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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77화 (1,334/2,000)

1577화. 오가는 술잔 속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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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언 노인은 박장대소를 하고는 어느새 새 술잔을 꺼내 술을 가득 채우고 옆에 놓인 의자를 팡팡 두드렸다.

술을 마시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립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분고분 의자에 앉아 술잔을 집어 들었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다른 건 다 미뤄도 좋은 술은 미루면 안 되거든. 이게 바로 노부가 수도의 길을 걷는 원칙이지!”

호언장로가 시원하게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걸 본 한립도 술잔을 꺾었다. 청량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맛이었다.

입안에서는 시원하던 술이 뱃속에서는 뜨겁게 사지와 백골을 타고 흘러 나른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게 했다.

“좋은 술입니다!”

“하하, 그렇지! 남들은 술에 취하면 헛짓거리를 한다고 떠들지만 얼토당토않은 소리야. 술을 들이부어 자신의 천성대로 굴어보지 않고서, 어찌 대도(大道)에 이를 3천 가지 길과 인생의 백 가지 맛을 깨닫겠느냐 이말 이지! 자, 마시세!”

한립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노인은 자신과 그의 잔을 가득 채웠다. 술에 취한 노인네가 하는 말이라고 흘려듣기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이 걸어온 수도의 길을 되짚어 보면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사람처럼 경계하고 조심했던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동경해왔던 세상만사에 거리낄 것도 없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선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이런 묵직한 상실감과 답답함이 노인의 호탕한 말과 술 몇 잔에 훨씬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보잘것없던 산골 꼬마가 시시때때로 닥쳐오는 위험을 이겨내고 지금의 수행에 이른 것이 그저 한시도 쉬지 않고 수련만 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바라마지 않던 선인이 되어 이 세상과 수명을 같이하게 되었고 촉룡도라는 거대한 종문에 속했으니 때때로 시간을 내서 즐거움을 누리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속박하던 족쇄를 풀어주어야 대도와 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 아니야!’

고개를 휘휘 저은 그는 상념을 떨쳐버렸다.

선계에 이르러서 이제 꿈꾸던 대도를 이루었다고, 이제 자유롭게 선인으로 누리며 살 수 있다고 착각했기에 엄습을 당해 기억을 잃고 청죽봉운검과 해 도인 등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늘 신중하게 움직이던 그의 성격에 방심하지 않고서야 엄청난 실패를 겪을 리 없었다.

선인으로서 이제 막 첫걸음을 뗀 것과 마찬가지인 그가 긴장을 풀고 여유를 즐기는 것이야말로 수만 년의 수행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모든 노력을 구렁텅이에 처박는 짓이었다.

선계가 겉보기에는 평화로워도 실제로는 곳곳에 암류가 흐르고 갖가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않으면 대도에 이를 가능성도 잃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에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린 한립은 흔들리기 전보다 오히려 심지가 더욱 굳어졌다.

“선배님, 청리주(靑梨酒) 맛이 아주 좋습니다.”

목소리를 높인 한립은 여전히 거침없이 술잔을 비웠지만, 그의 눈빛은 맑기만 했다.

“허어, 네 녀석이 이 술을 다 아느냐?”

호언장로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잘 안다고는 할 수 없고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

한립은 담담히 웃음 지었다.

뇌폭해양을 건널 때 손극과 자주 술잔을 기울이면서 그가 하던 이야기를 질리도록 들어 다양한 술에 대해 알게 되었다.

노인이 오늘 권한 술은 우연히 손극과 마셔보았던 종류 중 하나였다.

“좋구나! 어쩐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다 했더니 뜻이 통하는 구석이 있었어. 자자, 노부와 함께 몇 잔 더 하자꾸나.”

얼굴이 환해진 호언장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양손 가득 일고여덟 개의 술동이와 술잔을 들고 무슨 보물처럼 탁자 위에 진열해놓았다.

술동이와 술은 물론 술잔들도 특색이 있었다. 구리, 옥, 나무, 돌, 황금 등 재료도 다르고 각인된 무늬나 괴수 문양도 마치 주술문자처럼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술잔마다 어울리는 술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술잔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한립은 흥미가 일어 물었다.

