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2화. 운 좋은 녀석
*
한립이 하루 만에 다시 찾은 것을 보고 방전은 고서를 내려놓고 차로 목을 축인 다음 웃음을 지어보였다.
“려 장로, 오셨습니까?”
“예, 방 장로님. 또 뵙습니다. 제가 어째서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왔는지는 아시겠지요?”
“허허, 무상진륜경 공법을 구해간 이들은 보통 7일내로 다시 전공전을 찾곤 합니다. 려 수사께서는 빨리도 오셨군요.”
“그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빙빙 말을 돌리지 않는 방전을 보고 한립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무상진륜경은 내용이 워낙 난해해서 해설이 담긴 주해경(注解經)의 도움 없이는 수련은커녕 구결 자체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무상진륜경을 가져가 살펴본 이들은 다른 공법을 구하러 오거나 아니면 주해경을 찾아 돌아오곤 하지요.”
“그런 물건이 있었으면 어제 언질을 주시지 않으시고요?”
“예전에는 저도 주해경이 있으니 그것도 같이 가져가야할 거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은 겨우 대승기 수사인 제가 하는 충고를 무시하기 일쑤더군요. 그 뒤로는 어차피 머지않아 스스로 깨달을 일에 굳이 말을 보태지 않게 되었습니다.”
방전은 빙그레 웃었다.
“듣고 보니 방 장로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주해경은 공적점이 얼마나 있어야 구할 수 있겠습니까?”
“더도 덜도 말고 딱 10점이면 됩니다. 어차피 이전에 공법을 수련해보던 여러 수사들이 남긴 해설을 모아 놓은 것이라 구체적으로 수련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거든요.”
“좋군요, 교환하겠습니다.”
한립은 오래 고민 하지 않고 장로 영패를 건네주었다. 공적점을 제하고 주해경 복제본을 받은 그는 방전과 몇 마디 한담을 나누다 적하봉으로 돌아갔다.
그는 동부로 돌아오자마자 바람같이 밀실에 들어앉았다.
주해경을 붙들고 또 한 나절을 보내고 나서야 한립은 무상진륜경 1부의 구결을 어느 정도 깨우칠 수 있었다.
무상진륜경의 본명은 원래 <진언화륜경(眞言化輪經)>으로 공법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련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첫 관문인 진언보륜을 응결하는 것에서부터 열에 아홉은 나가떨어졌다.
1할에 불과한 나머지 수련자들도 운 좋게 진언보륜을 응결하고도 기껏해야 2성 공법을 익히는 것이 다였고, 진정으로 시간법칙을 깨우쳐 법칙의 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법칙의 실을 응결해낸 경우는 없었다.
적어도 전해지는 바로는 촉룡도 내에서는 아무도 공법을 3성까지 익힌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수많은 수사들이 실망 끝에 진언보륜을 응결하는 첫 관문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는데, 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로 진언보륜 비슷한 보물을 만든 다음 특수한 주술문자를 새겨 넣어 비슷한 신통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정통적 방법과는 달리 이런 방식으로 제련된 진언보륜은 공격의 속도를 줄이는 효과가 미미한 대신 재료가 지닌 법칙 속성에 따라 다른 신통을 펼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금속 법칙을 지닌 재료로 진언보륜을 응결하면 보물의 날카로움을 크게 증가시켰고, 속도 법칙을 지닌 재료로 응결하면 공격 속도를 몇 배로 높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화염신통, 환술신통, 냉각신통 등 대부분 속성이 이 방법으로 증폭되었다.
그 뒤로 이 공법을 수행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두 번째 방식을 택했고 이름도 진언화륜경에서 무상진륜경으로 바꾸어 불리게 되었다.
한립은 숙고하면서 해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 * *
며칠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촉룡도 동부의 어느 외진 골짜기는 인근에 종문의 시험장소인 용설삼림이 있어 평소에는 드나드는 이가 거의 없었다.
골짜기 내에서 자라는 소나무들은 두꺼운 눈에 뒤덮여 멀리서 보면 새하얀 설탑(雪塔)들이 들어서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골짜기 안에서는 수시로 천둥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 굉음에 얼마나 오랜 세월 쌓여 왔는지 모를 빙설들이 와르르 쏟아져서 산사태가 일기도 했다.
이때 골짜기 상공에 둔광이 멈추었다. 그 안에는 내문장로 복색을 한 한립이 들어 있었다.
콰릉!
