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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56화 (1,313/2,000)

1556화. 동부와 수산수(守山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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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사라지자 땅딸막한 사내는 웃음기를 지우고 음울한 얼굴로 휙 몸을 돌렸다.

“웅 부도주님, 려 수사는 어찌 안배를 하면 좋을지요!”

그걸 본 기량이 그가 완전히 가버리기 전에 급히 물었다.

“어쩌긴 뭘 어쩌란 말입니까. 알아서 내문 집사 자리를 주든가 말든가 하세요!”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냉랭하게 답하곤 금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백포 소부와 다른 이들이 떠나고 한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각자 자신 몫의 인연과 복이 있기 마련입니다. 수사께서 이미 진선경에 이른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 너무 다른 이의 삶을 흠모해 마음을 상하지는 마세요.”

기 장로는 그의 표정을 보고 충고했다. 이에 한립은 상대가 자신을 오해한 것을 알았지만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웅 부도주께서 제게 수사를 내문 집사 장로에 임명하라 하셨으니 몇 가지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구체적인 사항들은 제가 관련 자료를 드릴 테니 찬찬히 익히시면 될 테고요.”

기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저 때문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내문 집사 장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게 되는지요?”

“려 장로께서는 두 가지 업무 중 하나를 택하시면 됩니다. 그중 하나는 백 년 내에 종문에서 발표하는 세 가지 집사급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상응하는 공적점(功績占)을 이용해 임무를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두 번째 방법은 저처럼 전각 하나를 맡아 일상 사무를 보는 것인데 백 년 중에 십 년 씩만 시간을 내면 됩니다. 많은 장로들이 수련에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백 년을 연달아 업무를 수행하고 나머지 구백 년은 수련에 매진하곤 하지요.”

“수련에 집중하고 싶다면 공적점이란 것으로 대신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하하하, 그건 말이 지요……. 촉룡도 장로와 제자들에게 공적점은 귀중한 보물이라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일상 사무를 수행하는 업무는 공적점으로 대신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기 장로의 말씀을 듣자니 공적점이란 것이 얻기가 쉽지 않은가 봅니다.”

웃음 짓는 기 장로를 보고 한립이 눈을 빛냈다.

“그렇습니다. 일반 제자들은 영초 밭을 몇 년간 돌봐야 겨우 공적점 1점을 얻을 수 있고, 집사 직책을 맡은 장로들도 매월 겨우 1점을 얻는 형편이라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집사급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집사급 임무라도 내용에 따라 난이도 차이가 납니다. 당연히 임무를 수행하고 받을 수 있는 공적점도 달라지지요. 보통 적게는 십 점 많게는 백 점 넘게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종문에 특별한 공헌을 하면 추가로 공적점을 받게 되는데, 차차 문내 사정에 익숙해지시면 감이 잡히실 겁니다.”

기 장로는 인내심을 가지고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렇다면, 처음 백 년 동안은 첫 번째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첫 번째 방법을 택했다.

“예, 막 입문한 장로들이 대부분 첫 번째 방법을 택합니다. 가시죠, 마침 호조전(戶造殿)이 근처니까 동부를 고르실 수 있게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초요전을 나온 한립과 기 장로는 다른 산봉우리로 넘어갔다. 이전 산봉우리에 비해 훨씬 북적이는 곳이었다.

주홍색 궁전들이 못해도 수백 개는 되었고 그 앞의 광장은 인산인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상당한 인파가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수시로 둔광이 광장으로 내려오고 날아올라 광장 상공도 복잡했다.

“호조전은 장로와 제자들의 서류를 담당하고 동시에 직급에 맞는 물품과 자원을 분배하는 곳이라 평소 문내에서 가장 바쁜 전각 중 한 곳입니다.”

“어쩐지 제자들이 많다 했습니다. 일을 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기 장로의 시간을 너무 빼앗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한 기색을 담아 말했다.

“괜찮습니다. 호조전의 여 장로와 친분이 있으니 제가 바로 안내해 드리지요.”

“고맙습니다.”

기량의 안내로 한립은 다른 곳에 비해 한적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일고여덟 명이 모여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여 형!”

한립을 데리고 문턱을 넘은 기량이 그중 한 명을 불렀다. 다투고 있던 수사들 뒤로 붉은 빛이 가득한 머리통이 뒤를 돌아보았다.

“됐으니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 보거라. 동부를 옮기는 일은 내일 다시 와서 처리하도록.”

