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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55화 (1,312/2,000)

1555화. 자질 부족

*

“기 수사, 그리 근심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산수이기는 하나 천리를 위배하는 악행을 저지른 적은 없고, 저를 대신해 이걸 귀 종에 전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한립은 기량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촉룡령을 꺼내들었다.

“촉룡령!”

놀란 기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백소원을 바라보았다.

“예, 원래 노조께서 지니고 계시던 촉룡령이 맞습니다. 백 가가 큰 위기에 처했을 때 려 선배님이 도움을 주셨기에 제가 사례로 드린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구만! 려 수사께서 백 가에 은혜를 베풀었다면 촉룡령을 지닐 만하십니다. 자, 저를 따라가시지요.”

기량은 바로 납득을 하더니 그들을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앉아 있던 누각 근처에 ‘임전각(臨傳閣)’이라 적힌 편액이 걸린 푸른색 대전이었다.

“촉룡도는 종문이 워낙 광활하다 보니 곳곳에 임전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먼 곳을 왕래할 때면 이곳에서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지요.”

“고운대륙 제일 종문답습니다.”

기량의 설명에 한립은 진심에서 우러난 칭찬을 했다. 그리 넓지 않은 대전이었지만 작은 전송진 하나가 미약하게 하얀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옆에 서있던 화신기 중년 수사가 기량을 보고 서둘러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초요전(招搖殿)으로 가겠다.”

“예!”

전송진에 오른 세 사람은 중년 수사의 주술소리를 듣고 하얀 빛에 휩싸였다. 눈앞이 밝아져 일시적으로 시야가 뿌옇게 변한 한립은 또 다른 푸른 대전으로 이동해 있었다.

겉으로는 표정변화가 없었지만 깜짝 놀랄 만한 경험이었다. 선계로 와 여러 차례 전송진을 이용한 결과 이제는 대충 어느 정도 거리를 이동했는지 감이 왔다.

그런데 조금 전 이동거리는 비행을 했으면 족히 한 달은 걸릴만한 거리였다. 촉룡도가 광활하다는 말은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

* * *

임전각을 나선 세 사람은 산세가 험한 산봉우리 정상의 광장에 이르렀다.

외부 손님을 맞이하던 광장보다 몇 배는 넓은 백석(白石) 광장은 바닥에 현묘한 빛이 반짝이고 옅은 구름이 깔려 있었다.

광장 상공에는 구름에 휩싸인 거대 궁전이 떠있어 정말 선경이 따로 없었고, 초요전이라는 글자가 적힌 편액이 궁전 대문에 걸려 있었다.

“초요전은 입문 제자들의 영근 자질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부도주 한 분이 머물고 계셔서 들어가시면 말을 가려서 하셔야 할 것입니다.”

기량의 충고에 한립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촉룡도는 다른 종문들과 달리 13명의 금선급 도주(道主)가 돌아가며 종문 세력을 관장했다.

도주 아래 36명의 부도주(副道主)들은 전부 진선경 최고봉에 이른 절정의 고수들이라 했다.

그냥 평범한 진선경 최고봉의 수사가 아닌 하나같이 법칙의 힘을 장악한 진정한 진선이라 외부의 산선들과는 비교가 불가했다.

“유의하겠습니다.”

한립이 이렇게 말하고 백소원도 고분고분 답했다. 궁전으로 날아오른 그들은 굳게 닫힌 대문을 보았다. 대문 좌우에 선 준수하게 생긴 젊은 제자들이 기량을 보고 서둘러 예를 올렸다.

“안에 웅 부도주께서 계시느냐?”

“계시기는 합니다만, 폐관 수련중이시라 저희에게 방해하지 말라 명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제자 중 한 명이 곤란한 듯 답했다.

“언제 출관하실 거라 말씀은 하셨고?”

“안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군. 안에다 내 중요한 일로 뵙기를 청한다고 기별을 넣어주시게.”

얼굴을 굳힌 기량이 나지막하게 명했다. 난색을 표하던 두 제자는 시선을 마주치고 어쩔 수없이 하얀 영패를 꺼내 무어라 중얼거렸다.

일각이 지났을 때 영패에 하얀 빛이 떠올라 한 번 반짝였다.

“부도주님께서 안으로 들라하십니다.”

제자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으며 법결을 던져 대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죠.”

기량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굉장히 넓은 궁전 안은 푸른 안개가 자욱했고 푸른 돌기둥들 위에 신룡, 청봉, 백호, 기린 등의 괴수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괴수들은 전부 대전 중앙의 암청색 제단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어 자연스레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되었다.

원형 제단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주술문자들이 빼곡하게 수많은 그림들이 덧그려져 있어 신비해 보였다.

대전 가장 안쪽에는 땅딸막한 사내가 상단에 앉아 있었다.

