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60화 (1,317/2,000)

1560화. 종적

*

골짜기 안이 삽시간에 너무 조용해져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았다.

“저 자는 누구기에 저리 기고만장하지?”

“려 장로님, 저 자는 선원전(仙元殿) 마사 장로님의 제자 ‘엽풍’입니다. 대승기 최고봉에 이르러 곧 있으면 도겁승선을 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도는 내문제자 중 하나지요.”

한립의 차분한 물음에 동그란 얼굴 청년이 조용히 답했다.

“그런 응석받이라 언행이 오만하였구나. 네게 묻겠다, 아직도 쌍수사응수를 원하느냐?”

미소를 지은 한립은 엽풍에게 말을 붙였다.

“려 장로님께서 고르신 영수를 제가 어찌 탐하겠습니까! 몰라 뵙고 무례하게 군것은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엽풍은 얼굴을 싹 바꾸고 활짝 웃는 낯으로 공수를 해보였다.

“뇌전 신통을 수련한 네가 뇌전혈맥을 지닌 쌍수사응수를 원하는 것을 탓할 수야 없지. 내 장로의 신분이지만 일반 제자들을 업신여긴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 이렇게 하자. 내가 아무런 법보도 사용하지 않고 이 자리에 서있는 동안 나를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게 한다면 영수를 넘겨주마. 어떻겠느냐?”

한립은 미소를 띠우고 물었다. 움찔한 엽풍은 한립의 갑작스런 호의에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자신이 마사장로의 제자라는 말을 듣고 태도가 변한 것 같았다.

마사장로는 내문장로들 중에서도 명성이 높았고, 실력도 이미 진선 후기에 이르러 선원전을 관리하고 있었다.

눈앞의 인물이 집사 장로가 되었다고 해도 갑자기 나타난 것을 보면 이제 막 입문한 외부 산수 출신이 분명하니 마사장로와 척을 지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엽풍은 그제야 납득을 하고 활짝 웃으면서 예를 취했다.

“려 장로님께서 호의를 베풀어 주시니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지요.”

다른 것은 몰라도 공격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진선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다른 이들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멀리 물러나 공간을 내주었고 한립이 소매 속에서 노란 빛을 날려 반투명한 노란 보호막으로 주변을 둘러쌌다.

흐압!

눈을 번득인 엽풍은 주저하지 않고 수결을 맺었다.

콰쾅!

굵직한 은색 뇌전들이 청년의 몸에서 떠올라 천둥소리를 냈다.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엄지손톱 크기의 은색 구슬이 튀어나와 강력한 영력 파동을 발산했다.

두 팔을 뻗어 구슬에 은색 뇌전을 불어넣자 구슬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은색 뇌전을 반짝이는 뇌전 구슬은 마치 태양처럼 보였다.

노란 보호막 바깥의 자발 거한 등도 구슬이 발산하는 위압적인 파동에 놀라 뒷걸음질 쳤고, 또 다른 보호막으로 격리가 되어있는 쌍수사응수도 불안한지 연신 낑낑 거렸다.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은색 뇌전 구슬을 보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엄청난 파도가 치고 있었다.

콰르릉 콰쾅!

그가 어떤 동작도 하지 않았는데 몸에서 수없이 많은 은색 뇌전들이 떠올랐다. 겉보기에는 엽풍의 것보다 얇았지만 생동감이 넘쳐서 은색 뱀 수천마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어서 한립이 몸에서 난폭한 기운을 품은 보랏빛 뇌전들도 떠올랐다. 은색과 자색 뇌전들은 기운이 완전히 다른데도 서로 배척하지 않고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다.

엽풍의 안색이 대번에 달라졌다.

한립도 뇌전이 힘에 정통할 줄 몰랐고, 뇌전을 통제하는 수법이 그보다 더 뛰어나 보였기 때문이다.

“가라!”

어쩔 수 없이 몸에서 더 많은 은색 뇌전을 쥐어짜 뇌전 구슬로 흡수시킨 그는 팔을 휘둘렀다. 거대 뇌전 구슬이 운석처럼 한립에게 떨어졌다.

한립은 평온하게 왼손으로 허공을 쥐었다.

콰릉!

은색과 자색 뇌전이 손바닥으로 흘러들어와 순식간에 거대한 뇌전 거검을 이루고 뇌전 구슬을 횡으로 베려했다. 경천동지할 폭음이 들리고 노란 보호막 안에 엄청난 기운의 파랑이 일었다.

