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화. 원숭이
*
오래지 않아 적하봉에 각양각색의 금제 대진들이 펼쳐졌다.
산봉우리를 봉쇄한 한립은 동부 밀실로 돌아가 앉아, 몸속에서 선령력에 감싸여 원영의 불길로 서서히 연화중인 청죽봉운검을 점검했다.
오랜 세월 떨어져 있었고 천검총에서 여러 검원들을 받아들여 혼잡해진 기운을 다시 정련을 해야 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손바닥을 뒤집어 장천병을 꺼내들었다. 이제는 장천병이 시간법칙을 함유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은은한 금빛을 일으킨 그는 등 뒤로 진언보륜을 불러내 손바닥 위로 불러왔다. 빠르게 회전하는 진언보륜에서 금색 파문이 퍼져나가 장천병 속으로 미세하게 시간법칙의 힘이 흘러들었다.
한립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장천병을 관찰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에 한립은 방법을 바꿔보았다. 수결을 맺어 진언보륜을 동그란 구슬로 압축한 다음 작은 병 안으로 넣어 보았다.
장천병은 잠시 은은하게 주술문자를 빛내다 원래대로 돌아갔다. 미간을 찡그린 한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언화륜경이라는 시간법칙에 연관된 공법을 수련해서 진언보륜을 응결했으니까 그걸로 장천병을 조종하거나 무슨 변화를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소용이 없었다.
아직 수행이 너무 낮아서인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거원 꼭두각시를 불러내 그가 수련하는 동안 신비한 영액으로 영초들을 키우게 했다.
지기화신의 수련에 필요한 수정 알갱이는 수련 틈틈이 만들어 보내 지속적으로 중수를 공급받을 예정이었다.
불현듯 또 다른 밀실로 향한 한립은 영기를 모으는 소형 진법을 설치해 두고 방반에게서 구한 커다란 알을 중앙에 내려놓았다.
영기가 충만하면 부화를 할지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이런저런 안배를 마친 그는 밀실로 돌아가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조용히 3일이 흘러갔다.
화아앗!
평온함을 되찾고 최적의 몸 상태를 만든 그는 은은하게 금빛을 방출해 밀실을 가득 채웠다.
* * *
시간이 유수와 같이 흘러, 또 3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적하봉 상공에는 먹구름이 가득하고 천지영기가 동부를 중심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밀실 안, 금빛을 찬란하게 번쩍이는 한립의 배에 금빛 점 3개가 반짝이면서 농염한 천지영기를 삼키고 내뱉었다.
선규를 또 뚫은 것이다!
그의 등 뒤에 둥실 뜬 진언보륜에 여섯 개의 시간도문이 보였다.
웅웅!
진언보륜이 발산하는 시간법칙 파동은 시간도문이 4개 일 때보다 부쩍 강해져있었다.
한립은 즐거운 얼굴로 눈을 떴다. 선규를 뚫은 것도 좋은 일이지만 드디어 시간도문 6개를 응결한 것이 무척 기뻤다.
진언화륜경을 익히는 다른 수사들은 선규 12개를 다 뚫어야 겨우 이를 수 있는 경지였다. 공법 설명에 따르면 시간도문이 6개가 되면 진언보륜의 위력은 급상승했다.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해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식으로 진언보륜을 발동했다.
빠르게 회전하는 진언보륜에서 금빛 파문이 열 장 정도 퍼졌다.
“흠, 1성일 때는 시간도문의 개수와 상관없이 진언보륜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일정하게 10장 정도인 모양인데.”
눈을 감고 감응을 해보자 금빛 파문이 뒤덮은 범위의 공기 흐름과 천지영기 파동이 눈에 띄게 느려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명청영목을 발동한 그는 천지영기들이 10배는 또렷하게 보였고 감속현상이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 다채로운 빛깔의 천지영기들이 물방울처럼 서로 부딪쳤다 흩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느려지자 상대적으로 그의 동작이 배로 빨라져서 흐릿하게 사라진 그의 신형이 어느새 몇 장 밖에 나타나곤 했다.
그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공기 중에 일으킨 변화로 천지영기의 움직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눈에 들어왔다.
신기한 발견에 미소를 지은 그는 검은 액체 덩어리, 중수를 불러냈다.
펑!
손가락을 튕기자 중수 덩어리가 터져서 크고 작은 수많은 검은 물방울로 변해 도처로 튕겨나갔다.
한립은 마치 환영처럼 그 사이를 재빨리 누비고 다니면서 검은 물방울을 모아 다시 뭉쳤다.
상쾌하게 중수를 회수한 그는 아직도 시험해 볼 것들이 산더미였다.
파직!
