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5화. 실력을 보이다
*
한립은 침사성 동쪽에 이른 후에 바로 성을 떠나지 않고 비교적 멀쩡한 저택에 내려섰다.
정원이 3개가 딸린 이 저택은 이전에는 속세에서 상당히 부유한 가문의 소유였겠으나 집도 사람도 화를 피하지 못한 듯했다.
한립은 간단한 금제를 펼치고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방 안에 등불을 밝히고 탁자 옆에 앉아 푸른 소머리 가면을 불러내 얼굴에 썼다.
주문 소리가 울리고 푸르스름한 빛의 원반이 전방에 떠올랐다.
서둘러 오느라 신원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시간이 없었고, 침사성 내의 수도 종문들도 사라졌으니 무상맹을 통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신원수가 10년에 한 번 밖으로 나가 활동하는 기회를 놓쳤다고 그대로 종문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전에 그가 등록해 놓은 거대 알과 깃털의 정체를 알아보는 임무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젓던 그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맹 내에 거의 천년 간 공표가 되어있던 임무였다.
“모처에 근거지를 틀고 있는 진선경 신원수를 격살하라. 보수는 선원석 서른 개!”
이런 우연이 있나!
신원수가 그렇게 희귀한 요수는 아니라도 진선경 신원수는 얼마 없을 것이다. 그는 손끝으로 가면을 짚어가며 임무를 등록해 놓은 이와 연락을 취해보았다.
웅!
일각 정도 시간이 지나고 푸른 원반에서 흐릿한 빗이 빠져나와 사슴 머리 가면을 쓴 푸른 허상으로 변했다.
“제가 등록한 임무에 관심이 있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신원수의 구체적인 위치나 관련 정보를 알 수 있을지요.”
“정말 임무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당연히 알려드려야지요! 고운대륙 동부 해역의 운호도에 자리를 잡은 요수입니다. 상고진령인 신룡(蜃龍)의 피를 이어받아 변신술에 능하고 특히 사람의 모습을 하고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희색을 드러낸 푸른 허상이 얼른 대답했다.
“쉽지 않은 임무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임무가 발표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날 동안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을 리 없으니까요.”
“그게…… 이 신원수는 수만 년 전에 이미 진선경 중기의 수행을 지니게 된 데다 워낙 교활하여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서 말입니다.”
“진선경 중기라면 선원석 30개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만.”
“수사, 솔직히 말씀드리면 선원석 30개가 제가 제시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래도 신원수가 벗어 놓은 껍데기는 훌륭한 보갑의 재료이니 그 짐승을 죽일 수만 있다면 수사가 얻을 수 있는 부차적인 소득도 상당할 것으로 봅니다.”
한립의 말에 푸른 허상이 다급히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수사의 말씀은 이 임무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까?”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라 장담을 드릴 수는 없지만, 일단 시도는 해보는 것으로 하지요.”
“정말 너무 잘 되었습니다! 그럼 저는 기쁜 소식을 들려주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푸른 허상은 무척 기뻐하며 말했다.
* * *
이틀 뒤, 이른 아침.
태양이 떠올라 서늘하게 식어버린 섬에 온기를 가져다주었다. 섬 중앙의 운차호에는 짙은 안개가 드리워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도 자리를 비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한립은 고공에 떠서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청영안을 발동하고 의식을 방출했지만, 뜻밖에도 호수 위의 짙은 안개에 가로막혔다.
팟.
전신에 금색 비늘을 일으킨 그는 훨씬 굵어진 팔로 검은 장도를 불러냈다. 눈을 찌르는 검은 빛을 품은 장도가 주변의 천지 영기를 마구 끌어당기고 있었다.
수많은 칠흑 같은 주술문자들에 둘러싸인 장도는 강렬한 법칙 파동을 머금었다. 머리 위로 검은 장도를 치켜든 한립은 호수를 향해 맹렬히 휘둘렀다.
휭!
바람 소리와 함께 장도에서 거대 도 그림자가 뻗어 나가 호수 위로 떨어져 내렸다. 도 그림자가 닿기 전에 세찬 바람이 먼저 호수를 덮쳤고, 안개는 바람에 양쪽으로 밀려났다.
콰아앙!
