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57화 (1,314/2,000)
  • 1557화. 무상진륜경(無相眞輪經)

    *

    “하하, 그러시다면 어룡봉으로 먼저 가시지요!”

    “아닙니다. 이미 기 장로께 너무 폐를 끼쳤는걸요. 장로 영패도 받았겠다, 저 혼자 가도 충분합니다. 두 분께서도 오랜만에 만나신 것 같은데 못다한 이야기나 나누시지요.”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완곡하게 동행을 거절했다.

    “음, 알겠습니다. 언제 시간 나실 때 천성전에 들러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두 장로에게 공수를 한 한립이 홀로 건물을 나서고 여현성이 짓궂은 표정으로 기량을 보았다.

    “흐흐, 새로 입문한 장로들이 집사급 임무가 쉬운 줄 알고 별생각 없이 선택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고생을 좀 해봐야 우리처럼 착실하게 전각을 맡아 일상 사무를 보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을 알 겁니다.”

    기량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 그의 말에 동조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

    광장으로 나온 한립은 여 장로에게 받은 저물탁에서 촉룡도 산문 지도를 꺼내 지형을 외운 후 다시 넣어 두었다.

    다음은 촉룡도 각 전각에 대한 설명이 담긴 옥간이었다. 잠시 후 옥간에서 의식을 불러낸 그는 방향을 잡아 날아올랐다.

    빠르게 이동을 하면서 한립은 발아래로 펼쳐진 산천을 감상했다.

    끝없이 이어진 산봉우리들이 시야를 꽉 채웠고 높은 봉우리들은 새하얀 눈에 뒤덮여 있어 은빛으로 반짝였다.

    그 사이를 구불구불 누비는 청록색 강물은 추위에도 얼지 않고 유유히 제 갈 길을 갔다. 마치 빙산을 청록색 구렁이가 휘감고 있는 듯했다. 대부분 강들은 한립이 촉룡도로 오면서 보았던 물길의 상류였다.

    일각 후.

    종명산맥 전체를 통틀어 가장 높은 산봉우리들 중 하나인 어룡봉은 항시 강력한 금제가 펼쳐져 있었고, 그곳을 지키는 진선경 수사도 한둘이 아니었다.

    산중턱과 정상까지 빼곡하게 들어 차있는 건물들 안에 종문이 오랜 세월 수집한 귀한 공법과 비술 경전들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통틀어 장경각(藏經閣)이라 불리는 대전들에는 외문장로와 제자들을 위한 경전들이, 내전각(內典閣)이라 불리는 산중턱의 대전들에게는 내문장로와 제자들을 위한 경전들이 모여 있었다.

    워낙 소장 서적이 방대해서 장로와 제자들은 경전목록을 보고 원하는 경전을 고른 다음 이곳의 집사장로를 통해 공적점과 경전을 교환해야 했다.

    유일하게 산 정상에 위치한 대전은 내문장로와 진전제자들을 위한 핵심 경전들이 모인 곳으로 ‘전공전’이라 불렸다.

    전공전 앞 백옥 광장에 푸른 둔광이 내려섰다. 호조전에서 곧장 이곳으로 날아온 한립이었다.

    그는 산바람에 장포 자락을 펄럭이면서 대전으로 걸어갔다.

    기와지붕으로 덮인 평범해 보이는 전공전은 자세히 뜯어볼수록 현묘한 구석이 있었다. 특수한 금속으로 부어 만든 건물은 벽과 처마에 복잡한 주술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한립은 대전 자체가 위력적인 거대 영보일 거라 짐작하고 내심 감탄했다.

    성큼성큼 대전 안으로 걸어가자 내부는 따로 등불이나 촛불이 없음에도 바깥보다 더 밝았다. 정문을 제외한 나머지 세 벽에 빼곡하게 금속으로 새겨진 격자무늬가 반짝였기 때문이다.

    그곳은 각각 강력한 금제로 봉인이 되어있었다.

    그의 정면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사내가 책상에 기대어서 푸른 가죽 표지로 묶인 누런 고서에 집중하고 있어 한립이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에 한립은 조용히 다가가 말을 걸려다 상대가 펼쳐보고 있는 책이 전부 금전문으로 된 것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복색으로 보아 내문장로도 진전제자도 아닌 듯한데 이곳에서 뭐 하는 겁니까?”

