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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78화 (1,335/2,000)
  • 1578화. 표식

    *

    백주산장을 나온 한립은 바로 자신의 동부 밀실로 돌아갔다. 능숙하게 금제들을 펼친 그는 자리에 앉았다.

    어렵지는 않았지만 연달아 두 개의 임무를 해결하느라 분주하게 다녔으니 휴식이 필요했고, 세 번째 임무 전 3일 동안 호언 장로에게 얻어 마신 선주의 힘을 연화시키며 몸 상태를 최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눈을 감은지 얼마 안 된 한립이 표정이 확연히 달라지며 눈을 떴다.

    우웅! 우웅!

    팔에 차고 있던 저물탁이 제멋대로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검은 장도가 날아올라 검은 그림자로 변해 번개처럼 쏘아져 나가려 했다.

    갑작스러웠지만 한립은 신속히 수결을 맺어 푸른 기운으로 검은 장도의 앞길을 막았다.

    후웅!

    검은빛을 방출한 검은 장도는 야수가 포효하듯 시끄럽게 울부짖으면서 푸른 기운을 잘라내고 계속해서 날아갔다.

    금빛을 일으킨 한립의 등 뒤로 진언보륜이 떠올라 10장 안을 금색 파문으로 뒤덮어 검은 장도를 가두었다.

    속도가 세 배 이상 느려진 장도는 무형의 힘에 이끌려 한립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우우웅!

    검은 장도는 끈질기게 반항했지만 한립의 손에 단단히 붙들려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한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방반이 죽어 주인을 잃은 검은 장도를 진작 연화시켜두었는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머리를 굴리던 그는 방대한 의식을 검은 장도에 불어 넣었다.

    검은 장도는 완전히 그의 통제를 벗어나 달아나려고 힘쓰는 중이었고,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의식이 침투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한립은 코웃음을 치며 미간에 수정빛을 번득였다.

    휭!

    충만한 의식의 힘이 용솟음쳐 팔뚝 크기의 반투명한 검 허상으로 변해 검은 장도 속으로 스며들었다.

    정체 모를 힘을 가볍게 가른 검 허상은 염검결(念劍訣) 신통이었다.

    드디어 의식을 검은 장도 속으로 침투시킨 한립은 겹겹이 둘러싸인 금제를 뚫고 신속히 가장 깊숙한 곳에 이르러 새까만 공간 안으로 빠져들었다.

    굵기가 제각각인 검은 줄이 거미줄처럼 엉켜 복잡한 진법을 이루고 중앙의 검은 제단을 둘러싸고 있었다.

    제단 위로 꿈틀거리는 검은 빛이 떠서 주변의 진법과 호응해 반짝였다. 그걸 본 한립은 깜짝 놀랐다.

    검은 장도를 손에 넣고 세심하게 제련을 하며 의식으로 이곳에 도달해 보았었다. 당시에는 진법이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고 규모도 3분의 1에 불과했었다.

    그의 시선이 제단 위의 검은 빛덩이로 향했다.

    검은 빛덩이도 그것을 감응했는지 흐릿하게 얼굴이 떠올라 그를 마주 보았다. 이목구비가 모호했지만 기다란 눈꼬리에는 분노와 오만함이 가득했다.

    뚜렷하지 않았지만 절대 방반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검은 장도의 원주인은 방반이 아니었고 그는 그저 보물을 빌려온 것이었다. 세심하게 다시 제련했어도 원주인이 무언가 수작을 부려놓았다면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한립의 표정이 굳었다.

    검은 장도의 주인은 돌발적으로 보물 내에 심어둔 표식을 격발하려 했다. 위치를 파악해 검은 장도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상대가 이곳으로 찾아들면 이만저만이 골치 아파지는 것이 아니었다.

    휘익!

    한립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다음 순간 제단 위에 반투명한 검 그림자가 떠올라 검은 빛덩이를 갈랐다.

    흐릿한 얼굴은 노호성을 터트리며 격원법련과 비슷하게 생긴 새까만 사슬로 변해 검 그림자를 향해 쇄도했다.

    채챙!

    검 그림자에 의해 둘로 잘려나간 새까만 사슬이 펑! 하고 터져 흩어졌다. 검은 공간에서 반짝거리던 진법도 동시에 안정을 회복했고 검은 장도의 떨림도 멈춰졌다.

    한립은 크게 기뻐하는 기색 없이 의식으로 제단을 살폈다.

    제단 안에는 문자도 그림도 아닌 각인된 무언가가 미세하게 영기의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본명표식!”

    서늘하게 코웃음 친 그가 의식을 이용해 반투명한 검 그림자로 표식을 갈랐다.

    펑!

    그러자 검 그림자가 튕겨 나왔고 본명표식은 가볍게 몸을 떨다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이에 한립은 계속 공격하지 않고 의식을 거두었다.

