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6화. 역원석검(逆元石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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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두 산봉우리 중 낮은 곳 정상에 내려섰다. 그리 면적이 넓지 않아 편전과 누각이 몇 개 없었지만 세공이 뛰어나고 세련되어 보였다.
“장로님들을 뵙습니다! 태현전에서 임무를 보고 오셨는지요?”
청검봉 시종으로 보이는 백포 청년 하나가 재빨리 뛰어와 공손히 물었다.
“그렇네. 대신 고해주겠는가?”
“부도주님께서는 주봉에 계십니다. 저를 따라가시지요.”
기량의 물음에 백포 청년이 앞서 걸어갔다.
“이렇게 부도주께 알리지 않고 바로 안내를 해도 되겠는가?”
시종을 따라 구름다리를 건너면서 기봉이 질문을 던졌다.
“임무 때문에 장로님들께서 오시면 곧장 주봉으로 모시라는 어르신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청년의 답에 기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봉에 도착한 장로분들이 몇 분이나 계시지?”
이번에는 한립이 입을 열었다.
“벌써 스물일곱 분이 와계신 것으로 압니다.”
백포 청년이 신속하게 답했고 순간 기량의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임무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열 명뿐이었다.
“괜찮을 겁니다. 저희를 데려간다는 것은 아직 웅 부도주께서 누구에게 임무를 맡길지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요. 아마 먼저 왔다고 무조건 선발이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런 기량의 귓가에 한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하하, 이거 부끄럽습니다.”
최근에 급히 공적점이 필요했던 기량은 얼굴을 풀며 계면쩍어했다. 만 장 구름다리를 지난 세 사람 앞에 부봉보다 훨씬 드넓은 주봉이 펼쳐졌다.
정성들여 만든 궁전 안에는 화려한 누각과 정자 그리고 아름다운 화원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모든 건물들은 귀한 목재나 재료로 이루어져 있었고, 재료가 금색인 경우 휘황찬란하기 짝이 없었다.
백포 청년을 따라 백옥 대로를 일각 정도 걸어가니 손님을 위한 대청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먼저 도착한 이삼십 명의 사람들은 대청 왼쪽과 오른쪽에 둥글게 모여서 은근히 서로를 견제하는 분위기였는데, 왼쪽에 모인 십여 명은 여유 만만해 보이는 반면 오른쪽에 모인 이들은 안색이 약간 어두웠다.
한립과 기량이 들어서자 시선이 모였다가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장로라는 것을 알고는 금방 관심을 갖는 이가 적어졌다.
“허허, 기 형이 이번 임무를 놓치지 않을 줄 알고 있었습니다. 뭐 하다 이제야 오신 겁니까?”
구불구불한 수염을 기른 거한이 오른편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남 형처럼 소식이 빨랐으면 더 빨리 올 수 있었을 텐데요.”
기량도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저야 성격이 급해서 괜히 일찍 와서 계속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구불구불한 수염을 지닌 거한은 한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려 형이십니다. 몇 년 전에 입문한 내문장로로 적하봉에 기거하고 계시지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남 형.”
기량이 소개를 해주자 한립은 공수를 해보였다.
“아, 그러시군요. 어서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거한은 두 사람을 오른편으로 안내했다. 기량은 자리에 앉자마자 여러 장로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그중에는 한립도 아는 이들이 있어서 몇 마디 한담을 나누었다. 이에 대청 오른편의 분위기가 한층 살아났다.
대청 왼편의 수사들은 그들이 떠들썩해진 것을 보고 얼굴을 굳히거나 심지어 몇몇은 작게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한립도 왼쪽에 모인 이들이 내문제자로 시작해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거쳐 내문장로가 된 토박이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 중 적잖은 장로들은 촉룡도 내의 유서 깊은 집안 출신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 눈에 각종 기연으로 우연찮게 촉룡도에 입문한 산수 출신 장로들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첫째로 산수들의 실력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둘째로 외부 인사가 영입되면서 그들의 수도자원이 준다는 이유도 있었다.
겨우 촉룡도에 머문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은 한립도 암암리에 그런 무시와 적대적인 태도를 느끼고는 했다. 촉룡도 고위층은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갈등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경쟁을 장려했다.
경쟁이야말로 발전의 좋은 밑거름이었으니까!
한립은 대청 왼쪽을 살피다 서른 살쯤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시선이 닿았다. 금관을 쓰고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는 길게 찢어진 두 눈에서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냥 앉아 있는데도 군계일학과 같은 남다른 풍모가 느껴지는 이였다.
