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1화. 진언화륜경(眞言化輪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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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단히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온도도 상승했고 통로도 점점 넓어져 이제는 나무 한 그루를 데굴데굴 굴려도 될 만큼 공간이 넉넉해졌다.
정염불새를 따라 날아가던 한립은 통로 벽에 남겨진 인위적인 흔적을 바라보았다.
“화련장로가 남겨 둔 것인가…….”
호칭에서 알 수 있듯 십중팔구 불 속성 공법을 수련했을 화련장로는 이곳의 불 속성 기운이 농염한 것을 보고 폐관하기 좋은 장소라 여겼을 것이다.
폭포 금제로 골짜기와 동굴을 감춰둔 것도 그일 가능성이 높았다.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둔탁한 소리가 점점 커져 마치 수많은 천둥소리가 합쳐진 것 같았다.
정염불새는 돌연 배로 속도를 높였고 한립도 빠르게 그 뒤를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천 장에 이르는 붉은 불의 세계가 펼쳐졌다.
거대한 종유동굴에 거꾸로 매달린 종유석들은 화염으로 뒤덮여 활활 타올랐고 아래쪽에는 용암호수가 자욱한 붉은 안개를 내뿜고 있었다.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마다 기포가 퍼지면서 천둥 같은 소리를 내었다. 주먹 크기의 새빨간 빛구슬들이 기포 속에서 떠올라 주변으로 흩어졌다.
“화정(火精)!”
한립의 얼굴이 환해졌다.
지하 동굴을 가득채운 붉은 빛과 화염은 현천의 육체를 지닌 그조차 목이 마르고 피부가 건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뜨거운 호수의 바람이 불어올 때면 피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기도 했다. 불가사의한 열기에 정염불새는 더없이 흥분해 날뛰고 있었다.
은백색 그림자로 변해 공간을 누비면서 부리로 콕콕! 화정들을 잡아 삼키더니 심지어 용암호수로 뛰어들어 헤엄을 치다가 다른 곳에서 불쑥 튀어 오르기도 했다.
불새는 물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상쾌해 보였다. 지켜보던 한립은 눈썹을 꿈틀했다.
지하 화맥은 그의 예상보다 풍부해서 정염불새가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대로는 뭔가 부족했다.
쉬쉬쉬쉭!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소매를 펄럭여 수백 개의 붉은 깃발들을 용암호수 상공으로 날렸다.
웅!
중얼중얼 주문을 외고 법결들을 날리자 깃발들이 빛을 방출해 새빨간 거대 진법을 형성했다.
정염불새도 주인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희색이 가득한 얼굴로 진법 중앙으로 날아들었고, 지하공간의 화염의 힘들이 몰려들어 불새를 겹겹이 에워싸고 커다란 고치처럼 만들어 버렸다.
허공을 박찬 한립은 지하 동굴 모처의 벽으로 이동해서 새빨간 거대 붓을 꺼내 빠르게 휘갈겼다. 수많은 거대 주술문자들이 날아올라 불꽃 문양을 만들어냈다.
이어서 그는 다른 벽으로 가서 똑같이 불꽃 문양을 남겼다. 빠르게 완성된 여덟 개의 불꽃 문양들이 날아가 거대한 붉은 고치를 둘러쌌다.
우웅!
눈부신 빛을 방출한 불꽃 문양들이 또 다른 거대 진법을 형성해 다른 진법과 공명을 했다.
쿠쿠쿵.
지하공간에서 더 많은 화염의 힘이 솟아올라 고치 속으로 녹아들었다.
한립은 고치 속 정염불새의 기운이 시시각각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흡족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다 홀로 동굴을 빠져나와 산골짜기 입구에 거대 금제를 펼쳐 다시 이곳을 숨겨 두었다.
정염불새 문제를 해결한 그는 기분이 좋아진 상태로 적하봉 바깥으로 날아올랐다. 적하봉을 중심으로 6십만 리가 그의 영역이라면 미리 살펴두는 것이 좋았다.
한립은 반나절 동안 인근을 돌면서 누군가 몰래 침입할 것을 대비해 감응 진법들을 곳곳에 설치해 두었다.