    그의 시선을 느낀 중년인은 고개를 들어 침착하고 우아하게 생긴 얼굴을 내보였다.

    “저는 려비우라 합니다. 막 내문장로가 된 터라 아직 신분에 맞는 복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한립은 해명을 하면서 장로 영패를 꺼내 보였다. 영패를 받아 확인한 중년인은 그것을 돌려주며 공수를 하였다.

    “이해합니다. 보통 갓 입문한 장로들이 가장 먼저 오고 싶어 하는 곳이 어룡봉이니까요. 저는 전공전의 집사 장로를 맡고 있는 방전입니다.”

    눈앞의 방전은 겨우 대승기 수사에 불과했는데 어떻게 전공전 장로직을 맡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공적점으로 공법 경전을 바꾸러 오신 것이겠지요? 실망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신입 장로에게 주어지는 100점으로는 산허리에 있는 내전각에 가보셔야 그나마 가져가실만한 공법이 있을 겁니다. 이곳의 경전들은…….”

    방전은 일부러 말을 끝맺지 않았다.

    “조언은 감사합니다만, 사실 저도 공적점으로 경전을 교환해 가고자 온 것은 아니고 물을 것이 있어 온 것입니다.”

    “그러셨군요. 어떤 공법에 대해 알고 싶으신지요?”

    “입문하기 전부터 촉룡도에 시간법칙을 수련할 수 있는 경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 경전은 공적점이 얼마가 있어야 교환할 수 있겠습니까?”

    “아……. 무상진륜경(無相眞輪經)을 말씀하시는군요.”

    한립이 곧바로 궁금한 점을 물었는데 반응이 이상했다.

    “그 공법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려 장로께서는 무상진륜경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계시는지요?”

    “아는 바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시간법칙과 연관이 있는 공법이라 촉룡도의 3대 공법 중 하나에 속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무상진륜경이 촉룡도에 나타난 이래 누구도 그것을 익혀 시간법칙을 깨달은 이가 없었지요. 수련을 해보려 시도해본 이들도 금방 포기하고 다른 공법을 익히곤 했고요.”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공법을 직접 살펴보려면 공적점이 얼마나 필요하겠습니까?”

    “수련에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는데도 원하신단 말씀입니까?”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공법이라 그냥 포기하기에는 아쉽군요. 시도해 보고 안 되면 그때 가서 다른 공법을 익혀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결심을 하셨다니 더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무상진륜경은 총 3부로 나뉘는데 촉룡도 제자들은 1부씩 교환을 해갈 수 있고, 1부를 가져다 보시려면 공적점 90점이면…….”

    “겨우 90점이요?”

    한립은 예기치 못한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방전의 말을 끊었다.

    “예, 1부는 확실히 90점이면 충분히 교환해 가실 수 있습니다. 다른 3대 공법에 비하면 원하는 이가 거의 없어서 1부만은 현저히 적은 점수로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그럼 나머지 2부와 3부는 어떻습니까?”

    “진전제자와 내문장로만 교환 자격이 있는 2부는 9천 점, 부도주 이상만 교환 자격이 있는 3부는 90만 점이 필요합니다.”

    “엄청난 차이군요.”

    나머지 부분을 교환하는데 필요한 막대한 공적점에 한립은 혀를 찼다.

    “무상진륜경 1부를 파격적으로 낮은 공적점으로 교환할 수 있게 한 것은 종문의 많은 제자들이 시간법칙을 익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니 관심을 갖는 이들이 거의 없어졌지요.”

    “설명 감사합니다. 무상진륜경 공법 1부를 교환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방전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금속 격자무늬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손바닥을 뒤집어 불러낸 둥그런 금색 영패에는 벽과 똑같이 격자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방전이 주문을 읊조려 수결을 맺자 둥그런 영패에서 금빛이 쏘아져 나가 대전 뒤편 벽을 비추었다.

    웅!

    금속 격자무늬 중 하나가 밝게 빛나면서 같은 규격의 네모난 상자가 나타났고, 방전이 들고 있던 영패가 그 위로 날아갔다.

    영패에 닿은 상자에서 금빛이 일어 둥근 빛의 장막을 형성했는데, 그 표면에 금색 용들이 헤엄을 치는 듯 주술문자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빛의 장막이 사라지고 네모난 상자는 천천히 벽의 격자무늬 속으로 들어가 다시 봉인이 되었다.

