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6화. 오가는 술잔 속에 (1)
*
한립은 조금씩 물을 밀어내는 주문을 외우며 호수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신원수 시체가 가라앉은 호수 바닥에 궁전이 보였다.
깊이가 백 장이 넘어서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어둑한 물속에서 궁전만은 예외적으로 하얀 보광을 반짝이고 있었다. 궁전 주위의 투명한 장막이 물이 내부로 흘러들지 않게 막아주었다.
한립은 먼저 요수의 시체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요수가 신룡의 혈맥을 이어받았다는 무상맹 수사의 말을 기억하고 혹시나 진령의 피를 추출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한참을 시도해도 한 방울의 정혈도 얻지 못했다.
그는 그저 사체에서 쓸 만한 재료를 모조리 뽑아내서 궁전으로 향했다. 다양한 꽃과 새, 물고기, 곤충들이 새겨진 고아한 양식의 궁전이 전혀 요수의 소굴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두 쪽으로 이뤄진 백옥 석문을 천천히 밀고 들어가자 휘황찬란한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둥그런 돌기둥 두 개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대청은 신원수의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선가 종문에서 법기와 보물들을 거의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신원수가 전부 가져다가 이곳에 쌓아 두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 요수가 종문들을 멸하고 모아둔 보물들은 이제 그의 차지였다.
한립은 빠르게 쌓여 있는 물건들을 훑고는 의자 뒤쪽에 깊숙이 자리 잡은 반투명한 물건을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수정처럼 반짝이는 물체는 단단하면서도 유연해 보였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신원수가 벗어 놓은 허물이었다. 허물을 저물탁 속에 넣은 그는 저물 반지 여러 개를 꺼내 대청 안에 산처럼 쌓인 보물들을 정리해서 담기 시작했다.
반나절 만에 그의 저물 반지와 저물 팔찌에 물건들이 그득해졌다.
그 중 영석들은 대부분 하품이나 중품이라 극품영석은 6, 7백 개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머지 영석들을 전부 바꾸면 극품영석 3, 4백 개는 더 구할 수 있을 듯했다.
보아하니 신원수에게 털린 종문들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하긴 그러니 그 오랜 세월 동안 요수가 판을 칠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그밖에 백여 점의 법보와 수백 점의 법기 그리고 약간의 희귀한 재료들을 발견했는데 영약은 단 한 개도 없었다. 그러나 법보들은 몽운귀 등에게 주면 잘 쓸 것이다.
신원수가 사용하던 금색 장검도 다시 꺼내 살펴보니 금속 속성의 통천령보로 예전의 청죽봉운검에 맞먹는 보물이었다.
요수가 모아둔 보물 중 재료들은 수량이 많지 않은 대신 독특한 기운을 지녀 그도 알아보기 어려운 것들도 보였다.
특히 사람 크기만 한 커다란 암금색 금속 덩어리 몇 개는 복잡한 문양이 가득해서 인공적으로 만든 흔적이 분명했고, 금속의 냉기가 아닌 뜨뜻한 온기를 발산했다.
그 후 며칠간 한립은 바로 섬을 떠나지 않고, 촉룡도 경내를 벗어난 김에 청죽봉운검을 불러내서 청원검결에서 익힌 검진 몇 가지를 일일이 펼쳐 보았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검진의 위력이 증폭되어서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운호도를 떠나기 직전 한립은 무상맹을 통해 신원수 임무를 완수했다는 소식을 전해 사슴 머리 가면을 쓴 수사를 굉장히 놀라게 했다.
그가 믿지 못하자 한립은 바로 신원수의 요핵을 꺼내 상대가 진위를 확인하게 해주었고, 상대는 무척 기뻐하면서 약속한 선원석 전부를 그 자리에서 통쾌하게 내주었다.
무상맹 임무를 수락한 이유는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0년이나 기다릴 수는 없어서였고, 또 짐승에게 속수무책으로 도륙당하는 섬사람들에게 약간의 측은지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 *
몇 달 후.
한립은 촉룡도로 돌아가자마자 태현전 편전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대청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회색 장포 노인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한립의 걸음 소리를 듣고서야 슬며시 눈을 떴다.
“음? 왜 이리 빨리 돌아온 것이야. 녀석, 임무를 완수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공적점으로 때우려는 것이구나.”