마흔 줄로 보이는 콧수염을 길게 기른 사내는 촉룡도를 상징하는 백포가 아니라 화려한 금색 장포를 입고 금색 모자까지 써서 선인이 아니라 부유한 상인처럼 보였다.

땅딸막한 사내는 수련을 방해받아 퍽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웅 부도주님을 뵙습니다.”

기량이 먼저 인사를 했다.

한립은 상단에 앉은 땅딸막한 사내를 보고 동공을 미세하게 수축했다.

평범한 외모에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거산을 앞에 둔 느낌이었고, 기운이 방반과 문어 해저 요수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도 곁의 백소원과 같이 기량을 따라 예를 올렸다.

“기 장로, 무슨 일이기에 수련하고 있을 때 꼭 만나야겠다고 한 것입니까?”

“여기 려 수사께서 촉룡령을 들고 입문을 하고자 찾아와 외람되지만 부도주님의 수련 시간을 방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량은 미안함을 담아 해명했다.

“오! 직접 촉룡령을 봐야겠습니다.”

촉룡령이라는 말에 땅딸막한 사내의 표정도 조금 풀어졌다.

한립이 꺼내 들고 있던 영패가 사내의 손짓에 날아갔다.

“음, 진품이 맞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립을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한립은 그의 시선을 받자마자 온몸의 피부가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는 것처럼 미세한 통증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촉령령을 들고 찾아왔다니 주천선대(周天仙臺)에 오르시지요. 영근 자질이 어떤지 한 번 봅시다.”

사내가 시선을 거두고 법결을 날려 보냈다.

웅!

수십 개에 달하는 돌기둥들이 요란한 푸른빛을 머금고 괴수 조각상들이 입에서 푸른 기운을 뿜어 중앙의 원형 제단으로 쏘아 보냈다.

제단의 복잡한 주술문자들이 찬란한 빛을 머금었다.

“려 수사, 오르시지요.”

기량이 한립을 돌아보았다.

이에 한립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제단에 오르자 제단에 모인 뜨거운 기운이 몸으로 흘러들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 오색찬란한 빛의 점들이 떠올라 요동을 쳤다. 뜨거운 기류가 몸의 구석구석을 돌며 그의 영근 자질을 폭로하는 듯했다.

기류가 머리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한립은 방대한 의식의 힘을 수축해 원래의 1, 2할만 남겨두고 단단히 감춰버렸다. 그의 뇌리를 맴돌다 순식간에 물러난 기류는 재빨리 몸을 타고 내려가 제단으로 돌아갔다.

제단의 찬란한 빛은 가라앉았지만 주술문자들이 뭉쳐 모호한 사람의 모습을 만들었다. 푸른색, 검은색, 핏빛, 보라색 등 다양한 빛깔의 광채가 혼란스럽게 섞인 형상이었다.

기량이 그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자질은 떨어지고 여러 공법을 난잡하게 수련했군! 요족의 힘을 흡수했는지 기혈은 왕성한데 기운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어……. 선규도 하나도 뚫지 못해 진선경 초기에 이른 것도 천운이 따른 경우로구만.”

땅딸막한 사내는 대놓고 한립의 자질을 폄하했다.

기량은 슬쩍 한립의 안색을 살폈고 백소원의 아름다운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한립만이 코끝을 긁적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제단에서 내려왔다.

땅딸막한 사내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몸을 돌려 다시 가려 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웅 부도주님! 여기 백소원 수사는 백봉의 장로의 후손이 됩니다. 촉룡도에 입문을 하고 싶어 찾아왔다니 번거로우시겠지만 영근자질을 확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량이 다시 붙들자 사내는 백봉의란 말에 흥미가 생긴 듯 걸음을 멈추었다.

“서둘러라!”

그는 백소원에게 한마디를 하고 다시 법결을 날렸다.

웅!

돌기둥들이 모은 푸른빛이 제단으로 흘러들었다. 백소원은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진지하게 제단에 올랐다.

찬란하게 빛을 머금은 제단은 한립 때와 달리 정순한 은백색으로 물들어 투명하고 아름다운 광채를 뿜었다.

쿠르릉!

제단에서 퍼진 웅장한 파동에 대전 전체가 진동하고 돌기둥 위의 괴수 조각상들까지 으르렁거렸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뜻밖의 반응에 기량이 놀라 물었고 곁의 한립도 눈을 부릅떴다.

상단에 앉은 땅딸막한 사내가 벌떡 일어나 제단의 빛이 가라앉은 뒤 나타난 은색 인영을 확인했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사람의 형상은 꼭 밤하늘에 뜬 보름달 같았고, 가슴에 일곱 개의 점이 반짝였다.