    이제 허공에 남은 것은 둥그런 영패뿐이었고 이 과정에서 네모난 상자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전공전을 관리하는 집사도 소장된 경전을 꺼낼 수 없고 그저 내용만 복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방전은 한립의 장로 영패를 금속 영패와 포갠 다음 다른 주문을 외웠다.

    “됐습니다. 공적점은 제했고 영술패(靈述牌)에 수사의 정혈 기운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앞으로 오직 려 장로께서만 기록된 공법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함부로 내용을 복제하려 했다가 일어나는 일은 스스로 책임지셔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 두십시오.”

    방전은 두 영패를 내주면서 경고했다.

    “고맙습니다.”

    영술패와 장로 영패를 챙긴 한립이 인사를 했다. 이때, 대전 밖에서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며 방전을 불렀다.

    “방 사형!”

    “오, 고 사제 왔는가! 요 며칠 안 보이더니 무슨 일로 찾아왔나?”

    미소를 머금은 방전이 친숙하게 답했다. 새로운 인물을 돌아본 한립은 미세하게 움찔했다. 고 씨 사내는 분명 진선경 수사였는데 어째서 대승기 수사인 방전을 사형이라 부른단 말인가?

    방전이 한립의 의문을 눈치채고 순간적으로 안색이 어두워졌다.

    “방 장로께서는 손님을 맞으셔야 하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시지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주셔도 됩니다.”

    한립의 인사에 방전이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한립은 그저 턱을 쓸어내리며 그곳을 떠났다.

    전공전을 나서서 원래 적하봉 동부로 가보려던 그는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임전각 방향으로 날아올랐다.

    * * *

    종명산맥 서부 변두리 지역에 위치한 포령곡은 길게 뻗은 두 산맥이 남쪽으로 점점 벌어져 거대한 나팔 형태를 이루는 골짜기였다.

    골짜기에 천지영기를 모으는 효능을 가진 포령초(蒲靈草)들이 많이 자생해서 포령곡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런 포령초로 만든 방석을 깔고 수련하면 저계 수사들은 수련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당연히 골짜기에서 자라는 포령초는 종문 소속으로 제자들이 함부로 채취하면 중벌이 떨어졌다.

    촉룡도에서 이곳은 다른 의미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외문제자들이 내문제자가 되려면 통과해야하는 시험이 10년에 한 번 치러질 때마다 집사 장로들은 이곳에 제자들을 집합시켜 용설삼림 등 험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운 좋은 극소수만이 내문제자가 되고 훨씬 많은 외문제자들이 잔혹한 시험에 목숨을 잃거나 부상만 당하고 계속 외문제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외문제자들은 평생 동안 딱 한 번 밖에 시험에 참가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실패하면 특수한 기연을 얻기 전에는 내문제자를 꿈꿀 수 없었다.

    고운대륙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외문제자들도 각 가문이나 세력에서 내로라하는 기재였기에 촉룡도의 외문제자로 뽑힌 것이었다.

    그들은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고 수선대도를 포기하지 않고 대다수가 포령전에 계약을 해 촉룡도 소속 진선 밑에서 시종으로 일하게 될 기회를 노렸다.

    진선의 시종이 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엄청난 기연이었고, 모시는 분의 신분에 따라 그들의 신분도 확연히 달라졌다.

    또한 진선과 가깝게 지내다 보면 다양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나중에 눈에 들어 내문제자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진선들은 자신의 가문 자제들 중에서 시종들을 선발했고 포령곡에서 시종을 데려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미색이 뛰어난 여자 수사들은 예외였지만!

    그럼에도 매번 진선이 선발을 위해 강림할 거라는 소문이 돌면 대량의 제자들이 앞 다투어 달려왔다.

    지금도 포령곡 안에는 거의 수 천 명이 모여서 골짜기 입구만을 목이 빠져라 보고 있었다. 얼마 전 포령곡 집사 장로 중 한 명이 곧 진선이 와서 시종을 고를 거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골짜기 양쪽에는 비취색 포령초들이 덤불을 이루어 자라고 있었고, 그 위에 회백 장포를 입은 수사들이 수십 명 혹은 백여 명씩 둥글게 모여 앉거나 서서 때를 기다렸다.

    대부분 축기기 혹은 결단기 수행을 지닌 제자들 틈에 원영기 수사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진선의 강림을 기다리는 동안 포령초에 앉아 수련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