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73화 (1,330/2,000)

1573화. 종소리

*

한립은 더 이상 원숭이들을 상대하지 않고 진언보륜의 위력을 계속해서 실행해 보았다. 방반과 싸울 때 이런 능력이 있었으면 결코 허겁지겁 도망 다니느라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계에서 목숨을 부지할 강력한 방법이 생긴 한립은 만족스런 심정으로 다시 적하봉 쪽으로 날아올랐다.

붉은 털 후왕만이 그가 사라진 방향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나머지 원숭이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먹은 것처럼 골짜기 안을 뛰어다녔다.

* * *

동부로 돌아간 한립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폐관을 지속했고, 또 몇 해가 흘러갔다.

금빛이 흐르는 그의 배에서 7개의 선규가 반짝이면서 천지영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뜬 그는 금빛을 거두고 미간을 좁혔다. 7번째 선규를 뚫은 이후로 수련 속도가 급격히 느려진 것이다.

다른 동급 진선경 수사에 비하면 여전히 빨랐지만 이전 속도에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되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뒷짐을 쥐고 이리저리 동부 안을 거닐었다.

잠시 후 걸음을 멈춘 그는 무슨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바깥으로 향했다. 다른 수사였다면 이대로도 문제없었지만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방반 배후에 있는 거물이 언제 그를 찾아낼지 몰랐기 때문이다.

청죽봉운검을 되찾고 몇 년간 불순한 기운을 제거해서 실력이 늘었고 진언보륜의 감속 신통도 있었지만 그 신비한 인물을 상대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들지 않았다.

지금은 안주하기보다는 빨리 실력을 키워야 할 때였다. 빠른 수련을 돕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누가 뭐래도 단약이었다.

이전에는 그냥 수련해도 새로운 선규를 쉽게 뚫을 수 있어 단약에 크게 기대지 않았는데 이제는 적합한 단약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폐관수련을 하면서 보통 영약들도 충분히 길러놨고, 또 폐관수련만 수십 년간 했으니 백 년에 3번 맡아야하는 임무도 슬슬 처리할 시기였다.

쿠쿵.

적하봉 진법 금제들이 둔중한 진동과 함께 서서히 사라졌다. 각종 보호막들이 아름다운 빛을 반짝이면서 흩어졌다.

그걸 본 손부정 등은 곧바로 한립의 동부 앞으로 모여 있다가 예를 올렸다.

“려 장로님 출관하셨습니까!”

아홉 명이 주르륵 서서 이구동성으로 인사를 올렸다.

“몽운귀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이냐?”

아홉 명 중, 손부정과 몽천천이 원영을 응결하는데 성공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결단 후기 수사가 되어 있었다.

겨우 수십 년 만에 열 명 중에 세 명이 원영을 응결하는데 성공하다니 촉룡도 내에서도 수련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게다가 저계 수사로 시작한 몽천천의 성과는 더욱 두드러졌다.

“장로님께 아룁니다. 몽운귀는 명을 받아 출타를 한 뒤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손부정이 사실대로 고하자 몽천천은 걱정스런 기색을 드러냈다. 한립도 그리 높지 않은 몽운귀의 수행을 떠올리면서 별일이 없기를 희망했다.

호신용 보물을 두 개 주었고 장로의 시종 신분이라 촉룡도 세력 범위만 떠나지 않으면 무탈할 거라 생각했다.

“장원을 돌보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 단약들은 상이니 가져다 쓰거라.”

그는 손을 저어 9개의 약병을 각자에게 하나씩 던져주었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손부정과 시종들이 얼른 약병을 받아들고 예를 올렸다.

“오늘부터 산봉우리를 다시 개방한다. 손부정, 너는 다른 일손을 추려 영지 내의 황폐한 땅을 밭으로 쓸 수 있게 정돈하도록.”

“예! 그런데 장로님, 어떤 영초를 심으실 생각이신지요?”

“너희가 일단 밭을 개간해 두면 무엇을 심을지는 나중에 정할 것이다.”

