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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58화 (1,315/2,000)

1558화. 시종 선발

*

골짜기 밖에서 허리에 초승달 모양의 옥패를 찬 우직하게 생긴 청년이 세 명의 수사들과 같이 걸어 들어왔다.

“운귀, 우리도 눈에 잘 띄는 자리를 잡아야 하네. 그래야 선발될 가능성이 높아지지.”

청년 일행 중 동그란 얼굴의 뚱보가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면서 입을 열었다.

가장 덤불이 수북한 좋은 자리는 원영기 제자들을 위주로 이미 꽉 찼고, 그 가장 자리 덤불 위에만 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래야지, 저쪽에 공간이 있군!”

고개를 끄덕인 우직한 청년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런데 그가 덤불을 밟기도 전에 누군가 어깨를 부딪쳐왔다.

“아이고 몽운귀, 몽 도련님 납시셨네. 왜 우리 자리를 빼앗으려고 그러시나?”

건장한 체격이 철탑 같은 청년을 비아냥 거렸다. 우직한 청년은 비틀거리다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시비를 건 상대의 이름은 손부정으로 그와는 고향이 같았다. 둘 다 외진 곳에 위치한 약소국인 맹지국(孟遲國) 출신이었던 것이다.

몽운귀는 맹지국을 암암리에 관리하는 수도 가문 출신이고 손부정의 가문은 맹지국의 황실이라 어린 시절에는 둘의 사이가 퍽 좋았다.

그런데 맹지국에 난이 일어나 손 씨 황족이 밀려날 무렵 몽 씨 가문도 외부 수도 세력의 침략을 당해 쇠락하고 말았다.

본명이 손호였던 손부정은 나라도 망하고 가문도 몰락하는 것을 지켜본 뒤 그것을 방치한 몽 씨 가문에 마음의 응어리가 생기게 되었고 그 후로 촉룡도에서 재회한 몽운귀에게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걸어왔다.

처음에는 몽운귀도 열심히 사정을 설명했으나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저 손부정이 도발할 때마다 인내심을 갖고 상대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런 태도가 손부정을 더 열 받게 만들었다.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가세.”

몽운귀는 일행들에게 나지막하게 말하고 방향을 틀어 다른 덤불 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몽운귀, 그러고도 네가 사내냐? 성인군자인척 하면서 남이야 망하든 말든 구경이나 하는 위선자 주제에!”

손부정은 몽운귀가 등을 돌리자 열을 받아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상당히 커서 주변 수사들이 그들을 돌아보았고, 그 중에는 키가 크고 평범하게 생긴 청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네다섯 무리의 외문제자들이 모여 있는 덤불에 따로 떨어져 앉아 있는 한립이었다.

바로 포령전으로 가 집사 장로를 만나 명단 중에서 선발을 하지 않고 직접 수사들을 살피기 위해 골짜기로 내려온 것이다.

아무리 시종이어도 곁에 둘 사람인데 아무렇게나 남이 추천하는 인물을 데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결단기 기운을 발산하는 그를 주변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비키거라. 여긴 내가 앉아야겠다.”

바로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쪽에서 사납게 생긴 40대 중년 사내가 사내와 여인을 한 명씩 대동하고 한립이 앉은 덤불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결단 후기의 수행은 주변 수사들에 비해 그리 높지 않았는데 한립과 같은 덤불에 앉은 수사들이 난색을 표하면서 분분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침 그쪽 덤불로 가려던 몽운귀는 얼마 후 한립 만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걱정스레 미간을 좁혔다.

“못 보던 얼굴인데, 새로 왔나?”

“그렇긴 하지. 진선의 시종이 되고 싶은 제자들이 이곳에 모인다기에 와봤다.”

중년 사내가 인상을 쓰고 묻자 한립이 담담히 답했다.

“으하하, 다들 아무 것도 모르고 날뛰는 이 천둥벌거숭이를 보라고!”

“자기가 무슨 소년 천재라도 되는 줄 아나본데?”

한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로 왔으면 눈치껏 행동을 해야지! 방금 침 사형이 꺼지라고 한 말 못 들었느냐? 귀가 먹은 것이냐 아니면 귀 먹은 척 하는 것이냐?”

“겨우 결단 초기 주제에 이리 날뛰고, 아주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것이지요!”

중년 사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뒤따르던 비쩍 마른 원숭이처럼 생긴 사내가 고함을 지르자 제법 곱게 생긴 여수사도 코웃음을 치며 거들었다.

