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9화. 다시 만난 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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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장로님들께서는 편히 쉬고 계시면 됩니다. 곧 임무의 내용을 설명해 줄 분이 오실 겁니다.”
각진 얼굴 청년은 얌전히 서서 둘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다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도 할 일이 많을 테니 가서 일을 보게.”
소동초가 손을 저으니 각진 얼굴 청년은 둘을 향해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아는 수사십니까?”
“예전에도 호위 임무를 몇 번 받은 적이 있어 그때 안면을 익혔습니다.”
“아, 그럼 소 형께 많이 배워야겠군요. 겉보기에는 간단한 임무 같지만 그렇게 녹록하지만도 않겠지요?”
한립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슬쩍 떠보았다.
“과연 명석하십니다! 같이 주전에 모인 내문제자들을 보시지요.”
소동초는 손가락을 구부려서 편전 벽에 남색빛을 날려 보냈다. 남색빛이 부드럽게 퍼진 벽이 점점 투명해져서 건너편 주전의 모습이 보였다.
기이하게도 주전 쪽 수사들은 이런 벽의 변화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구수투영술(驅水透映術)을 이렇게 정교하게 부리시다니 놀랍습니다!”
“별것 아닙니다, 허허!”
한립은 주전의 내문제자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소년 소녀인 제자들은 근골자질이 남달라서 벌써 연허기에 이르러 있었다.
그들의 실제 나이는 겉모습으로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대전 안의 수재들은 천 살이 채 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연허기에 이르는 경우는 북한선역에서도 드물었고, 아마 뛰어난 자질과 더불어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중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하얀 치마의 소녀가 수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백소원이었다. 용모는 그대로였는데 수행은 벌써 연허 중기에 이르러 있었다. 이제 막 경지를 넘어선 듯했지만 놀라운 수련 속도였다.
그러나 월화선체를 타고 나 선천적으로 일곱 개의 선규가 각성해 있고 금선경 사부의 지도와 지원을 받은 것을 고려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제 아셨을 겁니다. 저들은 수행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퍽 특수한 신분을 지녔지요! 종문 장로들 혹은 부도주의 직계 후손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의미심장한 소동초의 설명에 한립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주전에 모인 내문제자들은 표정에서부터 세상을 내려다보는 오만함이 드러났다.
웅장한 조양전에 모여서도 표정에 여유가 있었고, 강력한 호신용 보물을 지녔는지 몸에서 은은하게 보광이 반짝이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전부 그런 것은 아니라서 말없이 대전 가장자리로 물러나 있는 네다섯 명의 내문제자들은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궁색하게 보였다.
“13명 금선의 제자이거나 혹은 부도주 급의 추천이 있어야 진전제자가 되고 나머지는 반드시 연허기 수행에 이 시험을 통과해야 정식으로 진전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진전제자가 되면 본문에서 진정한 인재로 인정을 받아 공법, 단약, 영지 등 각 방면에서 완전히 대우가 달라지지요. 평범한 내문제자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종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로며 부도주들이 귀한 자손들을 이곳으로 보내 시험을 치르도록 하는 것이지요.”
소동초는 약간 냉소적인 어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말씀은…….”
“허허, 자질은 뛰어나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백 년간 밀실에 들어앉아 수련만 한 내문제자들이 많아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은 부족하지요. 종문 차원에서 그들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게 특별히 시련을 준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립의 얼굴을 본 소동초는 자신이 괜한 내색을 했다는 것을 알고 부드럽게 말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한립의 시선이 잠시 백소원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혹시 백소원을 아십니까?”
소동초가 기민하게 그것을 눈치채고 물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저와 같이 촉룡도에 입문한 수사니까요. 소 형께서도 아시나 봅니다.”
백소원의 자질은 가히 천부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입문하자마자 운 씨 성의 금선 도주가 데리고 가서 종문 내에서 그녀에 대해 아는 이는 극히 적었다.
“몇 년 전에 운 도주께서 발표한 임무를 수령하러 갔다가 우연히 본 일이 있습니다. 듣자니 월화선체를 지녀 백 년도 되지 않아 지금의 수행에 이르렀다더군요! 이번 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빠르게 명성이 높아져 촉룡도 전체를 들썩이게 할지도 모르지요.”
“운 도주께서 파격적으로 제자로 선발하셨으니 이미 진전제자의 자격을 갖추었는데 어째서 시험에 참석한 것일까요?”