천둥소리가 들리는 곳을 본 그는 거대한 은색 뇌전 기둥이 치솟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로구나.’
보랏빛 태일화청부를 든 그의 신형이 흐릿하게 변하다 사라졌다.
골짜기 깊은 곳 불룩하게 튀어나온 절벽 암반에서 마른 체형의 새까만 청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형형하게 눈을 빛내고 있는 청년은 한립이 며칠 전 환수원에서 만난 엽풍이었다. 은색 뇌전을 휘감고 앉은 그는 강력한 뇌전 비술을 익히는 중인 듯했다.
콰르릉!
뇌전들이 뻗어나가 수백 장 범위의 초목과 눈 사이로 드러난 암석들을 새까맣게 태워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핫하하…….”
뇌전의 위력이 또 상승한 것을 느낀 새까만 청년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웃음소리가 중간에 뚝 끊기고 청년은 저주에 걸리기라도 한 듯 뻣뻣하게 굳어 정신을 잃었다.
자연스레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뇌전도 파칙 하고 사라졌다.
팟!
이때, 청년 앞 허공에 기이한 파동이 일고 한립의 신영이 나타나 검지와 중지를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는 엄청난 남색빛을 내뿜어 추혼술로 청년의 기억을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환수원에서 엽풍을 만났을 때 한립은 은밀히 의식 표식을 심어 두었다.
며칠간 무상진륜경을 공부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새까만 청년도 자신의 동부에서 움직임이 없어 놔두었다가 오늘 외딴 곳에서 뇌전 신통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찾아온 것이었다.
추혼술을 하는 동안 한립은 심각해졌다 놀랐다하며 시시각각 표정이 변했다. 잠시 후 엽풍의 이마에서 손을 뗀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운이 좋은 녀석이구나. 과거의 일에 네 책임은 없으니 해치지는 않겠다만 네 것이 아닌 것은 가져가겠다.”
한립은 옆풍의 팔목에서 저물탁을 꺼내 안에 든 것을 살피고 품에 챙겨 넣었다.
잠시 뒤, 빛줄기로 변한 그는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엽풍은 정신을 차리고 왠지 쓰라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다 문득 텅 비어 있는 자신의 손목을 발견하고서야 허둥지둥 일어나 미친 듯이 의식을 퍼트렸다.
“안 돼……!”
눈 덮인 골짜기에 절망에 빠진 청년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 * *
바로 거처로 돌아온 한립은 밀실에 가부좌를 하고는 저물탁을 꺼내 주먹 크기의 금색 구슬을 꺼내들었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구슬은 명청령안으로 보자 극도로 정밀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구슬에서 무척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구슬을 쥔 한립은 미간에서 의식의 수정실을 내뿜었다.
웅!
수정 실이 녹아든 금색 구슬이 진동하면서 밝은 빛을 뿜어냈다. 주술문자를 품은 금빛의 휘황찬란한 광채가 점점 뭉쳐져 손바닥 크기의 금색 게로 변해갔다.
“해 도인.”
황금 게를 본 한립이 작게 불러보았다. 밀실 안은 적막했는데 그의 의식 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 수사군요……. 드디어 저를 찾은 겁니까?”
의식 교류로 전해오는 해 도인의 목소리는 희미했고 드문드문 끊기기도 했다.
“해 도인, 3백 년 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십니까? 어째서 이 지경이 된 것입니까?”
한립은 감정을 다스리면서 차분히 물었다.
“아, 벌써……. 3백 년이 흘렀단 말입니까…….”
힘없이 답한 해 도인은 처음보다는 안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나중에는 주먹을 꽉 쥐어서 푸른 힘줄이 불끈 튀어 나왔다.
알고 보니 그는 방반 등 세 명의 적에게 매복을 당하기 전에 또 다른 강적을 만났었다.
경지가 훨씬 높은 상대는 해 도인과 그의 72자루 청죽봉운검을 가볍게 봉인해 버렸고 서금충왕과 마광 등이 필사적으로 저항한 덕에 중상을 입은 채 그만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다.
마광과 서금충왕이 힘을 합쳐 잠시 적을 붙들어 두는 동안 해 도인은 선괴뢰 육체를 자폭해 봉인을 풀고 괴뢰핵심과 청죽봉운검만을 챙겨 달아났다고 했다.