“물론이지, 명마(名馬)도 잘 맞는 안장이 필요하듯 명주도 마찬가지야! 좋은 술도 조합이 좋지 않은 주기(酒器)를 이용하면 맛이 3할이나 부족해지거든. 예를 들어 비취색을 띄는 이 청리주는 천청비취(天靑翡翠)로 만든 잔을 쓰고, 맑은 향기로 유명한 홍상주(紅桑酒)는 만년 청등(靑藤) 잔으로 마셔야 향을 유지할 수 있…….”

호언장로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어떤 술에 어떤 잔이 제격인지 줄줄 읊어댔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상주도 배에서 손극과 마신 적이 있는 술이었다. 만년청등 잔을 들어서 한 모금을 마신 그의 눈이 밝아졌다.

손극과 마셨을 때도 귀한 술이라고 느꼈지만 오늘 마신 술이 훨씬 향기가 일품이었다.

만년청등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나무 향기가 술의 향기와 기막히게 어우러져 풍미를 배가시키고 있었다.

“천 년 이상 된 홍상과(紅桑果)로 빚은 홍상주가 품은 불 속성 기운과 청등잔이 품은 나무 속성 기운이 만나 술의 맛과 향을 더욱 살리는군요!”

한립은 감탄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상대가 정말 술에 관심이 있는지 반신반의하던 호언노인은 이제야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녀석이, 안목이 있어! 다음은 류광주(流光酒)를 마셔보자고!”

호언장로는 하얀 술동이를 들어 광물 호박으로 만든 술잔에 찰랑찰랑 술을 채웠다. 한동안 한립은 연달아 좋은 술을 맛볼 수 있었다.

적당히 주도(酒道)를 알면서 허심탄회하게 모르는 것을 묻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한립의 모습에 호언진인의 눈빛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보통 술들이 아니라 수행에 큰 도움이 되는 선주(仙酒)들이었기에 진선경 초기인 한립은 단전이 복잡한 기운으로 가득 차올라 그것을 소화하려면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조용히 술잔을 내려놓았지만 호언장로는 아직도 즐겁게 술을 들이켜 그보다 훨씬 수행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호언 장로님, 잠시 고할 일이 있습니다.”

기다려 보아도 노인이 술을 계속 마시자 한립이 입을 열었다.

“에이, 흥을 깨는구만! 할 말이 있으면 빨리빨리 그냥 하거라.”

말을 이렇게 해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나 지켜보는 노인을 보고 한립이 저물법기를 꺼내놓았다.

“화운령에서 근 10년간 채굴한 화원정입니다.”

노인은 그것을 받아 의식으로 살피더니 푸른 서책을 꺼내 무어라 글자를 적어 넣었다.

“종문에서 화원정을 상당히 중시하는 것 같은데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정순한 불의 힘을 지녔지만 너무 약해서 제련에 적합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광석이 아니라 오히려 불 속성 영석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뭐 하는 데 쓰긴. 선원석을 제련하는 데 연료로 쓰지.”

한립이 슬쩍 묻는 소리에 호언장로는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

“선원석을 제련하는데, 화원정이 필요하단 뜻입니까?”

“……뭐라는 게야. 설마 구전선원진(九轉仙元陣)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놀란 한립의 질문에 노인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구전선원진이요?”

한립은 아연한 얼굴이었다. 확실히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아, 본종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구만. 그래서 어디 출신이냐?”

“장로님 말씀대로입니다. 종문에 들어온 지는 백 년이 채 되지 않았고, 황란대륙의 작은 섬 출신입니다.”

“어쩐지, 황란대륙이면 워낙 구석에 있어서 잘 아는 이도 드무니까……. 구전선원진은 북한선역의 유명한 취영진법으로 단시간 내에 극품영석 100개의 힘을 응결해 선원석으로 바꾸어주는 진법이다.”

“그랬군요. 어쩐지 황란대륙에서는 선원석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종문은 적잖은 선원석을 보유하고 있다 했습니다.”