한립의 명에 시종들이 공손히 답하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천천,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예!”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몽천천은 먼저 동부 쪽으로 걸어가는 한립을 보고 한달음에 쫓아갔다. 그녀의 허리춤에서 땡그랑거리는 맑은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부의 어느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석실 안은 영기를 모으는 진법이 커다랗게 펼쳐져 있어 천지영기가 충만했고,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하얀 알이 놓여 있었다.

몽천천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천천히 석실을 돌아보다 하얀 알에 시선을 빼앗겼다.

알은 지난 30여 년의 보양으로 이전보다 생기는 넘쳤는데 아직 부화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무언가를 물으려다 오라비의 당부를 떠올리고 입을 다문 채 한립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앞으로 네가 할 일은 이 알을 부화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불 속성 공법을 익혔고 원영을 응결했으니 열심히 노력하면 성과가 있을 것이다.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넌 동부과 석실을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좋다. 기억할 것은, 절대 이 일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서는 안 되며 네 오라비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알아들었느냐?”

한립은 소매를 펄럭여 옥패와 저물탁을 몽천천 수중에 떨구었다.

“예! 비밀을 엄수하면서 려 장로님께서 맡겨주신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손으로 옥패와 저물탁을 받아 쥔 몽천천은 힘차게 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동부를 떠나 산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 화맥이 흐르는 동굴은 수십 년 전과 비교해 공기 중의 불 속성 영기는 많이 안정되었지만 작열하는 열기는 여전했다.

용암 호수 상공에는 붉은 기운이 흐르는 새빨간 고치가 부풀어 올랐다 수축했다 하면서 주변의 열기를 잡아먹고 있었다.

그는 의식으로 고치 속의 정염 불새를 살피고는 옅게 웃음 지었다.

오랫동안 화맥의 충만한 열기를 흡수한 정염 불새는 거의 원기를 회복했고 얼마 뒤에는 이전보다 더욱 강한 위력과 뛰어난 영성을 지니게 될 수도 있을 듯싶었다.

고치 속의 정염 불새는 한립이 주변에 있는 것을 감응했는지 맑게 지저귀며 미세하게 요동쳤다.

“급할 것 없으니 여기서 회복하는 데 전념하고 있거라!”

그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고치는 이내 잠잠해졌다.

쿠르르.

한립이 조금 더 정염 불새를 바라보다 몸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지하 동굴이 세차게 흔들렸다.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형의 힘이 지하 깊은 곳에서 거대한 파도처럼 용솟음치고 있었다.

강력한 지진으로 수많은 붉은 암석들이 떨어져 내렸고 진선경의 수행을 지닌 한립조차 막대한 힘에 놀라 안색이 달라졌다.

그런데 잠시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둥!

거대한 종소리가 지하 깊은 곳에서 전해와 그의 귀청을 때린 것이다.

그로 인해 동굴 속 용암 호수는 높게 솟아올라 사방으로 붉은 용암을 뿜어냈고 허공의 고치는 몇 번 꿈틀대다가 평정을 되찾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한립은 종명산맥의 전설을 떠올렸다.

지하에서 수시로 기이한 종소리 같은 게 울려서 산맥의 이름도 종명산맥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촉룡도에 온 지도 수십 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듣지 못하다가 오늘 우연히 땅속의 종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방금 용솟음치던 기이한 힘을 되뇌던 한립은 피식 웃음 지었다.

어차피 그와 상관없는 일이라면 굳이 파고들 이유가 없었다.

휙!

동굴 바깥을 향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한립은 번개처럼 뒤를 돌아 눈에서 남색 빛을 번득였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용암 호수 아래쪽에 흐릿하게 거대한 붉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무언가의 꼬리로 추정되는 거대한 붉은 그림자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한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진작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의식을 퍼트려 놓았었는데도 땅속에는 온갖 기운이 혼잡하게 섞여 있어 제대로 감응할 수가 없었다.

“그게 뭐였을까?”

그 자리에서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한립은 걱정을 털어 버렸다.

종명산맥의 상황은 그가 생각하던 것보다 복잡했지만 정염 불새에게 위협만 되지 않으면 되었다.