“……최선을 다해 달아나던 중 핵심에 남아있던 영력마저 바닥이 나서 비검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검들이 알아서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의식을 잃어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오늘에서야 깨어난 것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흠, 해 도인께서 변한 핵심을 누군가 주워 촉룡도 인근의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연기 재료를 구하러 나온 촉룡도 내문제자가 그것 구입했고 나중에 우연히 표면에 은밀하게 새겨진 문양을 발견해 위력적인 뇌문비술을 깨우쳐 수행이 크게 늘었지요! 인연이 닿은 것인지, 제가 그 내문제자를 만나 익숙한 뇌전 비술을 알아보고 수사를 찾아내게 된 겁니다.”
한립은 탄식을 하듯 그간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하아, 그런 일도 다 있군요!”
해 도인도 감개무량한 것 같았다.
“원래는 수사가 언급한 강적과 그 내문제자가 연관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그냥 운 좋은 녀석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당시 매복했던 적들 중 둘을 죽여 그들 배후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는데 아마 해 도인이 말씀한 강적과 일치하는 듯합니다. 아쉽게도 상대의 신분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요. 그 자의 인상착의나 신분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으십니까?”
한립의 질문에 황금 게는 집게발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고개를 흔드는 모습이 어딘지 고통스러워보였다.
“……어째서인지 기억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대략적인 윤곽만 기억나고 어떻게 생긴 자였는지 떠오르지가 않아요.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선령력이 수사보다 월등히 많았고 벼루 형태의 선기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역시 그렇군요. 해 도인뿐 아니라 저와 마광 수사도 기억을 잃었습니다. 300년 간의 기억을 모두요.”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닌 듯싶습니다.”
해 도인도 걱정스러워했다.
“추측이지만 청죽봉운검도 종명산맥 어딘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 해 도인을 만났으니 꼭 새로운 육체를 제련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물론 이전의 수준으로 기운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영계에서 저와 한 약속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어느 정도 수행에 이르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지요.”
한립의 대답에 해 도인도 더는 아무 말하지 않고 동그란 구슬로 돌아갔다.
한립은 해 도인이 변한 금색 구슬을 넣어두고는 침음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지만 여전히 적들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민을 털어버렸다. 상대가 누구든 그를 이 지경으로 내몬 자라면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방반도 자신을 찾아냈으니 그보다 강한 배후는 더더욱 한립을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신속히 실력을 키워 이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중요하게 처리해야할 일이 있었다.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검은 진법원반인 성이자모반을 불러냈다. 촉룡도에 도착한 이후 흑풍해역과 너무 멀어져서 진법원반을 통한 연계도 미미해지고 중수 전송은 꿈도 꿀 수 없어졌다.
이렇게 되면 지기화신의 수련에 중대한 영향을 받게 되고 그의 필살기인 중수문뢰 제련에도 차질이 있었다.
평범한 장포로 옷을 갈아입은 그는 푸른 가면을 썼다. 성이자모반은 무상맹에서 구한 것이었으니 문제 해결도 무상맹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물건을 원거리에서 전송하는 것은 영계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선계에서는 그리 신비로운 물건도 아닌 듯 했다. 그 이유는 법칙의 힘 때문이었다.
이런 류의 보물들은 공간의 힘을 함유한 재료로 제련이 되어서 공간법칙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이 분명했다. 가면에서 부드러운 푸른빛이 흘러나와 푸른 화면을 만들어냈다.
한립이 손끝으로 건드리자 화면에서 푸른 깃털 옷에 호랑이 가면을 쓴 사내의 허상이 튀어나왔다.
“수사는……? 아, 생각났습니다. 일전에 성이자모반을 사간 분이군요. 물건은 잘 쓰고 계십니까?”
호랑이 가면 사내가 한립을 알아보고 웃음 지었다.
“그럭저럭 쓰고는 있습니다.”
“그래요?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미적지근한 대답에 호랑이 가면 사내가 다시 물었다.
“설명대로 물건을 전송하는 기능은 합니다만, 거리에 제약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압니다.”
한립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아이쿠, 제가 깜빡깜빡해서 그 설명을 빼먹었나 봅니다. 성이자모반은 작은 대륙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전송이 가능하고 그 거리를 넘어서면 공간의 힘에 영향을 받아 전송능력이 떨어지거나 실효됩니다.”
호랑이 가면 사내는 자신의 이마를 탁 쳐가며 미안한 척 연기를 했다.
“됐습니다, 오늘 연락을 드린 것은 성이자모반의 전송거리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묻고 싶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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