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5화. 태현전(太玄殿)
*
4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적하봉 상공에 먹구름이 끼고 천지영기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어 커다란 영기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꽤 오래 유지되던 이 현상은 폭음과 함께 먹구름이 터지면서 오색찬란한 점들로 흩어지고 재빨리 종적을 감추었다.
동부 밀실에 앉은 한립은 퍽 기분이 좋아보였다.
배에 두 개의 금빛 점이 반짝이고 있어서였다!
겨우 7년 동안 두 개의 선규를 뚫다니, 이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촉룡도의 수많은 수사들이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난해하기 짝이 없다는 진언화륜경을 통해서 이뤄낸 성과였다.
일단 진선경에 이른 후에는 수행을 높이는 것이 극도로 어려워서 선규 하나를 뚫는 것도 수백수천 년이 걸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한립은 두 번째 선규가 뚫리자 스스로 놀라면서 영환계에서 소북두성원공을 익힐 때를 회상했다.
별빛의 힘을 빌려 7개의 현규를 뚫음으로써 진극체에 이르러 현선이 되었었다.
소북두성원공은 냉염노조가 북한선역에서부터 하계로 전수한 것이라고 하니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한립은 깊게 파고들지 않고 두 번째 선규를 느꼈다.
‘설마…….’
그런데 장장 반 시진 만에 눈을 뜬 그의 눈빛이 어딘가 이상했다. 몸에 은은한 빛을 일으킨 그의 등 뒤로 진언보륜이 떠올랐는데 또 시간도문이 두 개나 늘어 있었던 것이다.
기쁘면서도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앞으로도 선규를 뚫을 때마다 2개의 시간도문을 응결할 수 있다면 진선경 초기의 선규 12개를 뚫어 24개의 시간도문을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한립은 시간도문 4개가 웅웅 진동하면서 상호간에 공명을 일으키는 것을 감지했다. 진언보륜에서 금빛이 퍼져나가 이전보다 밝은 금빛 파동이 열 장 범위를 감쌌다.
시간도문이 4개로 늘었어도 여전히 효과는 미미했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언보륜을 체내로 숨긴 그는 일어나서 밀실을 나서려다 미간을 좁혔다.
진언화륜경 수련이 무척 잘 되어가고는 있었는데 4년 동안 청죽봉운검의 행방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종명산맥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단서를 찾을 수 없자 그도 슬슬 조급해졌다.
휙!
바로 그때, 바깥에서 하얀 빛의 전음부가 날아들었다. 한립은 눈썹을 꿈틀하며 전음부를 잡아다 의식을 주입하고는 동부를 걸어 나왔다.
동부 앞에 몽운귀와 내문장문 복색을 한 각진 얼굴의 중년 남자, 기량이 서있었다.
“려 수사, 수련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기량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 형께서 오셨군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상대를 동부 안으로 초대한 한립은 몽운귀에게 차를 내오게 했다.
기량도 산수 출신인데다 한립이 촉룡도로 입문할 때 안내해준 인연으로 두 사람은 자주 왕래했지만 기량이 그의 동부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시종들이 10명밖에 없는데도 동부와 장원이 아주 깔끔합니다!”
기량은 한립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하, 부끄럽습니다! 누추하기만 한걸요.”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동부 안 대청은 탁자와 의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예전에 가본 기량의 동부는 황실 궁전처럼 내부 장식이 사치스럽고 화려해서 그의 동부와는 거의 하늘과 땅 차이였다.
“허허, 우리같이 진선의 수행에 이르면 사소한 것에 초연해지기 마련이지만 려 형께서 오로지 수련에만 집중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감탄스럽습니다.”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주신 데는 이유가 있으실 텐데 용무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아, 저는 태현전(太玄殿)에서 오는 길입니다! 웅산 부도주가 오늘 임무를 하나 발표했는데 아직 모르고 계실 것 같아서요.”
기량은 약간 들뜬 것 같아 보였다.
태현전이 촉룡도에서 임무를 등록하거나 수락하는 곳이란 것은 한립도 알았지만 그간 수련과 청죽봉운검 수색에 바빠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었다.
“웅산 부도주께서 발표한 임무가 무엇인데 기 형께서 이리 기뻐하시는지 듣고 싶군요.”
한립은 작고 뚱뚱한 웅산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비검에 정통한 진선경 수사 10명을 모집해 법보 제련을 보조하는 임무인데, 제련만 무사히 마치면 10명 모두 아주 후한 공적점을 받을 수 있답니다.”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낮춘 기량은 다섯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50점이나요?”