뇌전 거검과 뇌전 구슬이 허공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파랑에 밀린 엽풍은 부들부들 떨다 뒷걸음을 쳤지만 한립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있었다.

얼굴을 굳힌 엽풍은 두 팔을 풍차처럼 돌리며 입에서 체액과 같은 은색 빛을 뿜어 뇌전 구슬에 흡수시켰다.

격렬하게 떠는 뇌전 구슬 위로 맷돌만한 은색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희미하게 법칙의 힘을 내뿜고 있었다.

쿠쿠쿵!

주술문자들이 때릴 때마다 진동을 한 뇌전 거검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열댓 개의 주술문자에 맞은 거검이 어둑해졌는데도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뇌전 구슬만을 넋 놓고 보는 중이었다.

엽풍이 되었다 싶었는지 이를 악물고 연달아 은빛을 두 번 더 방출해 뇌전 구슬에 흡수시켰다. 뇌전들이 꿈틀거리는 거대한 구슬이 더욱 커져 거검을 압도하려 했다.

거검이 슬슬 밀리자 뇌전 구슬에서 굵은 뇌전이 튀어나가 악귀의 발톱처럼 한립을 노렸다.

“과연 그랬어…….”

한립은 작게 중얼거리며 왼손의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쾅!

불현듯 방대한 양의 은색과 자색 뇌전들이 거검으로 흘러들어가 안 그래도 커다란 거검을 거의 두 배로 만들었다.

안색이 달라진 엽풍이 다른 수를 내기 전에 실체화된 거검이 뇌전 구슬을 절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뇌전구슬 중간에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은색 구슬이 눈을 찌를 듯 강렬한 뇌전빛을 방출했다. 은색 구슬이 거검에 맞아 빛을 잃고 떨어진 순간, 엽풍은 울컥 피를 토했다.

콰르릉!

절단 난 거대 뇌전 구슬이 폭발해서 주변을 은색 뇌전 바다로 만들었다. 아무도 몰랐지만 바로 그때 투명하고 얇은 은빛이 지면에서 솟아올라 기척 없이 엽풍의 체내로 흘러들어갔다.

뇌전 거검은 멈추지 않고 떨어져 엽풍의 머리를 가르기 직전이었다.

대경실색한 엽풍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지만 거검이 내뿜는 위압감에 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콰릉!

거검은 그와 단 한 뼘을 남겨두고 은색과 자색 뇌전으로 흩어져서 한립의 체내로 돌아갔다.

“뇌전 신통을 잘 부리기는 한다만 숙달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구나.”

한립은 노란 보호막을 없애주었다.

“역시 놀라운 실력을 지니셨습니다. 려 장로님께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엽풍은 어두운 표정으로 어둑해진 은색 구슬을 끌어와 얼른 자리를 떠났다. 이에 자발 거한 등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멀어지자 둥그런 얼굴 청년이 신속히 금제를 해제해 쌍수사응수를 풀어 주었다. 한립에게 다가온 쌍수사응수는 그렇게 온순하고 고분고분할 수가 없었다.

쉭!

영수의 목을 쓰다듬어준 한립은 푸른빛을 날려 쌍수사응수를 허리춤의 영수대 안에 넣어 두었다.

“려 장로님, 엽풍의 사존인 마사장로님은 부도주 경선에서 참가를 했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수행이 깊은 분이니 앞으로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동그란 얼굴 청년이 조심스럽게 당부를 했다.

“엽풍에 대해 더 아는 바가 있느냐?”

“저도 촉룡도에 입문한지 오래되지 않아 엽풍 사형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소문으로는 자질이 평범한 눈에 띄지 않은 내문제자로 지내다 3백 년 전에 갑자기 강력한 뇌전 신통을 익혀 수행이 급격히 늘고 마사 장로님의 눈에도 들었다고 합니다.”

“알겠다.”

한립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동그란 얼굴 청년은 조용히 옆에 서서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안내를 해주느라 고생했다. 가져가 쓰거라.”

그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하얀 옥병 하나를 던져주었고, 청년은 서둘러 옥병을 열어보고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후한 선물 감사드립니다, 려 장로님!”

그가 감사인사를 건넬 때는 한립은 이미 푸른 둔광을 일으켜 날아오른 후였다.

* * *

반나절 후.

멀리서 푸른빛이 날아와 적하봉 위에 멈추었다.

드넓은 산봉우리 절벽에 기대 세워진 장원 안에는 회랑과 다리로 연결된 누각과 정자가 구름에 휩싸여 있어 풍경이 썩 좋았다.