손가락에서 은색 뇌전들이 튀어 올랐는데 이건 또 진언보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벽에 뇌전을 날려보고 다른 보물로 공격까지 해본 한립은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공격까지 느려지면 진언보륜을 발동하는 의미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머리를 굴리던 그는 바깥의 거원 꼭두각시를 불러들였다.
쿵쿵쿵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밀실로 들어온 꼭두각시는 진언보륜의 영향을 받아 아주 느릿느릿 움직였고, 발걸음 소리마저 따라서 쿠웅쿠웅 늘어졌다.
“나를 향해 공격을 해보거라.”
얼마 후 금색 파문 범위 밖으로 거원 꼭두각시를 옮긴 한립이 명령을 내렸다.
거원은 입을 벌려 굵은 남색 뇌전 기운을 발사하면서 손을 펼쳐 남색 뇌전 줄기 다섯 개를 날렸다. 위력은 강하지 않아도 꽤 빠른 공격이었다.
남색 뇌전 공격들은 금색 파문의 영향권에서 배로 느려졌다. 한립은 슬쩍 옆으로 비켜서서 뇌전이 그의 곁을 스쳐지나가게 했다.
그는 몇 번 더 실험해보고는 진언보륜의 기능을 거의 다 파악했다. 이런 신통을 제대로 활용만 하면 진선 후기의 고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진언보륜을 사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체내의 선령력이 거의 고갈되었다. 위력적인 신통인 것은 맞지만 그만큼 선령력 소모도 심했다.
그는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기운을 회복하고는 곧장 거원 괴뢰에게 장천병을 쥐어주고 같은 공격을 해보게 했다.
그러나 상황은 이전과 똑같았다. 이에 한립은 쓴웃음을 짓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련을 계속 이어나갔다.
* * *
봄과 가을이 수없이 오가고 스무 해가 넘는 세월이 지나갔다. 적하봉은 여전해서 다른 산봉우리들처럼 떠들썩한 기색이 없었다.
산봉우리를 가리고 있던 화독을 품은 붉은 안개도 씻은 듯이 사라져 기후도 원래대로 돌아와 금제로 가려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하얀 눈이 수북이 쌓였다. 티끌 하나 떨어지지 않은 하얀 설원이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안타깝게도 적하봉에서 이런 풍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직을 서는 이들은 맡은 구역을 순찰하기 바빴고 나머지 수사들은 거처에서 시간을 쪼개 수련을 했다.
적하봉 뒷산 공터에서는 바닥에 펼쳐진 붉은 진법에 박힌 수정돌들이 불꽃처럼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가운데 앉은 하얀 치마 소녀는 몽천천이었다. 진법의 힘을 빌려 수련하는 그녀는 화염 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작열하는 열기에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소녀는 모종의 비술을 수련 중이었다.
이십여 년간 외모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만 몽천천은 벌써 결단 후기에 이르렀고 그 빠른 성장 속도에 촉룡도 외문제자들도 무척 놀라워했다.
한립이 내준 단약과 몽운귀가 따로 떼 주는 영석 덕이 컸지만 그녀 스스로 굳은 결심을 하고 수련에만 전념한 것도 한 몫을 했다.
* * *
몽천천이 한창 수련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쿠릉! 하는 진동이 적하봉을 울렸다.
동부 상공에 먹구름이 들어차고 천지영기가 모여 거대한 영기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몽천천은 동그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는 반가운 눈빛으로 한립의 동부 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후 거의 30년 동안 주기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다들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손부정 등은 려 장로가 수행이 늘어날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몽운귀가 그런 일을 언급하는 것을 엄히 금지해 바깥으로는 절대 말이 새어나가지 않았다.
* * *
금빛이 찬란한 밀실 안.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립의 배에서 금빛 점 7개가 반짝였다. 마치 7개의 입이 숨을 내쉬고 뱉는 것처럼 천지영기들이 체내로 흘러들어 정순한 선령력으로 전환되었다.
자연히 천지영기를 흡수하는 속도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다. 그의 등 뒤에서 천천히 회전하는 금빛 고리에는 14개의 시간도문이 떠올라 있었다.
20년 넘게 수련해 파죽지세로 4개의 선규를 더 뚫은 한립은 희색이 가득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겨우 몇 십 년 만에 선규 7개를 뚫었다고 소문이 나면 금선경 수사들도 관심을 가질 게 틀림없었다.
가볍게 몸을 일으킨 그는 금색 고리에 또렷하게 응결된 시간도문 14개에서 강렬한 시간법칙 파동을 느꼈다.
진언보륜의 한층 강력해진 힘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이 인 한립은 바로 둔광으로 날아올랐다.