“허허, 무려 5백 점입니다! 려 형이 비검술에 정통한 것이 생각나서 함께 가려고 찾아왔지요.”
이제 기량만큼이나 한립도 흥미가 생긴 표정이었다.
아직 임무를 수행할 마음이 없어 태현전에 가보지 않았어도 공적점 500점이면 몹시 후한 보상이었다.
“이렇게 높은 공적점이 걸렸는데 위험하지도 않은 임무는 정말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비검을 익힌 장로들은 거의 다 신청하러 갔지요. 려 형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 형께서 친히 찾아주셨는데 거절할 도리가 있나요.”
할 일이 많기는 했지만 기량이 직접 찾아왔는데 면전에서 거절하기도 어렵고 공적점 500점이면 확실히 매혹적인 조건이었다.
한립은 바로 동부를 나서며 몽운귀에게 적하봉을 잘 돌보라 말해두고 기량과 함께 날아올랐다. 멀어지는 두 둔광을 몽운귀는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태현전은 경운봉(警雲峰)이라는 산봉우리 위에 있었다.
붓처럼 우뚝 솟은 경운봉은 반질반질한 절벽이 계속돼서 원숭이도 정상까지 기어 올라갈 수 없었는데, 산봉우리 정상을 뒤덮은 상서로운 일곱 빛깔 구름이 광채를 뿌려 천 리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
상서로운 구름 위에 위치한 태현전은 새까만 벽에 기와가 덮인 거대한 건물이라 구름이 그 무게에 푹 꺼지지 않는 게 더 신비롭게 다가왔다.
태현전 앞에 위치한 넓은 광장에는 천룡, 채봉, 백호, 현무 등 짐승 조각상이 올라간 열댓 개의 돌기둥이 솟아 있었다.
탁 트인 하늘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태현전 앞 광장은 촉룡도에서 가장 붐비는 곳 중 하나로, 이곳에 위치한 임전각에는 수많은 수사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원칙적으로 이곳에는 내문제자 뿐만 아니라 외문 제자들도 올 수 있었지만 대체로 보이는 이들은 내문제자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때 하늘 끝에서 날아든 한립과 기량이 광장에 내려섰다. 주변에 있던 제자들은 그들의 장로복장을 보고 공손하게 양쪽으로 물러나 길을 내주었다.
한립은 그들을 살펴보고 내심 촉룡도의 저력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대충 보아도 원영기 이상이 대부분인데다 합체기, 대승기 수사들도 넘쳐났다.
지금 태현전에 들른 수사들만 모아도 영계의 어떤 세력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전력이었다.
기량은 이런 광경이 낯설지 않은지 큰 보폭으로 태현전으로 향했고 한립도 그를 따라갔다.
대전으로 들어서자 순간 눈앞이 환해지며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10배는 넓은 내부공간이 드러났다.
‘공간법칙류의 금제가 펼쳐져 있는 건가?’
한립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기량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대전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석벽 3개였는데, 하얀색, 파란색 그리고 어두운 금색 벽들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었다.
대전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하얀 벽이 있고 중앙에 파란 벽 그리고 가장 안쪽에 어두운 금색 벽이 위치했다.
색깔은 달라도 3개의 벽에는 전부 임무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하얀 벽에서 어두운 금색 벽으로 갈수록 임무의 수가 적어졌다.
“3개의 석벽에 적힌 임무는 난이도가 다릅니다. 하얀 벽의 임무는 가장 쉬워서 화신기 이하의 수사들에게 적합하고, 파란 벽의 임무는 연허기 이상의 수사들에게 걸맞지요. 가장 안쪽의 금색벽에는 우리 같은 진선경 수사들을 위한 임무가 적혀 있습니다.”
기량은 간단하게 설명해주면서 바로 어두운 금색 벽 앞으로 갔다.
대전 안의 수많은 수사들 중 대다수가 하얀 벽과 파란 벽 근처에 몰려 있었고 안쪽의 금색 벽 앞에는 진선경 장로 몇 명만이 서있었다.
한립은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지만 기량의 인맥은 확실히 넓어서인지 먼저 와있던 장로들이 그를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소개할 분이 있습니다. 이쪽은 몇 년 전에 새로 입문을 한 려비우 수사인데, 적하봉에 머물고 있지요. 자, 이 이분들은…….”
기량이 자연스럽게 한립과 장로들을 소개시켰다.