충격으로 운차호 중앙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어 거대한 두 개의 물의 벽이 솟아올라 호숫가로 밀려들었다. 마치 해일처럼 호숫물이 운차호 주위의 숲을 뒤덮고 있었다.
“죽고 싶으냐!”
이때 노호성이 호수 밑바닥에서 들려왔다. 금빛이 갈라진 물 틈에서 무언가 솟아올라 곧장 한립에게 달려들었다.
‘신원수!’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금빛 속에 각진 얼굴에 어두운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금포(金袍) 중년인이 금색 장검을 들고 쇄도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요수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한립은 금포 중년인이 그가 찾던 신원수라고 직감했다.
주술문자들을 요란하게 번득이는 금색 장검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쩡!
대답 없이 도를 횡으로 휘두른 한립은 도신으로 검 끝을 쳐내 놀랍게도 상대를 튕겨 보내고 자신은 그 자리에서 꿋꿋이 버텼다.
“크크크, 천지 분간 못하는 어린 산선이로구나! 안 그래도 인족 진선의 피가 필요하던 참인데 제 발로 찾아오는 멍청이가 있을 줄이야!”
금포 중년인은 수백 장 뒤로 물러나 몸을 가누며 냉소를 흘렸다.
말을 마친 그는 장검을 허공으로 던져 천여 자루의 장검을 불러낸 뒤 그것들로 금색 연꽃 허상을 만들어냈다.
채채채채챙!
금색 장검들이 금색 교룡의 모습을 이루어 한립을 향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검들이 검기인 줄 알았던 한립은 금색 검룡(劍龍)이 입을 벌려 그를 깨물려 할 때 서야 하나하나가 실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휘두른 검은 장도를 검룡이 이빨로 단단히 붙들고 늘어졌다.
카카캉!
동시에 금색 검룡은 날카로운 발톱을 들어 그의 가슴을 노렸고, 찢겨나간 의복 아래로 금빛 비늘에 하얀 흔적을 남겼다.
한립은 두 발로 검룡의 머리를 퍽! 하고 걷어차면서 반동으로 장도를 뽑아내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가 멈추기도 전에 뒤쪽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진룡 모양을 한 괴상한 짐승이 뒤쪽에서 튀어나와 커다란 입으로 그의 머리통을 물어뜯으려 했다.
용의 머리와 몸통은 지니고 있었지만, 머리에는 뿔도 없었고 날카로운 발톱도 지니지 못한 짐승이었다.
한립은 몸에 푸른빛을 반짝이며 긴박한 순간 몸을 틀어서 짐승을 비켜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잠시 후, 한쪽 어깨에서 불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짐승이 그의 어깨를 물어 그의 육체에서 핏물이 꿀렁꿀렁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한립은 화들짝 놀랐다.
분명 상대를 비켜서 지나쳤는데 언제 물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냐, 이건 아냐…….’
다른 팔로 검은 장도를 높이 들어 어깨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갈라버리려는데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그의 머릿속에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공격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정신을 맑아지도록 정신자(精神刺) 신통을 쓴 것이다. 그는 두통을 애써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어깨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전 그는 자신의 팔을 잘라낼 뻔했다.
“어떻게 진선경 초기 수사가 내 환술에서 벗어난 거지?”
수백 장 밖에서 금포 사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그 말에 한립은 더욱 경계심을 키웠다. 그는 단호하게 검은 장도로 허공에 호선을 그려 상대의 어깨를 노렸다.
“네 놈이 정말 죽고 싶구나!”
흉악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금포 사내는 두 손으로 빠르게 수결을 맺어 몽환적인 오색 광채를 방출했다.
오색 광채를 본 한립은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동시에 금속성의 마찰음이 울리고 금색 검룡이 뒤쪽에서 달려들어 그의 등을 향해 이빨이 가득한 아가리를 벌렸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앞을 막은 한립은 장도를 쥔 팔을 뒤로 꺾어 횡으로 베었다.
채채채채챙!
초승달 모양의 도광이 허공을 뚫고 날아가 검룡을 막았고, 바로 그때 전방의 오색 광채 속에서 거대 손이 불쑥 튀어나와 한립을 낚아챘다.
가슴에 어마어마한 압력을 느낀 한립은 일시적으로 숨을 쉬기가 곤란해졌고, 오색 광채의 영향력은 그대로라 그의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죽어라!”