“말은 그렇지만 대충 넘어갈 수 없는 것이 종문 규정입니다. 백소원은 운 도주님의 문하에 들 당시 수행이 낮았다가 줄곧 수련해서 이제야 연허기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 진정으로 진전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약간 통통한 청년 하나가 조양전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 내문제자 복장을 한 청년도 이번 시험을 보러 온 듯했다.
그를 본 한립의 시선에 이채가 어렸다.
‘손극.’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함께 배를 타고 고운대륙으로 함께 왔던 손극이었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 그도 겨우 수십여 년 만에 촉룡도에 입문해 진전제자가 되기 위해 시험을 치르러 온 것이다.
새로운 수사의 등장에 시선이 잠시 집중되었다. 손극은 노골적인 시선에 적응이 되지 않는지 걸음을 멈추고 다른 수사들을 둘러보며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비범한 신분을 지닌 내문제자들은 그를 아래위로 훑고 경시하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백소원만이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작게 미소 지어주었다.
손극은 다른 수사들의 반응을 개의치 않고 대전 구석으로 가서 주변을 살폈다. 수사들은 대놓고 세 무리로 나뉘어 뭉쳐 있었다.
가장 인원수가 많아 참가 인원의 절반에 달하는 여덟아홉 명은 비단 장포를 입고 허리에는 옥대(玉帶)를 맨 잘생긴 소년을 중심으로 서 있었다.
미간에 보라색 표식이 신비롭게 반짝거리는 잘생긴 청년은 수행이 연허기 후기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대여섯 명이 기도가 남다른 또 다른 사내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약간 까만 피부에 키가 큰 청년은 역시 영준한 생김새에 눈썹이 길게 뻗어 유순해 보였지만 눈빛만은 서늘해 보였다. 까무잡잡한 사내도 역시 연허기 후기 수사였다.
두 무리에 모인 이들은 가장 여유가 넘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가끔은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마지막 무리는 백소원을 중심으로 한 여수사들로 다들 괜찮은 외모를 지녔지만 절색의 미모 앞에서는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말없이 서 있는 백소원의 몸에 은은한 하얀빛이 연꽃, 설련(雪蓮)처럼 피어있었다. 그녀는 말이 없어도 주변의 여수사들은 대전의 다른 수사들을 훑으며 가끔 수군거렸다.
잘생긴 소년과 까무잡잡한 사내는 주변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와중에 은연중 백소원 쪽으로 뜨거운 시선을 보냈고, 나머지는 손극처럼 얌전히 구석에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잘생긴 소년이 백소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소원, 백 사매가 맞겠지? 나는 척환우라 하네. 오래전부터 사매의 위명은 들어왔는데, 운 도주님의 제자가 된 뒤로 만날 기회가 없어 무척 아쉬웠었지. 오늘에서야 직접 만나게 되는군.”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띤 척환우는 격식을 갖추어 말을 걸었다.
“척 사형이야말로 척 부도주님의 후손이자 제자로 탁월한 재능과 실력을 지닌 분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다들 일대 제자 중에 최고의 걸출한 인재라 말하더군요.”
백소원이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며 싱긋 웃음 지었다. 이에 척환우는 미미하게 움찔했다.
자신이 제법 명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대 제자 중 최고의 인재라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아름다운 소녀의 찬사에 마음이 들뜬 소년은 은근히 자신이 최고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하, 과찬일세! 그런 허명이야 입에 올려 무엇 하겠는가? 사매의 재능이면 금방 내 수행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흥, 최고의 인재? 척환우 수사, 수사가 언제부터 그렇게 불렸습니까? 나는 도통 모르겠는데요.”
냉소를 흘리면서 까무잡잡한 사내가 다가왔다. 이에 얼굴을 굳힌 척환우는 힐끗 그를 보더니 백소원을 향해 나긋나긋하게 소개했다.
“백 사매는 아마 전혀 모르겠지만 우리와 같은 내문제자의 일원인 당천이네.”
“너……!”
자신을 무시하는 척환우의 말에 까무잡잡한 사내가 발끈했다.
“제가 천단전(天丹殿) 당경명 장로님의 외아들이신 당 사형을 모를 리가요. 수련 중인 유유현공(幽游玄功)으로 내문제자 중에 따를 자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기회가 되어 직접 만나 뵙게 되었으니 많은 가르침 받았으면 좋겠네요.”