당연히 주변 영맥이 합쳐지는 적하봉이 가장 천기영기가 짙었으나 그곳 외에도 북한선역 표준에 비추어 보아도 쓸 만한 소형 영지 두 곳과 광맥 십여 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광맥은 대부분 채굴이 되었고 소형 영지에도 밭을 만들어 놓기는 했는데 아주 오랜 세월동안 관리하는 이가 없어 황폐했다.
다른 진선 장로였다면 이런 밭과 광맥에 시종들을 보내 장기적으로 영석 수입을 올렸겠지만 한립은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바로 적하봉 정상으로 돌아왔다.
“려 장로님.”
운몽귀 등 시종들은 장원 문 앞에 나란히 서서 허공에서 내려오는 한립을 향해 예를 올렸다.
이미 산 정상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고 누각과 정자도 새 것처럼 변해 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대나무들은 봄비라도 맞은 듯 녹음을 뽐내고 다리 밑으로 흐르는 작은 냇물에는 금색 물고기 떼가 버들잎 사이를 지나며 한가롭게 놀고 있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동부 바깥의 방 몇 개를 운몽귀 등에게 거처로 내주고 가서 쉬라며 쫓아 보냈다.
그는 동부 곳곳에도 약간의 금제를 펼쳐 두고 약재밭으로 향했다.
외부로 노출된 약재밭에 중요한 영약을 심어놓지는 않을 테지만 그냥 비워놓으면 의심을 살 게 분명했다.
한립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밭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평범한 영약 종자 몇 종류를 뿌려 두었다. 수도 없이 해본 일이라 아주 능숙했다.
옥항아리를 꺼낸 한립은 그 안의 맑은 액체를 약재밭에 골고루 뿌려 주고 손을 저어 밭에 푸른빛을 쬐어 주었다.
금방 푸릇푸릇한 새싹들이 흙 속에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미소를 지은 한립은 몸을 돌려 산 절벽에 위치한 동부로 들어섰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는데 내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방만 해도 열댓 개는 되었고, 연단실, 연기실 등이 잘 갖춰져 있어 그가 따로 손댈 곳도 없었다.
한립은 외부로 드러난 장원보다 동부 안의 환경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는 가장 은밀한 곳에 위치한 석실을 작은 약재밭으로 꾸미고 산 절벽 쪽으로 따로 석실을 하나 뚫어 벽에 무수히 많은 미세한 구멍을 뚫어두었다.
앞으로는 그 구멍을 통해 장천병이 별빛과 달빛을 흡수하면 될 것이다. 안배를 마친 한립은 그제야 동부 바깥으로 나와 금제를 몇 개 펼치려다 얼굴이 굳어 장원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약재밭에 막 고개를 내민 영초의 새싹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성큼성큼 다가가 말라버린 새싹을 살피니 이파리 뿐 아니라 뿌리까지 불에 타버리기라도 한 듯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신기한 것은 대부분의 새싹들은 말라죽었지만, 몇 가지 영초들은 아주 원기왕성하게 자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곧바로 의식을 방출해 원인을 찾아냈다.
오랜 세월 동안 지하 화맥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불 속성 영력이 차츰차츰 흘러나와 적하봉의 모든 토양에 스며든 것이다.
이런 특수한 환경에서 불 속성 영초들은 잘 자라도 다른 속성의 영초들은 생존할 수 없었다.
한립은 적하봉에 이런 성가신 일이 생길 줄 몰랐기에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오랫동안 적하봉이 비어 있었던 것이고, 그가 이곳을 택할 때 여현성과 기량의 표정이 이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해결방법을 찾아내고는 금방 얼굴을 폈다.
지하 화맥의 영향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라면 기운을 격리시키는 금제진법을 펼쳐두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되면 영초가 영맥의 천기영기를 흡수하는 데는 문제가 생기지만 장천병의 신비액체로 영약을 키우는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장원의 외부 약재밭만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불 속성 영초 위주로 재배하면 되었다.
* * *
어둑한 대전 안, 검푸른 사슬들이 바닥에 가득 쌓여 희미한 빛을 반사했다.
대전 중앙의 커다란 검은 의자에 앉은 새하얀 외투를 걸친 빼빼 마른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때, 쿵! 하고 대전 문이 열렸다.
두꺼운 반달 형태의 석문을 좌우로 밀어젖히고 들어온 것은 기골이 장대한 신영이었다.