하지만 한립은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저기, 괜히 쓸데없는 실랑이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진선께서도 눈이 있을 것인데 저런 성격 나쁜 자들이 눈에 차시겠습니까.”

보다 못한 몽운귀가 한립에게 다가와 충고를 했다. 한립과 중년 사내 사이에 선 몽운귀를 따라 동그란 얼굴의 뚱보와 다른 일행들도 따라왔다.

“몽운귀, 나라면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는 않을 거다. 운 좋게 결단 후기에 이르렀다고 내가 어쩌지 못할 거라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그걸 본 중년 사내가 협박조로 물었다.

“침표 수사가 평소 우리 몽 가 자제들을 업신여긴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 한 번 그 빚을 갚고 싶었는데 오늘이 기회인가 봅니다.”

몽운귀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크큭, 누가 이렇게 기고만장 한가 했더니 몽 도련님이셨구만. 어째 남의 일에 쓸데없이 나서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한가보구나?”

이때 또 다른 인물이 등장했다.

가냘픈 여수사의 허리에 팔을 두른 영준하게 생긴 젊은 사내가 십여 명을 이끌고 걸어오고 있었다. 결단기 최고봉의 기운이 여실히 드러났다.

“노 사형, 이제야 와주셨군요!”

중년인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 말려들기를 원치 않는 제자들은 둥글게 뒤로 물러나 싸움 구경할 준비를 했다.

‘흠…….’

코끝을 긁적인 한립은 약간 무안해졌다.

그냥 아무 곳이나 앉아서 괜찮은 인물이 없나 살피다 가려고 했는데 자신 때문에 이런 소동이 벌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노 씨 사내를 따라온 수사들은 대부분이 결단기 수사들이었고, 거기에 침표 무리까지 합치면 수가 꽤 많았다. 그에 반해 한립 쪽은 몽운귀와 그 일행이 다였다.

동그란 얼굴의 뚱보와 나머지 둘은 당황했지만 몽운귀가 물러나지 않자 먼저 내빼지는 않았다.

싸움이 시작되기 직전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뭡니까 이거? 머릿수로 밀어붙이기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몽운귀를 도발하던 손부정이 한립 옆으로 몸을 날려 결단 후기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손부정, 넌 몽운귀와 앙숙이 아니더냐? 왜 갑자기 남의 일에 참견이지?”

노 씨 사내가 냉랭히 물었다.

“남의 일은 아니지요! 저와 몽운귀 사이게 아직 풀어야할 감정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공공연하게 우리 맹지국 사람들을 건드리는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손부정은 전혀 두려움 없이 웃음을 흘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한립은 점점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귓가에 손운귀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직 이곳 사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 일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싸움이 벌어지면 나서지 마시지요.”

거의 동시에 주변 관중들이 부추기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싸울 거면 빨리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하하, 저는 노항 수사 쪽이 이긴다에 한 표 걸겠습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쳐라!”

미인을 옆에 낀 노 씨 사내, 노항의 외침으로 싸움이 시작되려 했다.

침표 등이 그 말을 듣고 각자 병장기 형태의 법보를 불러내 공격을 개시하려 했고, 몽운귀와 손부정 쪽 인물들도 법보로 몸을 보호하고 싸움에 대비했다.

휙!

바로 그 순간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립이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쌍방 사이에 나타났다.

한립은 몽운귀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가볍게 손을 저어 열댓 명의 침표 무리를 한 번에 저 멀리 날려 보냈다.

속수무책으로 날아간 수사들은 절벽에 몸을 부딪치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웅성웅성하던 골짜기에 정적이 흘렀다.

노항도 입을 떼기는커녕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결단기 최고봉인 그도 한립에게 어떠한 기운도 잃어낼 수 없었고 골짜기 입구 쪽에 자리 잡은 원영기 제자들도 화들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몽운귀가 제일 먼저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제자 몽운귀가 장로님을 뵙습니다.”

이어서 골짜기 안 수천 명의 수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노항은 더욱이 바닥에 머리를 박고 식은땀을 줄줄 흘려야 했다.

한립은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벼운 바람을 일으켜 몽운귀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려 가다. 앞으로 내 시종이 되어 따르거라.”

그 말에 깜짝 놀라 기뻐하던 몽운귀는 예상외로 바로 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걱정거리가 있다면 말해도 좋다.”