    ‘이제 어쩐다.’

    손에 검은 장도를 쥔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 * *

    고운대륙에서 헤아릴 수 없이 멀리 떨어진 곳.

    한립이 검은 장도에 의식을 불어 넣어 표식을 지우고자 할 때 커다란 검은 두루미가 날개를 펼치고 전방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전신에 새까만 쇠 깃털이 자라난 두루미는 마치 금관을 쓴 것처럼 보였다.

    거대 두루미의 깃털은 보일 듯 말듯 검은 불빛에 휩싸여 있었고, 특히 두 날개의 검은 불빛은 도드라져서 날개 주위로 더욱 커다란 검은 불의 날개가 자라나 있었다.

    비행속도가 엄청난 거대 두루미는 두 날개를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수백 리 씩 이동했다.

    누런 피부에 이마에는 청동 띠를 찬 황포(黃袍) 거한이 검은 두루미의 등에 타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거한 주위의 노란 진법 깃발 백여 개가 떠서 누르스름하게 진법을 형성하고 빛을 반짝였다. 그는 수시로 주술문자를 뿜어내면서 어떤 비술을 펼치는 중인 것 같았다.

    펑!

    노란 진법이 맹렬히 흔들리다 찢겨나가자 깃발들도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누런 얼굴 거한은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눈을 떴다.

    “이런 망할 놈, 죽여 버리겠어!”

    그가 대충 한 손을 젓자 흩어진 깃발들이 그의 정수리로 몰려들어 종적을 감추었다.

    “주인님, 상대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하신 겁니까?”

    검은 두루미가 입을 열어 날카롭고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녀석의 위치는 몰라도 어느 방향에 있는지는 알아냈다. 방반 그 병신 같은 놈은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내 흑제도선인(黑帝屠仙刃)을 잃어버리고 말이야!”

    “귀하게 대접만 받고 자란 응석받이 방반을 어찌 주인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내 본명선기인 흑제도선인을 절대 포기할 순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반 그놈의 말만 믿고 보물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면 한립의 명줄이 참 질깁니다.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남았고, 돌아와서는 방반마저 죽이다니요. 하지만 주인님께서 나섰으니 그 자식도 끝장이지요.”

    검은 두루미가 비위를 맞추면서 웃음 지었다.

    “도대체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기에 방반이 그렇게 집착했던 것인지 궁금해 죽겠구나! 그래도 내 몫을 챙기려면 노귀(老鬼)가 알아내게 둘 순 없지.”

    누런 얼굴 거한은 냉랭히 말하고 방대한 기운을 발산해 장포를 펄럭였다. 검은 두루미는 거한의 무시무시한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조아린 채 속도만 높였다.

    * * *

    한립은 검은 장도를 손에 들고 열 손가락으로 재빨리 수결을 맺었다.

    파앗!

    화려한 푸른빛이 그의 손바닥을 통해 흘러나와 머리통 크기의 푸른 주술문자들로 변해 장도에 다닥다닥 들러붙었다.

    검은 장도 표면에 푸른 주술문자 도안이 늘어갈수록 본연의 기운이 감춰져 갔다. 이전에 배워둔 봉보술(封寶術)이라는 전문적으로 보물을 봉인하는 술법을 펼친 것이다.

    한립은 보물로 보이는 기이한 기운을 발산하는 검은색 함을 꺼내 장도를 넣어 두고 봉인 부적들로 함을 봉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여러 겹으로 봉인을 해뒀지만 완전히 원주인과의 감응을 단절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상대가 방반과 어떤 관계인지는 몰라도 그의 적인 것은 분명했다.

    그의 예상으로는 진화를 이용해 상대가 특수한 방법으로 남겨 놓은 표식을 천천히 녹여내려면 백 년 이상이 필요할 것이다.

    “휴우, 이런 화근을 들고 시간 낭비를 하느니 그냥 팔아 버리는 것이 낫겠어.”

    침음하던 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검은 장도의 위력은 꽤 강했지만, 그의 안전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푸른 소머리 가면을 꺼내 썼다.

    팟!

    푸른 빛이 떠오르자 한립은 거래 구역에다 거래를 등록했다. 무상맹의 물물거래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일단 물건을 공개하고 구입할 의향이 있는 사람과 천천히 가격을 논의하는 것과 처음부터 가격을 정해 바로 거래를 하는 것이었다.

    한립은 두 번째 방법을 택해 선원석 50개를 가격으로 정해두었다. 검은 장도의 품질과 위력이면 비싼 값도 아니었고 심지어 저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복잡한 상황을 해결하고자 빨리 물건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무상맹은 본래 정체성이 불분명한 회색 조직으로 이런 장물이 거래되는 경우도 많았다.