“만 년 전에 12개의 선규를 뚫어 진선경 중기에 이른 축봉 장로입니다. 검에 관한 공법을 익히고 낭사봉(琅邪峰)에 기거해 낭사검선(琅邪劍仙)이라고도 불리지요. 내문장로 중에 명성이 높은 자이니 이번에 모집하는 10명 중에서 한 자리를 받아낼 겁니다.”
기량이 옆에서 조용히 설명해주었다.
축봉은 오만한 성격인지 옆에서 누군가 수시로 말을 걸어와도 제대로 대답하는 일이 적었고, 오른편의 산선 출신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헛웃음을 흘린 한립도 곧 시선을 돌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반나절이 흐르는 동안 일고여덟 명의 장로들이 더 도착해 대청 안에는 거의 4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 후로 대략 한 시진이 더 흘렀을 때, 대청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땅딸막한 웅산이 진중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는 대청에 모인 장로들을 보고는 어느 정도 만족한 눈치였다.
“웅 부도주를 뵙습니다!”
대청의 수사들이 일어나 그에게 예를 취했다.
“되었으니, 다들 저를 따라가시지요.”
웅산은 손을 저어 인사를 받고는 휙 하니 몸을 돌려 대청 쪽문으로 향했고, 기다리던 수사들은 그를 따라 긴 회랑을 지난 끝에 연무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널찍한 연무장에는 바닥에 열 개의 거대 석검이 꽂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길이가 사람 키의 일고여덟 배는 되는 석검들은 검신이 매우 두껍고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검기와 비슷하지만 다른 기운을 내뿜었다.
석검들을 본 한립은 이곳으로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번 임무의 내용은 다들 아실 겁니다. 검에 정통한 수사 열 분이 저를 도와 법보를 제련해 주셔야 하는데 훨씬 많은 분들이 모이셨으니 시험을 통해 선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웅산이 바로 입을 열었다.
다들 짐작을 하고 있던 터라 놀라지 않고 토착 장로들과 기량 등 비토착 장로들 간의 미묘한 긴장감이 더 강해졌다.
“본종의 36명의 부도주 중 검수로서는 일인자인 웅 부도주님의 시험을 치를 수 있다니 얼마나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갑자기 축봉이 나서서 낭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만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만면에 웃음을 띠고 웅산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웅산도 축봉을 볼 때는 냉담하던 눈빛이 조금 풀어졌다.
“본좌가 준비한 시험은 간단합니다! 저기 보이는 석검들은 제가 독문비술로 제련한 역원석검(逆元石劍)이라 하는데 특수한 금제가 걸려 있어 어검술에 정통한 이들만 조종할 수가 있습니다. 한명씩 나와서 움직여 보시면 조종 가능한 석검의 개수에 따라 선발하겠습니다.”
나름 신선한 시험 방식이었다.
역원석검이라는 이름은 다들 처음 들었고 겨우 석검 열 개를 움직이는 게 뭐가 어려울까 싶었지만 웅산의 말에 많은 장로들이 눈치를 보며 먼저 나서기를 꺼렸다.
“려 형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기량도 불안한지 슬쩍 한립에게 다가가 전음으로 물었다.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겠지요. 아마 조종하기 쉽지 않을 거라 예상됩니다.”
침음하던 한립이 전음으로 답했다.
“마음에 차는 결과를 내는 열 명을 뽑을 것인데, 인원수가 차면 그대로 시험은 종료입니다.”
웅산은 장로들이 머뭇거리자 불쾌한 기색으로 냉랭히 덧붙였다. 그 말에 다들 표정이 달라져서 바로 대머리 내문 장로 한 명이 석검 쪽으로 걸어갔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웅산은 그를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려 형께서는 언제 시험에 응하실 생각입니까?”
“급할 것 없습니다. 웅산 부도주가 말한 ‘마음에 차는 결과’가 무엇일지는 본인만이 알 테니까요! 이렇게 많은 장로들이 모였는데 그도 끝까지 시험 결과를 보고 가장 적합한 수사를 고르고 싶을 겁니다. 우선 몇 사람이 하는 것을 관찰해 보시지요.”
“좋은 의견이십니다!”
몇몇 장로들도 한립과 비슷한 생각인지 여유로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먼저 나선 대머리 장로가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고 하얀 빛을 일으켜 뼈가 시릴 것 같은 냉기를 발산했다.
웅!
눈부신 빛은 눈처럼 새하얀 검 허상으로 뭉쳐 허공에 아름다운 눈송이를 뿌렸다. 한립은 대머리 장로의 어검술이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검기만으로 수증기를 얼려 눈송이를 응결해 냈으니 극도로 정교함을 지닌 수법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라!”
검결을 맺은 대머리 장로가 거검을 가리켰다.
