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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74화 (1,331/2,000)

1574화. 화양성(花陽城)의 산수들

*

“예쁘냐?”

한립이 영초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홍목 책상 뒤편에서 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한립은 커다란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은, 코끝이 붉은 노인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머리에는 연꽃 관(冠)을 쓰고 낡은 회백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회백색 머리카락이 어수선하게 헝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겉치장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부류 같았다.

노인의 허리춤에는 크기가 다른 호리병이 하나씩 걸려 있었는데 은백색 호리병과 주홍색 호리병 모두 복잡한 주술문자가 새겨져 있어 퍽 비범해 보였다.

“예쁩니다.”

한립은 솔직히 답했다.

“가슴이 크고 엉덩이가 큰 선자들보다 더?”

노인은 코웃음을 치며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한립은 딱히 마땅한 대답을 찾을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눈앞의 노인은 어찌 보아도 이상했다.

이곳에 앉아 있으니 이곳을 담당하는 집사 장로여야 할 텐데 탁자의 분재 화분이나 몸에 지닌 호리병박들을 보니 평범한 인물은 아닌 듯했다.

더욱 의아한 것은 그가 기이한 기운을 뿜어 노인의 수행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배님, 놀리지 마십시오. 저는 집사급 임무를 수령하기 위해 찾아뵌 것입니다.”

한립은 공수하며 눈치껏 상대를 ‘선배’라 칭했다. 그런데 노인은 그의 말을 못들은 것처럼 혼자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아주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여기서 자빠져 있다가는 심심해 죽겠어. 차라리 화초를 가꾸는 것이 재미가 있지 이건 뭐…….”

노인이 몸을 기울이자 허리춤에서 은백색 호리병이 퐁! 하고 뚜껑이 열려 꿀처럼 달콤한 향기를 발산했다.

향기를 맡은 한립은 호리병 속에 담긴 것이 인공적으로 배합한 영액인 것을 알고 눈을 빛냈다.

힐끗 그의 반응을 본 노인은 득의양양하게 입꼬리를 실룩이고는, 호리병을 기울여 분재 뿌리에다 연한 금색 액체를 딱 한 방울 떨구었다.

화려한 금빛이 분재의 뿌리부터 잔가지까지 몇 번을 돌다 차차 흩어졌다. 흡족하게 그걸 지켜본 노인은 은백색 호리병을 다시 허리춤에 걸어두고 다른 주홍색 호리병을 들어 올렸다.

한립은 또 어떤 영액으로 분재를 가꾸려는 것인가 유심히 보고 있는데 노인은 갑자기 호리병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 꿀꺽꿀꺽 내용물을 마셨다.

짙은 향기가 대청에 퍼져 이전 영액의 달콤한 향을 다 덮어버렸다. 주홍색 호리병에 든 것은 영초 재배를 위한 영액이 아니라 잘 빚은 술이 분명했다.

어이가 없어진 한립은 시선을 돌려 화분의 영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술을 잔뜩 마시고 입가를 훔칠 때쯤 노인의 코는 더 붉어져 있었다.

그는 한립이 자신의 영초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녀석아, 공치책 순서에 따르면 네가 맡아야 할 임무는 고운대륙 동쪽 동류해역(東流海域)의 운호도(雲湖島)란 데를 가서, 신원수(蜃元獸)의 거처를 찾아낸 다음 그것이 벗어 놓은 허물을 들고 오는 일이다.”

노인은 갑자기 두툼한 푸른 서책을 펼치더니 거기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읽어주었다.

“그냥 탈피한 껍데기만 들고 오면 된다는 뜻입니까?”

“헤헤, 이번 임무를 우습게 보았다가는 큰코다칠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 신원수는 이미 진선경 중기에 이르러서 그 거처에 몰래 숨어들어 허물을 들고나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야.”

한립의 반문에 노인이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선배님의 말씀대로 제가 경솔했습니다. 짐승에 대한 다른 정보는 없는지요?”

“눈빛도 살아 있고 예의도 바른 녀석인 것 같으니 노부가 요령을 하나 알려주마! 신원수는 본래 소굴에 틀어박혀 잘 나오지 않는데 10년마다 이레씩은 꼭 거처를 떠나서 곳곳에서 풍파를 일으키고 다닌다. 그때 들어가서 허물을 꺼내오면 될 것이야. 운이 나쁘면 몇 년 기다릴 수는 있어도 겁 없이 들어갔다가 괜히 아까운 목숨만 버리고 오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게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그렇게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임무이니, 완수하고 나면 종문에서 공적점 2백 점이 보상으로 나갈 것이다. 일을 마치면 이곳으로 와서 보상을 받아가면 된다.”

