인자가 되실지 마음 깊이 응원하고 있을게요.”

    이때 백소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한 마디에 기분이 상쾌해진 척환우와 당천은 경로를 바꾸려던 생각을 집어치우고 서로를 경쟁적으로 노려보았다.

    그들은 더는 손극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백소원에게 인사를 한 뒤 각자의 무리를 이끌고 위험한 두 경로로 갈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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