몇 시진 후, 경운봉 태현전.

하얀색과 파란색 석벽 앞에는 형형색색의 복장을 한 장로와 제자들이 목을 길게 빼고 자신에게 적합한 임무가 없는지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전 안쪽의 어두운 금색 석벽 앞에는 몇몇 진선경 수사들만이 미간에 주름이 가득한 채 서서 한숨을 푹푹 쉬어대고 있었다.

“보상은 많고 할 일은 적은 임무를 찾기가 이리 어려워서야…….”

장로 복색을 한 흰 수염 노인이 탄식하며 걸음을 돌리자 똑같은 장로 복색을 한 청년이 그를 지나쳐 석벽 앞에 자리를 잡았다.

바로 한립이었다.

고개를 들어 석벽의 임무를 하나씩 살피던 그의 미간에도 다른 이들처럼 주름이 가기 시작했다.

보상에 비해 임무가 너무 위험하고 어렵거나 아니면 기나긴 세월을 허비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선경 장로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어대는 이유가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항목은 진언화륜경을 2성까지 수련하는 것이었다.

“어, 이거 려 형 아니십니까?”

한립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돌려 익숙한 인물들을 마주했다. 방금 말을 건넨 이는 구불구불한 수염을 가진 거한으로 함께 웅산의 임무에 참가했던 남씨 성의 내문장로였다.

“하하, 남형과 노형도 오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립은 그들을 향해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기 형에게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제 출관하셨나 봅니다.”

“너무 부지런 떠시는 것 아닙니까? 출관하자마자 쉬지도 않으시고 바로 임무를 택하러 오시고요.”

구불구불한 수염 사내와 노 장로가 공수하면서 한마디씩 했다.

“기한이 임박하기 전에 임무를 수행할까 해서 나와 본 길입니다.”

한립의 대답에 남 장로와 노 장로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큼큼, 정말 세 가지 임무를 수행하실 작정이십니까?”

거한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입문할 당시에 그렇게 하기로 선택을 하였으니까요. 무슨 문제라도…….”

“그게……. 종문에서 발표한 집사급 임무를 수행하면 보상이 좋기는 한데 워낙 달성 조건이 까다로워서요. 힘은 힘대로 들고 또 얼마나 위험한 일이 많습니까.”

“맞습니다. 차라리 천년 중 백 년간 종문 내에서 집사의 소임을 하는 것이 훨씬 쉽지요. 집사급 임무는 운에 따라 난이도가 크게 좌우되어서 공치책(功値冊)에서 순서대로 임무가 배정되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볼 때 이곳에서 다른 임무를 몇 개 골라 수행하고, 그 공적점으로 충당하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구불구불 수염 사내의 설명에 노 장로가 보충해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습니다. 두 분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석벽에서도 마땅한 임무를 찾기가 어렵군요. 일단 한 번 가보고 상황을 봐서 결정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집사급 임무를 받아야 하는지 아십니까?”

한립은 가볍게 탄식하며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더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태현전 뒤쪽으로 가셔서 좌측의 편전으로 가시면 됩니다.”

거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해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바로 가보겠습니다.”

한립은 그들이 알려준 대로 금색 석벽을 지나서 뒤쪽에 난 문으로 걸어갔다. 가다 보니 좌측에 편전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었다.

반쯤 열려있는 편전 문을 가볍게 밀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그리 크지 않은 대청이 있었다.

천장에 뚫린 지붕의 창에서 햇살이 들어와 정확히 홍목(紅木) 책상 오른쪽 귀퉁이에 놓인 분재 화분을 비추었다.

손바닥 크기의 늙은 소나무는 햇살에 투명하게 반짝였고, 은은한 금빛이 뿌리부터 잔가지들까지 타고 흘러 별빛처럼 반짝였다.

영기를 가득 머금은 노송 분재는 한 눈에 보기에도 뛰어난 영초였다. 그는 그저 이런 영초와 재배법을 들어본 적이 없어 쉽게 눈길을 뗄 수 없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