종문 제자들은 어쩔 수없이 입을 다물고 건물을 나서야 했다.

“기 수사, 한동안 뜸하더니 바쁘신 분이 웬일로 여기까지……. 오, 옆에 분은 누구십니까?”

약간 비대한 몸을 지닌 여 장로가 커다란 머리를 아래위로 움직이며 한립을 훑었다. 용모는 평범했는데 수행은 녹록치 않아 진선경 수사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하하, 천성전(天星殿)이 바빠도 이곳만 하겠습니까! 오늘 려비우 장로가 새로 입문을 하여 등록과 거처를 고르는 것을 돕고자 같이 왔습니다.”

“아, 이쪽이 려 장로시겠군요. 저는 여현성이라 합니다. 호조전의 집사 장로를 맡고 있지요. 바로 등록을 진행해드리지요.”

여 장로가 한립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여 장로님.”

여현성은 옥을 깎아 금박으로 문양을 새긴 붓을 불러내 푸른빛의 두꺼운 책자에 신속히 글자를 적어 넣었다.

“여 장로께서는 앞으로 백 년 동안 어떻게 장로직을 수행하실지 결정하셨습니까?”

“세 가지 집사급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군요! 되었습니다, 규정에 따라 내문의 진전제자와 자신만의 산봉우리를 골라 거처를 마련할 수 있지요. 이제 려 장로께서도 동부를 건립할 산봉우리를 골라보도록 합시다.”

예상했다는 듯 빠르게 내용을 기록한 여현성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의 소매 속에서 비취색 족자가 날아올라 그들 앞에 펼쳐졌다.

족자에는 산봉우리들이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산수화가 담겨 있었다. 복잡한 산과 강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뛰어난 예술 작품을 보는 기분이었다.

“종명산맥이 워낙 넓다보니 이 묵령산하도(墨靈山河圖)에 표시된 것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다른 구역을 보시려면 족자 내에서 그림을 이동할 수 있습니다.”

몇몇 구역은 바탕이 달랐는데 남색, 푸른색, 금색 혹은 먹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검은색인 곳도 있었다.

“색깔이 다른 곳은 따로 쓰임이 있는 곳입니까?”

“맞습니다. 주로 종명산맥 중부에 분포하는 금색 구역은 종문의 핵심 전각들이 있는 산봉우리들입니다. 초요전, 전공전(傳功殿) 및 호조전 등이 이 구역에 속해 있지요. 은색 구역은 진전 제자들의 거처가 있는 곳이고요.”

설명을 하던 여현성은 족자 우측의 남색 구역으로 손을 뻗었다.

“이쪽 산맥 서쪽의 남색 구역이 바로 외문장로들과 제자들의 동부가 있는 곳입니다. 산맥 동쪽의 남색 구역은 내문장로들과 제자들의 동부가 있고요. 나머지 회색 구역들은 용설삼림(鎔雪森林), 막명산곡(莫名山谷) 등으로 종문의 시험 장소라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봉쇄되어 있습니다.”

“그럼, 검은 구역은 종문의 금지구역이겠군요?”

“예, 도주와 부도주 급을 제외하고는 소수의 핵심 장로와 진전제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구역입니다. 강력한 금제가 펼쳐져 있어 실수로 들어가실 일은 없을 겁니다.”

“알아들었습니다. 저는 이곳이 처음이라 지도만 놓고 거처를 고르기에 조금 막막하군요. 괜찮으시면 여 장로께서 몇 군데를 추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부탁했다.

“물론입니다.”

여현성의 손짓에 비취색 족자 위 그림이 위쪽으로 수십 장 밀려나 구름을 뚫고 우뚝 솟은 산봉우리 몇 개가 나타났다.

“여기 산양봉(山陽峰)은 면적은 20만 리밖에 안 되지만 품질 좋은 영천(靈泉)을 품고 있어 천지영기가 아주 짙은 곳입니다. 50만 리 정도 떨어진 고양봉(鼓陽峰)은 면적은 조금 더 큰데 특별하게 샘물 같은 것은 없고…….”

여 장로는 그중 두 개의 봉우리를 가리키면서 줄줄 설명을 늘어놓았다.

“영천 같은 특별한 곳이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비교적 조용한 산봉우리는 없겠습니까?”

한립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여 장로는 족자 위 그림을 수백 장 더 이동시켰다.