한립은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석벽으로 시선을 돌린 반면 기량은 다른 장로들과 웃고 떠들면서 사교적인 모습을 보였다.
벽면의 임무는 몇 개 되지도 않았고 한눈에 보기에도 간단하지 않으면서 보상도 공적점 수십 점인 경우가 많았다.
공적점을 쌓는 게 예상보다 어려울 것 같아 한립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진언화륜경 2부 공법을 보려면 9천 점이 필요했는데 얼마나 많은 임무를 수행해야 모을 수 있을지 갈 길이 막막했다.
석벽에는 하얀색 글자로 표기된 다른 임무와 달리 붉은색의 특수 임무들도 있었다.
이런 특수 임무들은 높은 보상이 주어져서 임무를 수행하면 적게는 8백 점에서 많게는 1천 점까지 얻을 수 있었지만 난이도가 굉장히 높고 위험천만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공적점이 가장 적은 임무가 진선경 최고봉의 풍화리(風火狸)를 죽여 완전한 시체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풍화리라면 한립도 경전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무리지어 사는 요수로 고운대륙 북극 지방에 출몰하며 태어나자마자 화신기 실력을 지니는 데다 바람과 불의 신통을 동시에 부리고 성체가 되면 합체기 수사에 맞먹는 기운을 지녔다.
그 중에서도 진선경 최고봉의 수행을 지닌 것들을 풍화리왕으로 불렸다.
직접 진선경 후기의 문어 괴수를 만나본 한립은 자신이 떼 지어 달려드는 풍화리들 속에서 풍화리왕을 죽일 실력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른 임무들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심란해졌다.
들어가면 열에 아홉은 죽어나갈 만한 위험한 지역에서 거의 멸종된 재료를 구해오거나 아니면 거의 금선경에 이른 악명이 자자한 사선(邪仙)을 추격해 죽이는 임무도 있었다.
쓴웃음을 지은 한립은 그저 안목을 넓히는 셈 치면서 임무들을 훑다가 붉은색으로 적힌 임무 중 하나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부연설명 없이 ‘<진언화륜경>을 2성까지 수련하라’는 몇 글자가 다였고 보상은 공적점 5천 점에 달했다!
한립의 눈동자에 의심이 어렸다.
‘아무 조건 없이 진언화륜경 2성을 수련하면 바로 공적점 5천 점을 준다고?’
지금의 수련 속도로 보면 다른 촉룡도 수사들은 몰라도 그에게는 어려운 임무가 아니었다. 공적점 5천 점은 끌렸지만 그걸 받게 되면 무궁무진한 관심과 성가신 일들도 감수해야했다.
최소한 그가 원하는 한적하게 수련에만 집중하는 생활은 물 건너갈 것이다. 한립은 재빨리 그 임무에서 시선을 떼고 붉은색 임무 밑이 하얀색 임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일반 임무들 중에 기량이 언급한 웅산 부도주가 발표한 모집 공고는 단연 눈에 띄었다. 보상이 공적점 500점이나 되어서였다.
“어떻습니까? 제가 말씀드린 그대로지요?”
어느새 다가온 기량이 옆에서 웃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럼 얼른 임무를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발 늦어 인원이 다 차면 낭패일 테니까요.”
기량이 장로영패를 꺼내들자 모집 공고에서 빛이 흘러나와 스며들었고, 그걸 본 한립도 영패를 꺼내 임무를 받았다.
그러자 영패에 정체 모를 그림이 추가되었다.
한립은 더 이상 태현전에 머물지 않고 촉룡도 사정을 꿰고 있는 기량을 따라 임전각에서 전송진을 이용해 반나절을 날아 또 다른 산봉우리로 향했다.
천지영기가 한립의 적하봉보다 훨씬 짙은 은은한 금빛으로 반짝이는 광석으로 이루어진 높다란 산봉우리였다.
멀리서 보면 금색 거검이 구름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산 위에 지어진 궁전은 금빛에 둘러싸여 있어 신비로웠고 그 옆의 조금 낮은 산봉우리에도 궁전 양식의 건물들이 여럿 보였다.
두 봉우리는 기다란 금빛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이 웅 부도주의 동부가 위치한 천검봉(天劍峰)입니다.”
“듣던 대로 장관입니다!”
“장관이기는 한데, 웅 부도주가 워낙 팍팍한 성격이라 주봉(主峰)으로 바로 갈 수 없고 옆의 부봉(副峰)에서 사람을 시켜 고해야 주봉으로 가서 그를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기량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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