노인은 공치책에서 보상을 확인하고 일러주었다.

그는 곧바로 장로 영패를 내밀어 임무를 수령하고는 관련 지도와 정보를 얻어 편전을 빠져나왔다.

태현전을 나선 한립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지도에서 운호도의 위치를 확인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해서가 아니라 신원수가 언제 거처를 비울지 알 수 없어서였다. 괜히 늦장을 피웠다가 신원수가 나돌아다니는 며칠이 지나면 꼬박 10년을 기다려야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광장에 있는 임전각의 전송진을 통해 그는 종명산맥 동쪽의 망해봉(望海峰)으로 이동했다.

종명산맥 가장 동쪽에 있는 봉우리라 지금까지 그가 종문의 전송진을 이용한 이래 가장 먼 거리를 온 것이었다.

산 정상에 선 그는 멀리 동쪽에 검은 머리카락처럼 아득하게 보이는 동류해역을 응시했다. 그가 가야 할 운호도는 동류해역의 수많은 섬 중 하나였다.

추레한 노인에게서 받은 해역 지도를 꼼꼼하게 확인한 그는 방향을 정해 몸을 날렸다.

* * *

며칠 뒤.

동류해역 동북 방향에 있는 이파리 모양의 거대한 섬.

섬 면적의 10분의 1을 차지한 거대한 호수는 푸른 보석처럼 섬 중앙에 박혀 섬 곳곳으로 가느다란 물줄기를 나르고 있었다.

운차호(雲遮湖)라 불리는 호수는 운호도의 담수원으로, 섬에 사는 수천만 생령들과 크고 작은 성과 촌락이 이 물줄기에 의지해 살아갔다.

운차호 서쪽으로 갈라진 지류인 침사강(沈沙江) 끝에는 성벽의 높이가 거산만 한 침사성(沈沙城)이 우뚝 솟아 있었다.

모래가 가라앉은 강이라는 ‘침사강’의 뜻처럼 강바닥에서 특유의 흑침사(黑沈沙)를 퍼 올려 지은 거대한 성에는 만여 명의 범인들과 수도 종문이 존재했다.

하늘의 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붉은 석양이 바다와 섬에 드리워 침사성의 높다란 성벽이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 푸른 빛줄기가 고공에서 날아들어 침사성 상공에 멈추었다.

푸른 장포를 입은 청년은 맑은 눈으로 주변 만 리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성벽과 성내의 건물들을 보고 점점 표정이 가라앉았다.

원래는 위풍당당했을 성벽이 어쩐 일인지 무너져 내려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남아있는 성벽 위에는 검게 굳은 피가 가득했다.

또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에는 대충 보아도 적잖은 사람들과 가축들의 사체가 참혹하게 묻혀 있었다.

석양이 드리운 성에 기다랗게 그림자가 져서 그 끔찍한 광경이 점점 어둠에 잡아먹히는 중이었다.

그때 한립은 성안에서 횃불로 보이는 노란빛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성벽을 박차고 화살처럼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쇄도했다.

쿵!

묵직하게 떨어지는 충격에 장원이 크게 흔들리며 안 그래도 위태롭던 주변의 방들이 연달아 무너져 내렸다.

이에 장원 뜰에서 불을 피우고 앉아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갈의(褐衣)를 입은 청년과 중년의 미부인이 식은땀을 흘리며 바들바들 떠는 동안 새까만 피부의 거한이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소리쳤다.

“사, 살려주십시오, 선배님!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바, 바로 이곳을 떠나……. 다, 다시는…….”

새까만 거한은 애걸하면서 무릎으로 기어 재빨리 뒤쪽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겨우 축기 후기에 불과한 세 수사는 한립의 수행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손가락만 까딱해도 그들을 죽일 수 있는 고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멈춰라. 너희들은 누구지?”

미간을 좁힌 한립이 냉랭히 물었다.

“소, 소인들은 화양성(花陽城)의 산수들입니다. 선배님께서 계신 줄 알았으면 저, 절대 이곳에 접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뻣뻣하게 굳은 세 사람 중 갈의를 입은 청년이 용기를 내 답했다.

“침사성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느냐?”

“모, 모르십니까? 설마 현지 수도 가문의 선배님이 아니라 해외(海外)에서 오신 분이란 말입니까?”

한립의 질문에 움찔한 갈의 청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립을 올려다보았다.

“해외 수사라…….”

한립은 바로 말귀를 알아들었다.