몸을 일으킨 노인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러나 한립은 아무 말 없이 저물대 하나를 홍목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의식으로 내용물을 살핀 노인은 졸음이 싹 달아난 눈빛으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헤헤, 이렇게 빨리 임무를 수행하다니 노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 잘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도착하니 신원수가 마침 거처를 비우고 있어 바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운도 좋구나! 허나 이 세상에서는 운도 일종의 실력이지.”
그를 대놓고 아래위로 훑은 노인은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을 믿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신원수의 허물을 거둔 그는 두꺼운 푸른 서적과 붓을 꺼내 몇 자를 적고는 한립의 장로 영패를 받아갔다. 하얀빛이 반짝이자 영패에는 공적점이 늘어나 있었다.
“첫 번째 임무는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쉬다가 두 번째 임무를 받으러 오거라.”
노인은 영패를 돌려주며 말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바로 다음 임무를 받고 싶습니다.”
“근면 성실한 것인지 아니면 성격이 급한 것인지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루는 다른 얄미운 놈들과는 다르구나?”
노인의 말에 한립은 그저 코끝을 긁적였다. 시간에 쫓기는 그는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추레한 노인은 바로 푸른 서책을 넘겨서 가장 윗줄의 임무를 짚었다.
“비교적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으니 네게 안배해주마.”
“어떤 임무입니까?”
“종문이 고운대륙 서남쪽 화운령(火雲嶺)에 꽤 큰 규모의 화원정(火元晶) 광맥을 보유하고 있는데, 요즘 광부들이 자주 실종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채굴을 멈추고 있다.
담당하고 있던 대승기 장로가 광맥으로 들어가 조사를 해보았는데도 원인을 찾을 수 없어 내문장로를 파견해 원인을 조사해 달라는 요청을 보내왔지. 그 김에 근 10년간 채굴한 화원정도 가져왔으면 하고 말이야. 그리 어렵지 않은 임무인데 보상은 괜찮아. 공적점 180점이다.”
“알겠습니다. 급한 임무라 하시니 바로 출발하지요.”
한립은 곧장 임무를 받고는 바깥으로 향했다.
“거, 재미있는 녀석이 나타났구만.”
추레한 노인은 그런 한립의 뒷모습을 보면서 씩 웃음 지었다.
* * *
1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고운대륙 서남쪽 산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진 거대 산맥.
새빨간 암석과 흙이 덮인 산맥에는 여러 화산분출구가 위치해 수시로 붉은 용암 기둥을 내뿜었다. 산맥 위에는 불기둥이 솟아올라 장관을 이루었고, 붉은 구름과 짙은 유황 냄새가 가득했다.
산맥 깊은 곳 골짜기에 벌집처럼 숭숭 동굴이 뚫려 있었다. 바로 화운령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푸른빛이 번쩍이고 나타난 한립은 동굴을 내려다보았다.
십여 일 후.
콰르릉! 콰쾅! 쿠쾅쾅!
화운령 지하에 있는 동굴 안에서 크고 작은 신영이 맞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들이 가까워질 때마다 굉음이 울리고 산 전체가 흔들려 바위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푸른 빛에 둘러싸인 그는 맨주먹으로 자신보다 8배는 더 커다란 붉은 도마뱀을 공격하고 있었다.
꽤 민첩하게 생긴 도마뱀은 수시로 입에서 화염을 머금은 긴 혀를 뻗었지만 한립을 맞추지는 못했다. 그러나 반대로 한립의 주먹은 매번 도마뱀을 강타해 단단한 짐승의 비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력한 힘을 지닌 불 도마뱀은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전신의 비늘은 형편없이 망가지고 말았다.
그러나 짐승은 도망가지 않고 거머리처럼 한립에게 달라붙어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퍽!
이상하게도 불도마뱀은 피하지도 않고 한립의 주먹을 맞아 호되게 동굴 벽으로 튕겨 나갔다. 주먹을 정통으로 맞아 등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굴 벽에 가까워진 불 도마뱀은 기습적으로 붉은 화염을 내뿜어서 벽을 녹여낸 뒤 흐릿하게 용암 속으로 숨어들려 했다.
쉭!
그때 거대한 검은 도광이 날아들어 눈 깜짝할 사이에 도마뱀의 등 뒤 상처를 파고들어 법칙의 힘을 발산했다.