촉촉한 눈빛으로 당천을 바라보는 백소원의 얼굴에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매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당천은 마음속으로 밀려든 봄바람에 치밀어 오르던 화가 가라앉아서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하하, 백 사매가 가르침을 구한다면 내 어찌 거절할 수 있겠어. 사실 유유현경이 신묘하기는 해도 겨우 문턱에 발을 걸친 수준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하암, 난 겨우 유유현경에 신묘라는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구만.”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갑자기 열불이 난 척환우가 하품을 하듯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감히 유유현공을 무시하다니, 본때를 봐야 정신을 차리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대노한 당천이 몸에서 그윽한 검은 빛을 발산했다. 척환우도 두려워하지 않고 미간의 표식에서 보라색 빛을 번득였다.
무리를 대표하는 그들의 대치에 대전 안에 긴장감이 돌았다. 백소원은 잔잔히 미소를 띠고는 티 나지 않게 뒤로 물러나 그들에게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무엄하다! 대체 조양전에 시험을 보러 온 것이냐, 아니면 싸움을 하러 온 것이냐!”
대전 안에 위엄 어린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자 무형의 기운이 척환우와 당천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고, 몇 걸음 물러나 있던 백소원마저 얼굴에 붉은 기운이 떠오르게 했다.
순식간에 위압감이 사라지고 다들 언제 서로 대립했냐는 듯 고분고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얀빛과 함께 방우, 조양전 담당인 각진 얼굴 청년이 나타나 대승기 수사의 기운을 드러냈다.
그는 척환우와 당천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백소원에게까지 눈길을 준 다음 시선을 거두었다.
척환우와 당천은 상대를 노려보다 몸을 돌려 멀어졌고 백소원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모두 모였으니 시험을 시작하겠다! 시험내용은 딱 한 번만 설명할 것이니 귀담아서 듣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험 통과뿐만 아니라 수사들의 목숨이 달렸으니 말이야.”
방우는 더는 추궁하지 않고 바로 안내를 시작했다. 구석에 있던 손극 등도 모여들어 귀를 기울였다.
“시험 장소는 현빙산맥(玄氷山脈)이다. 내가 너희를 데리고 산맥의 외곽에 이르면……. 반드시 합체기 설종현웅(雪種玄熊)을 찾아 격살하면 되는데 힘을 합쳐서 수색해도 좋고 단독으로…….”
* * *
같은 시각, 편전 안.
한립은 주전에서 벌어진 일을 지켜보며 내심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동안 못 본 사이 백소원은 아주 교묘한 신통을 터득한 듯했다.
순간순간의 눈짓, 미소에 고명한 미혼술의 정수가 담겨 있어 동급의 수사들이 맥을 못 추게 만들어버렸다.
방대한 의식의 힘을 지닌 그도 운 도주가 나타났을 때 자기도 모르게 매혹될 뻔했으니 경험이 부족한 응석받이 도련님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현빙산맥이면 그리 멀지는 않겠습니다.”
옆에서 소동초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도 고운대륙 지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방우가 말하는 현빙산맥이 종명대륙 북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다 현빙산맥이 엄청 방대한 면적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라서 진선경 수행을 지닌 둘이서 내문제자 몇을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때 한립은 홱 편전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의 동시에 두 신영이 입구에 나타났다.
각지고 평범한 얼굴의 자포(紫袍) 중년인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빛을 지녀 형형한 기세가 살아 있어서 기품이 있으면서도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그 옆의 아름다운 백포 부인은 운 도주, 백소원의 스승이었다.
“구양 도주님! 운 도주님!”
‘도주들?’
소동초가 그들을 알아보고 먼저 일어나 공수를 했고 한립도 따라 일어나 예를 취했다.
“자네들이 이번 시험의 암위(暗衛)들인가?”
자포 사내가 느릿하게 물었다.
“그러합니다.”
“시험내용은 들어 알고 있겠지? 자네들의 임무는 어떠한 의외의 사고도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일세. 일반적인 위험은 제자들이 알아서 대처하게 두고 실력이 부족해서 시험을 치르다 죽어도 관여할 필요 없네. 부족한 제자들은 어차피 바깥세상에 나가면 죽은 목숨이니 종문에서 숨을 거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자포 사내가 스산한 어투로 말했다.
“구양 도주님께 아룁니다. 방금 말씀하신 ‘의외의 사고’를 조금만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그대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소동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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