    솔직히 수도계에서 피 묻은 보물 한두 개 없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맹 내에서 물건을 산 사람은 그 출처를 묻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한립은 검은 함을 화면 중앙의 전송진에 두었다.

    빛이 반짝이고 검은 함이 눈앞에서 사라지니 한결 마음도 편해졌다. 가면을 벗은 그는 문득 다른 일이 생각나 임무 구역에다 선주를 빚는 비법을 구하는 임무도 등록했다.

    호언 노인네가 백주산장에 쌓아 둔 귀한 술이 셀 수 없이 많아 다른 비법을 찾으려면 쉽지 않겠지만 운에 맡겨볼 생각이었다.

    가면을 벗은 한립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긴장했더니 약간의 피로가 몰려왔다. 조용히 눈을 감은 그의 몸에 은은하게 푸른빛이 떠올랐다.

    * * *

    이틀의 시간이 지나갔다.

    눈을 뜬 한립은 피로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상쾌한 표정이었다. 무상맹 가면을 쓰고 확인해보자 역시 검은 장도는 순식간에 팔리고 없었다.

    “드디어 성가신 물건이 내 손을 떠났구나.”

    한립은 선원석 50개를 하나씩 확인했다. 장도를 사간 수사가 원주인에게 쫓기든 말든 그건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겨우 선원석 50개로 그런 품질의 후천선기를 구했으니 뒤따르는 성가신 일들도 알아서 책임을 져야 했다.

    검은 장도가 금방 팔린 것에 비해 선주 비법을 구하는 요구에는 아무도 소식을 보내오지 않았다. 어차피 큰 기대를 품고 있지 않았던 그는 가면을 벗고 밀실을 나섰다.

    해가 막 뜨기 시작해 어스름한 하늘에서 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새하얀 눈이 내려앉은 종명산맥 곳곳이 금빛에 물들어서 무척 아름다웠다.

    맑은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자 한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오늘로 임무를 받은 지 3일째였으니 조양전으로 가봐야 했다.

    이번 호송 임무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아야 정상이겠지만 만약을 위해 여러 단약과 물건들을 점검하고 둔광을 일으켜 적하봉을 날아올랐다.

    반나절 후, 어느 임전각을 걸어 나온 그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다른 봉우리의 금색 대전 쪽으로 날아갔다.

    으리으리한 대전의 대문에는 태양 그림이 두 개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 걸린 편액에 조양전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대전 안에는 내문제자 복색을 한 수사들이 드문드문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립이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리는데 집사 복장을 한 각진 얼굴의 청년이 다가와서 공수를 했다.

    “려비우, 려 장로님이 맞으십니까?”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방우라 합니다. 이곳 조양전의 집사이지요. 저를 따라오시지요.”

    미소를 지은 각진 얼굴 청년이 조양전 쪽문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얼마 걸어가지 않아 손님용 탁자와 의자들이 놓인 대청에 도착했고 유생 복장을 한 중년인이 의자에 앉아 하얀 김이 올라오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인기척을 들은 유생 중년인이 고개를 들었다.

    “소 형,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립은 그를 알아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유생 복장 사내는 웅산 부도주의 비검 제련 임무에 함께 참여했던 산수 장로 중 한 명으로 이름은 소동초였다. 두 사람은 오가면서 인사를 몇 번 나누었었다.

    “려 형, 정말 오랜만입니다. 허허, 줄곧 폐관 수련 중이라고 들었는데 언제 출관하신 겁니까?”

    소동초는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나 살갑게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각진 얼굴 청년이 서둘러서 한립 앞에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꽤 되었습니다. 소 형께서도 이번 호송 임무를 맡으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요즘 주머니 사정이 빠듯해서, 임무로 공적점을 좀 벌어가려고요.”

    한립의 물음에 소동초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한립이 소동초를 자세히 보더니 놀란 기색으로 공수를 했다.

    “벌써 12선규를 다 뚫으신 겁니까? 축하드립니다!”

    종문 내에 진선경 수사들이 많아도 대부분이 초기이고 중기에 이르는 이는 많지 않았다. 진선경 후기의 경우 부도주들을 제외하면 더더욱 드물었고 말이다.

    “허허, 초기 경지에서 오랫동안 진전이 없다가 십여 년 전에 겨우 12번째 선규를 뚫었습니다. 그러느라 공적점을 거의 다 써버려서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는 것이고요.”

    소동초는 대수롭지 않은 듯했지만, 눈빛에 숨길 수 없는 흥분이 엿보였다.

    “하하, 저는 중기에 이를 수 있다면 공적점이 아니라 지닌 보물을 다 내놓을 수도 있겠습니다. 복에 겨운 소리를 하십니다.”

    “허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려 형께서도 폐관 수련 수십 년 만에 수행이 크게 느셨는데 뭘 그러십니까.”

    한립의 부러움이 담긴 언사에 소동초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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