하늘의 이상 현상이 사라진 것을 본 몽천천은 천천히 호흡을 되돌리고는 눈을 감고 수련에 집중하려고 했다.
진법에서 붉은빛이 흘러들어 뜨겁게 온도를 높이자 소녀는 고통스러운 지 미간을 찡그렸다.
바로 그때 진법 옆에 한립이 나타났다.
그는 두말할 것 없이 소녀의 미간을 향해 손끝에서 푸른빛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몽천천은 몸을 바르르 떨며 붉은 기운이 싹 가신 얼굴로 눈을 떴다.
“려 장로님!”
옆에 서있는 몽천천이 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
“열심히 수련하는 것은 좋지만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서둘러서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는 법이다.”
한립은 담담히 조언을 해주었다.
동부를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몽천천이 주화입마의 징조를 보이는 것을 보고 지나는 김에 도움을 준 것이었다.
“예,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뺨이 붉게 달아오른 몽천천은 감정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숙였다.
“조만간 원영을 응결할 수 있겠구나. 그때가 되면 네게도 따로 임무를 줄 것이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끝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몽천천이 급히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 * *
적하봉 영지 내의 어느 산골짜기.
푸른빛이 내려와 그 속에서 한립이 나타났다.
그곳은 사면이 산으로 막혀 있어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어 새하얀 눈 대신 푸른 풀과 드문드문 자란 울긋불긋한 들꽃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폭포가 한 폭의 하얀 비단처럼 떨어져 진주알 같은 물방울을 튕기는 곳이었다.
폭포 주변에는 노란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이 몇 그루 자라 원숭이 떼가 그 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면서 끽끽 거렸다.
수십 마리의 원숭이들은 한립을 보고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한립은 원숭이들을 신경 쓰지 않고 금빛을 일으켜 진언보륜을 불러냈다.
고리에서 금색 파문이 퍼져나가 폭포 절반을 포함한 주변 열 장을 뒤덮었다.
파문이 이른 곳은 확연히 달라졌다!
콸콸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던 폭포는 한없이 느리게 떨어지고 튀는 물방울과 물안개도 서서히 이동했다.
감속 효과가 이전보다 세 배는 강력해졌다.
폭포 반절이 콸콸 흘러내리는 동안 진언보륜의 파문으로 뒤덮인 다른 반절은 얼어붙은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니 그 대비가 엄청났다.
곁에서 노닐던 원숭이들이 놀라서 끽끽 소리를 지르면서 흥분해 날뛰었다.
끽!
그때 다른 원숭이들 보다 두 배는 몸집이 크고 붉은 털을 지닌 원숭이 한 마리가 길게 울부짖으면서 멀리 뛰어갔다.
원숭이 떼의 왕 같았다. 다른 원숭이들도 왕을 따라 멀어졌다. 이에 한립이 손짓을 해서 달려가는 원숭이 한 마리를 날아오게 했다.
끼끼끼끽!
겁에 질린 짐승은 손발을 마구 휘저으면서 애달프게 울어댔다. 다른 원숭이들이 도와달라는 동료의 울음을 듣고 멈춰 다 같이 붉은 털 후왕(猴王)만 바라보았다.
눈빛이 남다른 후왕은 눈을 굴리다가 방향을 틀어 천천히 한립 쪽으로 걸어갔고 다른 원숭이들이 고분고분 그 뒤를 따라갔다.
한립에게 끌려간 원숭이는 금색 파문의 영역에서 손발도 세 배로 느리게 허우적거리고 울음소리도 길게 늘어져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원숭이는 겁에 질려서도 이게 뭔가 싶은 얼굴로 느리게 반응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숭이를 잡아다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물이 진언보륜의 영향권 내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확인하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끼기기…….
후왕은 원숭이 떼를 이끌고 와서는 바닥에 넙죽 엎드려서 사정하는 표정으로 한립을 올려다보았다.
“영리한 원숭이로구나. 네 족인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으니 안심해도 된다.”
한립은 손을 저어 끌어왔던 원숭이를 무리 속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손끝을 튕겨서 푸른빛을 수십 개로 나누어 원숭이들 모두에게 흡수시켰다.
푸른빛은 따스한 기운으로 변해 원숭이들의 전신을 타고 흘러들어가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파앗.
후왕인 붉은 원숭이만은 전신에 붉은 빛이 깜박이다 사라졌다. 멍하니 눈을 깜빡인 후왕은 이전보다 맑아진 정신에 무리를 데리고 한립에게 또 절을 올렸다.
폭포가 쏟아져 물안개가 낀 산골짜기 속에 원숭이 떼가 선인에게 절을 올리는 풍경은 한립이 보기에도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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