장원 깊은 곳, 절벽에 굳게 닫혀 있는 석문이 수련을 위한 동부일 것이다. 장원 왼쪽에는 텅 비어 있는 약재밭이 있었다.

원주인인 화련장로가 죽은 뒤 종문에서 약재를 거두어간 뒤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몽운귀 등 시종들이 분주하게 장원과 약재밭을 돌아다니며 정리정돈을 하다가 한립이 돌아온 것을 보고 일을 멈추었다.

“장로님, 오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인사를 받은 한립은 흑자색 옥패와 허리춤의 영수대를 몽운귀에게 주고 산허리에 쌍수사응수를 위해 동굴을 마련하라고 명한 뒤 유유히 적하봉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한동안 머물 곳이니 찬찬히 둘러볼 생각이었다.

산봉우리를 빙 돌아서 산자락에 이른 그는 지면에 가까워질수록 붉은 안개와 화독이 짙어지고 온도도 높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는 웬만한 수사들은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한립은 열기를 느끼고 미소를 머금었다.

흑령산하도에서 산세와 지형을 보고 적하봉에 강력한 화맥(火脈)이 흐를 거라 예상했는데 그의 짐작 대로였다.

아니, 그의 생각보다 더 강한 화맥이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갑자기 놀란 눈빛으로 좌측으로 몸을 날려 어느 폭포 앞에 도착했다.

쏴아아아!

은색 비단을 펼쳐 높은 듯 시원하게 물줄기가 떨어져 아래쪽 연못에 물보라를 일으켰다. 한립은 신중하게 주위를 살피다 손을 뻗었다.

치직!

팔뚝 굵기의 은색 뇌전이 뻗어나가 폭포를 내리쳤는데, 신기하게도 폭포에 닿자마자 뇌전이 녹아들어 사라져 버렸다.

“역시!”

폭포는 의식 감응을 방해하기 위해 고명한 금제로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다.

멀리서 적하봉 전체를 훑을 때는 그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금제가 손상되어 있어서 이곳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립은 두 눈에 남색빛을 머금고 폭포를 바라보다 몸을 날려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쿠르릉!

그의 신형이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그 안에서 굉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다양한 색의 파동이 도처로 퍼지고 격렬한 진동이 일었다.

쿵!

반 시진 후, 맹렬히 떨리던 폭포의 모습이 깨지고 한립이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허공에 나타났다. 금제를 깨느라 힘깨나 들인 얼굴이었다.

그는 단약을 하나 꺼내 입에 넣고 폭포가 있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 크지 않은 산골짜기는 바닥과 암석이 전부 적홍색이었고 뜨거운 열기와 붉은 안개를 꿀렁꿀렁 뱉어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적하봉 붉은 안개의 근원지였다.

안으로 진입한 한립은 들어갈수록 온도가 높아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시야가 왜곡되는 것을 느꼈다.

산골짜기 가장 깊은 곳에는 새빨간 동굴 입구가 있었는데 동굴 벽은 붉다 못해 검붉기까지 했다. 뜨거운 열기와 짙은 안개를 뿜어내는 동굴 속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한립은 지하로 이어진 동굴을 따라 들어가 보았다.

동굴 벽의 갈라진 부분에서 농염한 붉은 안개가 새어나왔고 열기는 바깥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뜨거웠다.

평범한 수사가 이곳에 들어왔다면 재가 되어 사라질 수도 있는 높은 온도였다.

높은 수행을 지녀 열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한립은 재빨리 동굴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한 팔을 들어올렸다.

은색 불덩이가 날아올라 불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바로 정염불새였다.

불새는 동굴 깊은 곳을 보더니 신이 나서는 두 날개를 쫙! 펼치고 날아갔다.

미소를 머금은 한립이 불새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가 적하봉에 동부를 얻기로 선택한 이유는 정염불새를 위해서였다.

실력이 크게 줄어든 불새를 그간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돌볼 여유가 없어 방치했는데 이제 안정적으로 거처를 마련했으니 실력을 회복하게 도울 작정이었다.

마광이 선계에서도 정염지화의 명성이 대단하다고 했으니, 불새가 완전히 회복을 하면 앞으로도 그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처음 종명산맥에 도착했을 때부터 어렴풋이 지하에 풍부한 화맥이 흐르는 것을 감지했다.

적하봉은 외진 곳에 있어 종명산맥에 흐르는 방대한 화맥의 한 줄기에 불과하겠지만 충분한 시간을 들이면 정염불새가 회복하기에 충분할 거라 믿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