한립이 길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우리 촉룡도를 황란대륙 같은 곳과 비교할 수 있나!”

호언장로가 자부심 넘치는 말투로 답했다. 그 사이, 푸른 서책을 집어넣은 노인은 한립의 장로령을 받아 안에 공적점 180점을 넣어주었다.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면 제게 다음 임무를 안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후에 천천히 술을 즐기시지요.”

“오랜만에 게으름 좀 피워보려 했더니, 네 녀석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통에 귀찮아 죽겠구나!”

호언장로는 한립에게 눈을 흘겼지만 서책을 다시 꺼내서 몇 장을 빠르게 넘겼다.

“이리 급히 임무를 처리하려는 것은 하루빨리 수련에 집중하기 위해서겠지? 그렇다면 이게 딱 좋겠구나. 넉넉잡아도 몇 달이면 끝날 테니까.”

“어떤 임무입니까?”

“본문 내문제자들이 진전제자로 승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네 임무는 암암리에 내문제자들을 호송해서 진전제자 시험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야.”

“호송을 비밀리에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내문제자들은 자신의 실력으로 시험을 통과해야 해서 보통은 나설 필요가 없지. 그런데 변수가 생기는 일이 종종 있어서 진선 장로 한둘을 보내 몰래 따라다니게 하는 것이다.”

“알아들었습니다.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겠는지요?”

“시간도 딱 좋아, 3일 후거든! 시간에 맞춰 조양전(朝陽殿)으로 가면 자세한 일정을 설명해 주는 사람이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한립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술을 좀 지나치게 좋아하고 말은 박하게 해도 노인의 행동은 박하지 않았다.

그에게 안배해준 세 가지 임무 모두 그리 곤혹스럽지 않았다.

“입에 발린 말은 되었고, 나중에 시간 나면 찾아와서 술이나 몇 잔 더하고 가거라.”

“물론입니다.”

손을 젓는 호언장로를 향해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나서서 장원 밖으로 걸어가던 그는 노란 콩이 자라난 풀을 지나치지 못하고 멈춰 섰다.

“뭐냐, 도병에도 관심이 있는 것이냐?”

호언장로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인지 노인네가 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이 노인네가!’

한립은 지척에 있는 노인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저 귀동냥해서 아는 정도입니다. 호언장로께서는 도병술에도 정통하신 듯싶습니다.”

“당연하지! 도병으로 노부가 이인자라면 촉룡도 전체에 일인자가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도병에 대해 줄곧 관심은 많았으나 정통한 분을 만나지 못해 가르침을 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장로님께 조금이나마 지도를 받을 수 있다면…….”

한립은 반색을 하면서 공수를 했다.

“내게 도병술을 배우고 싶다고? 안 돼, 안 돼. 절대 알려주지 않을 것이니 꿈 깨거라!”

“아……. 의논의 여지가 전혀 없단 말씀이신지요?”

아쉬운지 한립은 단념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단번에 거절하려던 호언장로는 방금까지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던 것을 떠올리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글쎄. 아예 안 되는 것은 또 아니지. 노부가 평생 두 가지 애호가 있는데 하나가 술이요, 둘이 도병술이다. 노부가 지닌 선주들보다 더 뛰어난 선주를 빚을 방법을 알아 오면 흥정해볼 수도 있다.”

도병술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명주를 빚는 법을 모아온 노인보다 뛰어난 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한립은 불그스름한 호언장로의 얼굴을 보면서 내심 탄식했다. 호언장로는 도병술을 전수할 마음이 없는 것이 확실했다.

“좋습니다, 열심히 찾아볼 것이니 나중에 가서 딴 말씀 하지 마시지요.”

아직 막막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정 안 되면 막대한 대가를 걸고 무상맹에 임무를 등록하는 방법도 있었다.

“흥, 노부는 한 번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성격이니 같잖은 격장지계까지 쓸 것 없다! 네 녀석이 제대로 된 비법만 찾아온다면 도병술 쯤이야 전수해 줄 수도 있지.”

“예,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표표히 장원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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