도마뱀은 비늘의 보호를 받지 못해 도광에 갈려 두 동강이 났고 힘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그의 원영은 흐릿하게 열댓 개로 나뉘어진 검은 도광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한립은 유유히 손을 저어 검은 장도를 회수했다.
이 붉은 도마뱀이 광맥 일꾼 실종 사태의 흉수였다.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비늘이 무척 단단하고 산과 지면에 녹아들어 자유롭게 이동했기에 일꾼들을 기습하고 달아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립도 보름동안이나 짐승을 추적한 끝에 이곳에서 끝장을 본 것이다. 짐승의 배에서 새빨간 결정체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반투명한 결정체 안에 화염보다 천 배는 뜨거운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게 화원정이란 거군…….”
그중에 하나를 집어 올린 한립은 엄청난 고온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바닥에 쏟아진 화원정을 있는 그대로 쓸어 담은 그는 검은 장도로 붉은 도마뱀 사체의 네 다리를 잘라 챙긴 다음 푸른 빛줄기로 날아올랐다.
* * *
다시 1년이 지난 어느 날.
한립이 빠른 걸음으로 태현전 편전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입구를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임무 2개를 처리했으니 하나만 마치면 남은 백 년 동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었다.
급히 대청에 들어선 한립은 멈칫했다.
회포 노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몸을 돌려 대청을 나온 그는 편전 바깥을 지나는 시종 하나를 불러 세웠다.
“장로 대인을 뵙습니다.”
한립의 복색을 본 시종은 서둘러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편전의 장로께서는 어딜 가셨지?”
“아, 호언 장로님 말씀이시군요. 그분이라면 지금 백주봉(百酒峰) 백주산장(百酒山莊)에 계실 겁니다.”
시종은 손을 뻗어 인근의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가보니 정상에 건물들이 보였다.
“백주산장…….”
한립은 고민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산봉우리 위에는 거대한 장원이 세워져 있었고, 대문에는 백주산장이라는 네 글자가 생동감 넘치는 필체로 적혀 있었다.
마치 술에 잔뜩 취해서 휘갈겨 쓴 글자 같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의식을 방출해 그 안에 회포 노인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의복을 정돈한 그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들 사이에 있는 널찍한 뜰 양쪽에는 편전에서 보았던 화분들이 늘어서 있었고 다양한 풀과 꽃들이 짙은 영기를 내뿜으면서 자라고 있었다.
화분들을 살피던 한립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사람 키만큼 자란 녹색 풀에 주렁주렁 노란 콩이 맺혀 있었는데 천귀종(天鬼宗) 대승기 수사들에게 빼앗은 병두와 흡사했다.
유심히 콩을 봐둔 한립은 뜰을 지나 어느 대청의 문을 두드렸다.
“호언 장로님, 려비우가 뵙기를 청합니다.”
말을 마친 그는 문밖에 서서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향긋한 술 냄새와 함께 붉은 얼굴의 호언장로가 비취색 술잔을 쥐고 얼굴을 내밀었다.
“오, 네 녀석이로구나! 어서 안으로 들어오거라.”
손에 든 술잔을 비운 호언장로는 입맛을 다시었다.
휙 몸을 돌린 노인은 휘청휘청 걸어가 의자에 털썩 앉더니 비취색 술동이를 들어서 다시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캬, 이 맛이지, 이 맛이야!”
천천히 방 안에 들어선 한립은 술에 만취한 노인네를 보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임무를 완수하고 왔습니다. 진선경에 이르기 직전인 적석(赤蜥)이 화운령에 숨어 있어 처리하고 오는 길입니다.”
“소식은 들었다. 짜식이 솜씨가 썩 괜찮아! 시킨 일을 하나같이 깔끔하게 처리하고 말이야.”
호언장로는 한립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벌써 잔을 두 번이나 비웠다.
“장로님의 과찬에 감사드립니다. 뵌 김에 바로 다음 임무를 받고 싶습니다.”
“에잇, 뭘 그리 급하게 구는 것이야! 녀석아, 온갖 고생 끝에 선인이 되었으면서 영생을 두었다 어디다 쓰려고? 산을 옮기고 바다를 뒤집으려고 선인이 되었더냐? 아니면 온 세상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면서 위풍당당하게 한 번 살아보려고? 다 한낱 뜬구름에 불과한 소리지. 한 잔 술로 세상 근심을 잊는 것보다 훨씬 못해! 자자, 일단 나랑 한잔하면서 이야기나 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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