오색 광채 뒤쪽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막 도광에 밀려났던 금색 검룡이 다시금 달려들어 용머리에서 두 자루의 검이 길게 자라나 가시처럼 한립의 등을 꿰뚫으려 하고 있었다.
눈에 밝은 남색빛을 머금고도 한립은 아직 환상을 파훼할 수 없어 의식이 흐릿해져 갔다.
크아아앙!
그는 폭발적으로 괴성을 내지르며 화려한 금빛 속에서 근육과 몸이 부풀어 올라 커다란 금색 거원으로 변했다.
그를 붙들고 있던 거대 손이 버티지 못하고 갈라지자, 자유를 되찾은 산악 거원은 두 손으로 검은 장도를 쥐고 전방의 오색 광채와 그 뒤에 숨은 금포 사내를 내리쳤다.
콰아아아.
광풍이 몰아쳤다.
오색 광채가 장도에서 뿜어져 나온 광풍에 흩어지려 하자 뒤쪽의 금포 사내가 겁먹고 후퇴했다. 하지만 검은 장도 공격의 파급력은 대단해서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장도가 그의 몸에 떨어지기 전, 금포 사내는 괴이한 웃음을 흘리면서 피하지 않고 그대로 몸이 갈라지게 두었다.
금포 사내의 육체는 갈라지는 와중에 왜곡되며 그대로 소실되어 버렸다.
그 순간, 한립 뒤에서 기습하던 검룡이 사람을 말을 내뱉었다.
“어디 이번에는 어떻게 피하는지 보자꾸나!”
갑작스레 몸이 두 배로 길어진 검룡은 한립의 등을 찔러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검룡을 등지고 있는 한립은 달아나기에도, 돌아서서 반격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팟!
그때 금색 검룡과 한립 사이 공간에 불현듯 흐릿하게 푸른빛이 번뜩이고 사라졌다. 기이하게도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검색 검룡이 느닷없이 고꾸라져 호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립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체형을 줄여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간 다음 아래쪽으로 몸을 날려 금색 금룡을 따라갔다.
채챙!
검룡의 몸에서 장검들이 한 자루씩 떨어져 나가 그 안의 금포 사내가 노출되었다. 미간에 선명한 핏빛 구멍이 뚫린 그는 눈에 생기를 잃고 풀려 있었다.
미간의 일격으로 머릿속에 숨어 있던 원영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한립이 손을 뻗자 수많은 금색 장검들이 빛으로 흩어지며 마지막 한 자루만 그의 손에 들렸다. 그는 금색 장검을 대충 훑고는 저물탁 속에 넣어 두었다.
팟!
금포 사내의 미간에 뚫린 구멍에서 푸른빛과 함께 손가락 길이 밖에 안되는 작은 검이 쾌속으로 빠져나와 흐릿하게 궤적을 남기면서 원래의 크기와 모양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바로 한립의 청죽봉운검이었다.
오랜 세월 체내에서 배양하며 당시 집어삼킨 검원을 흡수한 청죽봉운검은 각각이 거의 후천선기의 경지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런 검 72자루가 합일하면 진정한 후천선기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촉룡도에 있을 때는 누가 알아차릴까 봐 함부로 불러내지 못하다가 오늘 전투에서 위력을 시험해 본 것인데 이렇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한립은 운 좋게 신원수가 변한 금포 사내를 죽인 게 아니라 그를 함정에 빠트려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처음 어깨를 문 것이 환술임을 간파한 그는 은연중에 연신술을 운용해서 상대가 검룡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상대의 속임수를 이용해서 미리 체내에서 합일해 둔 72자루의 청죽봉운검으로 신원수가 가장 기고만장해하던 순간 일격에 목숨을 거두었다.
청죽봉운검들은 허공을 선회해 그의 몸속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호수에 뜬 금포 사내의 시체를 향해 내려가 호수표면에 섰다. 의식으로 사내를 살피던 그는 손가락을 칼날처럼 사용해 금포 사내의 배에서 흑자색 요핵을 파냈다.
요핵을 잃은 금포 사내의 시체는 급격히 팽창해 뿔과 발톱이 없는 금색 괴룡으로 변한 다음 천천히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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