“한적한 곳을 찾으시면 외진 곳에 위치한 낙하봉(落霞峰)도 괜찮으실 겁니다. 산봉우리가 좀 낮아서 제 기억에 다른 장로가 머물렀던 적은 없는 것 같네요. 이곳을 택하시면 려 장로께서 직접 동부를 만드셔야 합니다. 주변에 평원이랑 골짜기가 많아 조용하기로는 이곳만한 곳이 없지요.”

여현성의 손끝을 따라 지도의 외딴 산봉우리를 본 한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흠, 그럼 다른 곳을 봐 볼까요?”

곁에 선 기 장로와 시선을 마주친 여현성은 그 후로도 몇몇 산봉우리를 소개했다. 한참 후 여 장로의 인내심이 바닥날 때쯤 한립이 족자 구석의 홀로 우뚝 선 산봉우리 하나를 가리켰다.

“이곳을 택해도 될 지요?”

“적하봉(赤霞峰) 말씀입니까?”

기량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안 되기는요. 원래 화련 장로의 동부가 있던 곳이었는데 그분이 목숨을 잃고는 계속 비어 있었습니다. 이곳도 좋지요! 약재밭, 영수 우리까지 다 갖춰진 동부가 있어서 청소만 하시면 됩니다. 포령곡(蒲靈谷)에 가서 선발한 시종들에게 동부 단장을 맡기시면 딱 이겠군요.”

기량이 딴말을 하기 전에 여현성이 얼른 대답을 했다. 한립도 그것을 알았지만 더는 묻지 않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적하봉으로 결정을 내렸다.

여현성은 정교하게 산수화가 새겨진 작은 인장을 꺼내 적하봉에 가볍게 찍었다. 기이한 파동이 퍼지고 더는 그림 속에서 적하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하, 되었습니다. 적하봉 및 인근 육십 만 리는 전부 려 장로께 귀속이 되었습니다. 집사장로령(執事長老令)과 저물탁을 챙기시지요. 안에 관련 자료와 집사장로에게 지급되는 물품들이 들어 있습니다.”

인장을 거둔 여 장로는 웃는 얼굴로 붉은 영패와 저물탁을 내밀었다. 저물탁을 받아 넣어둔 한립은 영패를 들고는 세세하게 관찰했다.

손바닥 크기의 영패는 매끄러운 옥석에 괴룡(怪龍) 도안과 ‘장로’라는 고어가 새겨져 있었다.

“장로 영패는 촉룡도를 출입할 때 꼭 필요한 중요한 물건입니다.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지 않도록 정혈로 표식을 남겨 두시지요. 영패 안에는 신임 장로에게 지급되는 공적점 100점도 저장되어 있으니까 잘 보관하시기 바랍니다.”

기량이 당부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지와 중지를 나란히 모아 영패에 가져갔다.

팟.

손끝에서 옅은 금빛의 핏방울이 떨어져 영패에 스며들자, 금빛에 기이한 문양이 생긴 영패에서 그의 기운이 느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의식을 불어 넣어 공적점도 확인했다.

“려 장로, 포령곡으로 가서 시종을 먼저 고르시겠습니까, 아니면 환수원(豢獸園)으로 가서 수산수(守山獸)를 고르시겠습니까?”

“수산수요?”

기량의 질문에 한립이 되물었다.

“종문에서 영수를 기르는 곳입니다. 려 장로의 수행과 내문장로 신분이면 합체기 영수를 수령해서 동부가 있는 산문을 지키는 용도로 쓸 수 있습니다.”

“공적점으로 교환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하, 시종과 마찬가지로 종문에서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혜택입니다. 사실 대부분 외문제자들은 우리와 같은 진선들의 곁에서 시중을 들기를 무척 고대하지요! 수산수에 관심이 있어 보이시니 먼저 환수원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수산수란 말을 처음 들어보아 무엇인지 궁금했을 따름입니다. 그보다 동부를 고를 때 보니 전공전이 있는 어룡봉(御龍峰)이 멀지 않던데 그곳을 먼저 가보고 싶군요.”

“관찰력이 뛰어나십니다. 허나 종명산맥에 넓다 보니까 그림에서 보는 것만큼 그리 가깝지는 않을 겁니다. 동부를 먼저 가시지 않고 정말 바로 전공전으로 가보시겠습니까?”

“부끄럽습니다만, 촉룡도의 명성을 흠모해 온지 오래라 수많은 경전들이 가득하다는 전공전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오늘에서야 숙원을 이루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급해지는군요.”

한립은 짐짓 민망한 척을 하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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