누런 얼굴에 커다란 입을 지닌 사내는 이마에 낡은 청동 머리띠를 차고 있었고, 피풍의 비슷한 누런 장포는 모래 먼지로 가득해서 모래폭풍을 뚫고 온 사람 같았다.
누런 거한 뒤쪽으로 석문이 다시 쿵! 닫히고 천천히 대전을 가로지르는 그의 발아래서 검푸른 사슬들이 스쳤다.
“사존, 일곱째가 목숨을 잃은 곳에 다녀왔습니다.”
검은 의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거한은 강시사내를 향해 공손히 보고했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대전을 웅웅 울렸다.
“……어떻더냐?”
“치밀한 자의 소행인지 흔적을 거의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일곱째의 죽음은 응당 300년 전에 쫓던 강적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 일은 네게 맡길 것이니 어찌된 일인지 알아 내거라.”
“예!”
* * *
깊은 밤.
적하봉 정상은 아직도 등불이 켜 있었고, 몽운귀 등이 바삐 움직이며 장원을 꾸미고 있었다.
그리고 한립은 동부 밀실 안에서 촉룡도 내문장로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방석에 앉아 손바닥만 한 금속 영패를 보고 있었다.
<무상진륜경> 1부 공법이 기록되어 있는 영술패였다.
한참 만에 눈을 뜬 한립은 영패를 끌어와 미간에 가져다 대었다.
금속 영패가 빛을 발하자 머릿속에 빼곡하게 금색 문자들이 떠올랐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앞부분은 대부분 소개였고 뒷부분이 무상진륜경의 1부 공법이었다.
소개에 따르면 무상진륜경은 총 3성으로 나뉘며 공법을 수련해 진언보륜(眞言寶輪)이라는 신통을 얻는 것을 목표로 했다.
보륜(寶輪)이란 불탑의 꼭대기 장식중 하나인 둥근 원반형의 테 장식을 이르는데, 적을 상대할 때 이 신통을 펼치면 진언보륜에 가까워지는 공격의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무상진륜경 공법을 1성부터 3성까지 수련하는 동안 신통의 속성은 변하지 않고 위력만이 늘어난다는 설명이었다.
1성만 수련을 마쳐도 진언보륜을 펼쳐 적의 공격을 두 배로 느리게 만들 수 있었고, 2성을 익히면 10배, 3성을 익히면 정확히 서술은 되어있지 않았지만 그 위력이 놀라울 정도라고 했다.
한립은 깜짝 놀랐다.
10배가 아니라 적의 공격 속도를 2배로만 늦출 수 있어도 이미 역천의 신통이었다.
한립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계속에서 다른 내용을 살폈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점점 굳어갔다.
1부 공법은 금전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글자 하나하나는 알아보겠으나 무슨 뜻인지 도통 헤아릴 수 없었다.
왜인지 1부 공법의 단어 배열이나 문장의 나열이 금궐옥서 외전에서 보던 것과 너무 달라 난해하고 읽기가 심히 거북했다.
끈질기게 공법을 붙들고 살펴도 진도가 거의 나가지 않았고 표면적 의미에 숨겨진 함축된 의미를 찾기란 더욱 어려웠다.
한립은 울적해졌지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아 이전에 금궐옥서에서 보았던 내용을 참고해서 비교를 하며 천천히 연구를 해나갔다.
이튿날 아침, 이마에서 영술패를 뗀 한립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답답해했다.
공법이 너무 심오해서 밤새 노력을 했는데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무언가 잡힐 듯 잡힐 듯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금속 영패를 넣고 일어나려다 무언가를 떠올렸다. 전공전을 떠나기 전에 방 장로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다시 찾으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 것이다.
숨겨진 뜻이 있었음이 확실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짓고는 밀실을 나와 곧장 날아올랐다.
* * *
아침 햇살이 어룡봉을 비추어 암석과 궁전의 기와가 부드러운 빛을 머금었다.
전공전 앞 백옥광장에 천천히 내려선 한립도 아침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며 선인의 풍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곧장 대전으로 걸음을 옮긴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텅 빈 공간에 방전 장로 혼자 책상에 앉아 푸른 가죽 표지의 고서를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른 점이라면 왼손에 보라색을 띠는 자사(紫砂) 다기가 놓여 그 안에 담긴 청록색 차에서 은은한 향기가 퍼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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