외딴 섬에서 일생을 나는 저계 수사들에게는 운호도가 곧 대륙이고, 바다를 건너 이곳으로 오는 낯선 이들은 해외 수사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물었다. 누가 이런 살육을 벌인 것인지?”

“선배님께 아룁니다. 운차호에 사는 포악한 뱀 요수가 또 먹이를 찾아 나왔다가 성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먹어치웠다고 들었습니다.”

서늘해진 한립의 목소리에 갈의 청년이 빠르게 대답했다.

“어떻게 생긴 요수지? 직접 본 적이 있느냐?”

“그럴 리가요. 제가 봤다면 벌써 요수에게 잡아먹혔을 겁니다. 들려오는 소문에는 엄청나게 나이가 많고 몸집도 산처럼 크다고 합니다. 혀만 내밀어도 몇 백 장은 되고 뱃속 가득 독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갈의 청년은 그가 들었던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았다.

“맞아요, 맞습니다. 아, 그리고 그 요수는 일정 기간을 두고 한 번씩 나와서 소란을 피우는데 매번 성 하나를 골라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잡아먹어야만 사냥을 멈춘다고 합니다.”

새까만 거한도 이제 긴장이 좀 풀렸는지 옆에서 덧붙였다.

“10년에 한 번씩 나타나서 7일 정도 활동하다 잠적하고, 다시 10년 후에 나타나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들의 말에 한립은 임무를 떠올리고 물었다.

“선배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군요?”

새까만 거한은 그의 눈치를 보면서 의외라는 얼굴로 답했다.

한립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들이 말하는 뱀 요수가 바로 진선경 중기의 신원수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가 한발 늦었다는 소리였다. 어쩐지 오면서 내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섬 중앙의 거대 담수호가 있으면 상식적으로 수원이 있는 곳 근처로 갈수록 성의 규모도 커지고 인구도 많아져야 했는데 이 섬은 정반대였다.

섬 중앙으로 갈수록 성이 거의 없고 잘 보이지 않는 폐쇄적인 지형 속에 자리했다. 그래서 침사성은 운차호와 수십만 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호수 서쪽으로 두 번째로 가까이 있는 성이었다.

신원수 때문에 근처의 성들이 점점 호수와 먼 곳으로 이주했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요수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을 해치는데 아무도 나서서 없애지 않았단 말이냐?”

“아주 아주 오래전에 선인 한 분이 인근 종문 몇 곳의 간청을 받아들여 요수를 쫓아내려고 했었답니다. 선인은 요수와 3일 밤낮을 싸우다 중상을 입고 물러났고 이 일에 개입된 종문들은 며칠 사이 요수에게 도륙을 당해 멸문이 되고 말았지요. 그 후로는 아무도 감히 나서지 않게 되었습니다.”

갈의 청년이 공손히 답했다.

“너희는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던 것이지?”

한립은 담담히 세 사람을 훑었고 아직도 엎드려 있던 이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어째서 말이 없는 것이냐?”

“저, 저희가 있는 곳은 낙사종(落沙宗) 총단이 있던 자립니다. 일대에서 가장 큰 종문이라……. 그게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땀에 흠뻑 젖은 갈의 청년은 덜덜 떨고 있었다.

“종문 수사들이 다 죽은 김에 재물이나 털어보려 했다?”

한참 동안 청년이 말을 잊지 못하자 한립이 말을 맺었다.

“선배님, 저희도 이제 막 도착해서 아직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미, 믿지 못하시겠으면 직접 저희의 저물대를 확인하셔도 됩니다!”

갈의 청년은 다급히 자신의 저물대를 높이 들어 올렸고 거한과 중년 부인도 서둘러 그를 따라 저물대를 들어 올렸다. 한립이 의식으로 살피니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는 그들의 행동에 크게 반감이 들지도 않았다. 의지할 곳 없는 산수들이 수행의 길을 걸어가는 게 얼마나 고달픈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의식을 퍼트려 낙사종의 잔해를 살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종문 자체는 규모가 그리 작지 않은데 너무 철저히 부서져서인지 남은 보물이며 물건이 거의 없었다.

“동쪽 잔해 밑에는 그나마 물건이 몇 개 남아있으니 파가지고 그 즉시 이곳을 떠나거라.”

한립은 이 말을 남기고 몸을 날려 침사성 동쪽으로 날아올랐다.

어차피 그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으니 쓸 만한 소식을 알려준 보수로 남겨준 것이었다. 그 물건들이 그들이 수도의 길을 걷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 수사는 몸을 일으키는 것도 잊고 멍하니 서로 눈치를 살폈지만 한립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일어나 그가 말해준 쪽의 잔해를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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