머리 위로 떠오른 거검에서 새하얀 검기가 갈라져 나와 석검 중 하나로 스며들었고, 처음 만들어낸 거검 허상은 크기가 약간 줄었다.
웅!
하얀빛이 돌기 시작한 석검 표면의 문양이 검은색으로 번들거리다 빠르게 빛을 반짝였다. 마치 검신에 검은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석검의 새하얀 빛은 천적을 만난 것처럼 대부분이 흩어졌다. 이에 대머리 장로는 서둘러 검결을 고쳐 거검 허상에서 다시 더 큰 검기를 날려 보냈다.
석검 표면의 검은빛이 요란하게 반짝였지만 이번에는 하얀빛도 바로 흩어지지 않고 버텨냈다.
“떠올라라!”
눈에 힘을 준 대머리 장로의 외침에 거대 석검이 덜덜 떨면서 천천히 떠올랐다. 일단 날아오르게는 했는데 석검 표면의 검은 빛은 그대로라 더 격렬히 요동치고 있었다.
표정이 어두워진 대머리 장로는 연달아 수결을 맺어가며 바쁘게 손을 놀려 겨우 검을 안정화시켰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그는 다음 석검을 바라보았다.
지켜보던 다른 장로들의 표정이 신중해졌고, 두 눈에 남색빛을 드리우고 석검을 관찰하던 한립은 뭔가를 알아챈 듯했다.
대머리 장로는 쉬지 않고 검결을 맺어 거검 허상에서 하얀 검기를 분리해 두 번째 석검에 흡수시켰다.
두 번째 석검이 한참 만에 서서히 떠올랐을 때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중상이라도 입은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이를 악문 대머리 장로가 힘겹게 세 번째 석검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여기까지가 한계였는지 간신히 허공에 띄워놓은 두 석검들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전력으로 두 석검을 안정시키면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어검술을 펼쳤다.
웅!
처음보다 크기가 부쩍 줄어든 거검 허상에서 검기들이 갈라져 세 번째 석검으로 스며들었다. 하얀빛을 머금은 세 번째 석검 표면에 동시에 검은 빛이 맹렬히 일어났다.
쿠쿵!
세 번째 석검의 하얀 빛이 갈라져 터져나가고 연달아 허공의 두 석검들이 떨어져서 바닥에 깊게 박혔다. 대머리 장로는 가쁘게 숨을 고르며 실망스런 눈빛을 보였다.
“석검 두 개.”
웅산은 담담히 입을 열며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장로들은 말이 없었고 대머리 장로는 웅산의 반응에 기분이 가라앉아 옆으로 비켜섰다.
“이번에는 제가 도전해 보겠습니다!”
짙은 눈썹에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젊은 장로가 무리에서 나와 바로 붉은 기운을 일으켰다.
쉬쉬쉭!
수많은 검기들이 튀어나가 거대한 붉은 연꽃을 이루고 그를 둘러쌌다.
웅!
밝게 빛난 연꽃 중심에서 붉은 파문이 쏘아져 나가 첫 번째 석검으로 흘러들어갔다. 붉은빛이 떠오른 석검은 이번에도 검신의 문양에서 검은빛이 반짝이며 새로운 기운에 저항했다.
‘이래서 역원석검이라 이름 붙인 것이었어!’
“려 형, 뭐라도 알아내셨습니까?”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기량이 전음을 보내왔다.
“제가 제대로 본 것이 맞다면 석검의 문양이 결코 단순한 금제는 아닐 겁니다. 검을 부리려는 사람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이면서 술법을 방해하고 있어요.”
그들이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적발 청년은 연이어 두 개의 석검을 들어 올렸지만 몸을 감싼 붉은 연꽃이 벌써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웅!
세 번째 석검으로 붉은 파문이 날아갔다. 석검은 부들부들 떨며 떠오를 것처럼 하다가 표면의 검은 빛이 다시 공명을 하면서 밝은 빛을 뿜어냈다.
쿠쿵!
허공의 두 석검이 통제를 잃고 추락했다.
“석검 두 개, 다음 분.”
연무장에 웅산의 목소리가 울렸다. 붉은 연꽃을 흩어버린 적발 청년은 아쉬운 얼굴로 옆으로 물러났다.
‘보아하니 세 번째 석검을 움직이는 것이 고비인 것 같은데…….’
세 번째로 나선 수사는 겨우 석검 하나를 간신히 움직이고 부끄러운 낯으로 물러났고 이어서 네 번째, 다섯 번째 장로들이 도전을 했다.
여덟 번째 도전자까지 다들 세 번째 석검의 장벽을 깨트리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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