“려 장로님께 아룁니다. 제게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누이동생이 있는데 이제 겨우 축기기에 이렇습니다. 저, 그 아이도 같이 시종으로 삼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몽운귀는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말을 마쳤다.

“대도를 이루려면 정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법! 수행의 길은 어차피 홀로 가는 것이다. 속세의 사사로운 정을 끊지 못하면 어찌 진정한 성취를 이룰 수 있겠느냐.”

한립의 표정이 싸늘해지며 차분히 말했다.

“그,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어린 누이가 홀로 지낼 것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어……. 제 요청이 과분했다면 아무래도 제가 장로님의 시종이 될 복은 없는 듯싶습니다.”

몽운귀도 자신이 실언하는 것을 알았지만 한립을 향해 공수를 하며 양해를 구했다.

듣고 있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진선의 시종이 될 기회를 걷어차 버리는 제자가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제자가 있다면 미치광이거나 멍청이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한립이 더 놀라운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 대도가 무정하다지만 수사도 나무토막이 아닌 사람인데 어찌 완전히 정을 끊을 수 있겠느냐. 너와 네 누이를 모두 거두어 주마. 더불어 나를 도와 이곳에 모인 제자들 중에 시종이 될 수사 여덟 명을 선발하거라.”

이제 모두의 간절한 눈빛이 몽운귀에게로 쏠렸다. 말을 마친 한립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아 버렸다.

“……몽웅.”

침음하던 몽운귀는 제일 먼저 가까이 있던 동그란 얼굴 뚱보를 가리켰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뚱보는 너무 감동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몽웅, 그만 울고 천천이를 좀 데려와주게. 몽우, 몽광, 방요…….”

몽운귀는 연달아 여섯 명을 더 호명했다.

몽 가 제자 둘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인물들 같았다. 이름을 불린 이들은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거의 훌쩍이며 몽운귀의 뒤로 가서 섰다.

몽운귀를 포함해 4남 4녀로 이루어진 이들은 전부 결단기 수사였다. 이어서 그는 마지막 이름을 불렀다.

“손부정…….”

철탑 같이 생긴 청년이 자신의 이름이 몽운귀의 입에서 나오자 불신의 눈빛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왜 자신을 호명한 것인지 의문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손호, 맹지국 일은 말 못할 사정 때문에 내가 어찌 할 수 없었네만 우리가 벗이란 사실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네.”

몽운귀가 공수를 하면서 하는 말에 손부정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 웃음을 터트렸다.

“개명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렇게 부르고 있어? 이 몸은 이제 손부정이라고.”

선발이 끝나자 한립은 아무 말 없이 몽운귀 등을 데리고 포령전으로 향했다. 그의 뒤에는 아직도 마음을 접지 못한 수천 명의 수사들이 쪼르르 따라다녔다.

한립의 신분과 수행에 열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을 시종으로 두어도 상관없었지만 그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시종 등록을 마친 그가 포령전을 걸어 나오는데 인파 틈으로 ‘오라버니’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티가 나는 맑은 인상의 소녀가 발랄하게 튀어나와 몽운귀의 옷자락을 붙들고, 둥그런 얼굴의 뚱보가 급히 그 뒤를 따라왔다.

“려 장로님, 이 아이가 제 누이인 몽천천입니다. 천천아, 려 장로님께 어서 인사를 올려야지.”

몽운귀는 송구스런 얼굴로 누이를 소개 했다.

“려 장로님을 뵙습니다.”

소녀가 얼른 오라비의 옷자락을 놓고 한립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맑은 두 눈에는 한립에 대한 궁금증이 가득했다.

한립은 소녀의 허리춤에 몽운귀의 것과 똑같이 생긴 초승달 모양의 옥패가 걸린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를 보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누이가 떠올라서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이것이 그가 몽운귀의 청을 들어준 이유 중 하나였다.

“이 화령결(火靈玦)은 선가 보물은 아니지만 몸에 지니고 있으면 불 속성 공법을 익힐 때 도움이 될 게다. 선물로 주마.”

한립은 즉흥적으로 붉은 옥패를 꺼내 몽천천에게 주었다. 멍하니 있던 소녀가 그것을 받고 연신 감사를 표했다.

붉은 옥패를 초승달 옥패와 나란히 허리에 걸자 둘이 부딪치면서 걸을 때마다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그걸 지켜본 주위의 수사들은 부러움에 입맛만 다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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