“말로만 듣던 월화선체(月華仙體)가 아닌가! 게다가 선천적으로 선규 일곱 개가 각성해 있다니!”

격동한 땅딸막한 사내는 무슨 생각인지 바로 법결을 날려 제단의 현상을 멈추었다.

“이름이 백소원이라고? 백봉의 장로의 후인이라더니 과연 자질이 뛰어나구나.”

사내는 갑자기 살가워진 말투로 온화하게 물었다.

“예, 후배 소원이 웅 부도주님을 뵙습니다.”

막대한 힘에 휩싸여 외부와 감각이 단절되어 있던 백소원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다시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근골을 살펴보니 나이도 어려보이는 데 수련한 지는 몇 해가 되었지?”

“3살 때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올해로 50년째입니다.”

백소원의 대답에 한립과 기량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고 땅딸막한 사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월화선체를 지닌 데다 선천적으로 선규 일곱 개가 뚫려있는 그녀가 50년 만에 화신기에 이른 것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적합한 공법을 내주고 수도 자원을 충분히 지원해 주면 천년 내로 대승기를 뛰어넘어 도겁 승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절정의 자질 덕에 이후 금선이 될 가능성도 높았다.

“소원 수사, 자네는 뛰어난 자질을 타고나 다른 이들처럼 외문제자부터 시작할 필요가 없네. 본 좌를 스승으로 삼아 오늘부로 촉룡도 부도주의 진전제자가 되겠는가?”

땅딸막한 사내의 온화한 음성에 백소원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웅산, 자네가 수련한 금속 속성 법칙은 이 아이의 월화선체와는 어울리지 않네. 그러지 말고 내가 지도하게 내주게.”

갑자기 대전 안에 달빛처럼 몽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물결처럼 퍼진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 소리에 한립은 몸이 나른해지고 그윽한 향기에 취할 것만 같았지만 즉시 그의 방대한 의식이 평정을 되찾게 해주었다.

땅딸막한 사내는 순간적으로 눈빛이 사나워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대전 안에는 어느새 눈부신 하얀 빛이 들어서 있었다. 그 빛은 너무 눈이 부셔 한립 역시 손등으로 빛을 가려야 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궁장 차림의 젊은 부인은 갸름한 얼굴에 붓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요염한 두 눈과 새하얀 장포 아래에 감춰진 풍만한 육체를 보고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매혹적인 백포 소부(少婦)의 잔잔히 미소와 몸짓 하나하나가 주변 사람들을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로 빠트렸다.

한립은 그녀를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해서 시선을 돌리고 의식의 힘을 퍼트려 청량한 기운으로 동요를 없앴다.

“운 도주님을 뵙습니다.”

땅딸막한 사내가 허리를 숙이면서 하는 말에 한립은 백포 소부가 촉룡도 13 금선 도주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런 무시무시한 매혹의 힘을 발산할 만한 수행이었다.

백소원마저 멍하니 여인을 바라보는 것으로 보아 상대의 매혹의 힘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작용하는 듯했다.

한립과 다른 수사들이 전부 인사를 올리는 것을 보고서야 백소원도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예의도 바른 아이구나.”

백포 소부는 자연스럽게 백소원을 끌어와 앞에 세워두고 찬찬히 살펴봤다.

“얘야, 이름이 소원이라고? 네 월화선체는 내 공법을 익히기에 아주 적합하구나. 나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련을 해보겠느냐?”

“제자 소원, 스승님을 뵙습니다.”

부드러운 소부의 말에 재빨리 머리를 굴린 백소원이 주저하지 않고 대례를 올렸다.

“그만 일어나렴. 오늘부로 너는 내 다섯 번째 진전제자가 되었다. 이 여의환(如意環)은 내가 젊은 시절 쓰던 영보인데 가져다 호신용으로 쓰거라.”

빙긋 웃은 백포 소부가 직접 백소원을 일으켜 백옥 팔찌를 내주었다. 극품영보가 백소원의 손목에서 놀라운 영력 파동을 발산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웅산, 이 아이는 내가 데려가려 하는데 이의는 없겠지?”

“이의라뇨, 운 도주님께서 제자로 거둬주시다니 그 아이의 복입니다.”

백포 소부의 말에 땅딸막한 사내가 웃는 낯을 만들어 보였다. 소부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한립을 잠시 쳐다보았다.

“려비우라는 산수입니다. 촉룡령을 들고 입문을 원하기에 자질을 점검하던 중이었습니다.”

땅딸막한 사내가 눈치 있게 보고를 했다.

“알았네. 그런 사소한 일은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소원아, 우린 가자꾸나.”

백포 소부는 흥미가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부드러운 하얀 빛으로 백소원을 감싸 사라졌다. 백소원은 서둘러 한립을 돌아보았지만 하얀 빛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지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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