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4화.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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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종명산맥이로군.”
겹겹이 줄지어선 산봉우리들을 보고 한립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소원도 들떴지만 심호흡을 해서 평정을 되찾았다.
한립은 바로 내려가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백소원은 촉룡령이 있으면 촉룡도 내문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만 어떻게 사용할지는 잘 생각을 해봐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래도 촉룡도 내부 인사의 추천을 받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촉룡도 문인과 교류할 수 있을까 고민하시는 거면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눈을 반짝인 백소원이 입을 열었다.
“어떤 방법이지?”
한립은 담담히 물었다.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맞춘 것에 놀란 얼굴도 아니었다. 그녀는 수행은 낮았지만 눈치가 빠르고 굉장히 영리했다.
두세 마디를 나누다 귀신같이 그의 생각을 읽어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2, 3년 동안 한립은 말을 아꼈다.
“특별한 방법은 아니고, 백 가 노조께서 살아계실 때 촉룡도의 기량이라는 분과 사이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분도 내문 장로시고요. 노조께서 이후 백 가의 수사가 촉룡도에 입문하려거든 그분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라고 언질을 남겨두셨다고 해요. 시간이 오래지나 아직도 그분께 기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만나봐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요.”
“잘 됐군, 그 일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오는 동안 선배님께서 저를 챙겨주셨는데 이런 사소한 일은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다만…….”
미소를 지은 백소원이 말을 하다 말았다.
“왜 그러지?”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제 원래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선배님과 여기까지 오면서 신중한 분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외모만큼은 다른 사람이 알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모습이 아닐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도 반쯤 무상맹 사람이라 가면으로 쉽게 용모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기도 하고요.”
“영리하군!”
싱긋 웃는 소녀의 대답에 한립이 칭찬을 했다.
“과찬이세요. 제 생각에는 촉룡도에 들어가시려면 지금처럼 용모를 가려서는 안 될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무상맹 가면이 아무리 정교해도 촉룡도에는 열세분의 금선급 수사가 있고 그 중 한 분은 금선 최고봉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들었거든요. 태을옥선의 경지를 앞두었다는 소문도 있고요! 무상맹의 환술로 그분들을 속일 수는 없을 텐데 일단 용모를 숨긴 걸 들키면 입문하기는커녕 적의 간자로 여겨져 곤욕을 치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백소원은 단정하게 말을 마쳤다. 침묵하던 한립이 수결을 맺어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백소원은 새까만 눈동자로 한립의 진짜 모습을 보다가 입가를 미세하게 끌어올렸다.
한립이 베틀 북을 지긋이 밟아 아래로 향하게 했다. 백옥 광장에 이른 그는 베틀 북을 거두고 소녀와 나란히 걸어갔다.
“촉룡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용무를 위해 오셨는지요?”
영빈정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제자들이 멀리서 누가 온 것을 보고 분분히 일어나 다가왔다.
제자들은 한립의 수행이 낮지 않은 것을 알아보았지만 미소를 머금고 예의 바르지만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기량 장로를 뵈러 왔는데 계시는가?”
한립은 말을 하면서 슬쩍 진선의 기운을 노출했다. 제자들이 충격에 몸을 떨자 무시무시한 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수고스럽지만 안에 잘 전해주시게.”
한립은 손가락을 튕겨 진귀한 화신급 단약 몇 개를 날려 보냈다.
운 없이 그의 손에 죽은 누군가의 저물탁에서 찾아낸 것이었는데 어차피 그는 쓸 일이 없으니 일처리가 빨라지게 선심이나 쓴 것이었다.
단약을 받아든 제자들은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입이 벌어졌다. 한립에게 버려도 무방한 단약들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보물이었던 것이다.
화신기 수사에게 도움이 되는 단약은 물론이고 지닌 영석을 다 털어 원영급 단약을 구해다 수련을 보조해도 금방 동이 나는 게 현실이었다.
“과분한 물건을 받습니다. 천성전(天星殿) 집사이신 기량 장로께서는 늘 문중에 계십니다.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알려주시거나 신물을 주시면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호리호리한 청년이 그나마 자중하고 공손히 물었다.
“난 려비우, 이쪽은 백소원일세. 신물은…….”
한립은 말을 하다 백소원을 보았다.
“이걸 기량 장로님께 보여드리면 저희의 신분을 아실 거예요.”
반달 형태의 붉은 옥간을 꺼낸 백소원이 싹싹하게 청년에게 말을 했다.
“려 선배님, 제가 바로 기량 장로님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만나주실지는 저도 알 수 없으니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일세.”
붉은 옥간을 든 호리호리한 청년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려 선배님, 백 수사 저쪽의 편전에서 잠시 쉬시지요.”
통통한 사내가 그들을 산허리에 기대서 지어진 개방된 누각으로 안내했다. 주위의 죽림(竹林) 사이로 적당히 볕이 들고 누각 자체도 깔끔하고 우아해서 편안히 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기량 장로님은 내문 장로님이시라 언제 시간이 나실지 모르니 기다려야 하실 겁니다.”
통통한 사내가 미안함을 담아 말하며 차를 내왔다. 한립과 백소원이 차를 음미하는 동안에도 그는 떠나지 않고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렇게 기다린 지 거의 반나절이 지났지만 한립은 전혀 조급하지 않았다. 그보다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복잡했는데, 바로 청죽봉운검과 해 도인 때문이었다.
수시로 감응을 시도한 결과 놀랍게도 종명산맥에 가까워질수록 희미하게 감응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청죽봉운검과 해 도인은 십중팔구 이곳에 있을 것이고, 잃어버린 보물들을 되찾으려면 일단 촉룡도에 들어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한립은 원래 촉룡도에 큰 기대를 하고 온 것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보물들을 찾는 김에 촉룡도에 있다는 시간법칙 경전을 살펴 참고할 만한 사항이 있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장천병으로 응결한 수정 알갱이도 약간의 시간법칙을 함유하고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지기화신이 중수를 정련하는 것을 돕는 것 외에는 달리 활용할 방법이 없었다.
3대 지존법칙 중 하나인 시간법칙은 굉장한 인연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의 자질로 언제 장악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에 반해 거대 종문들은 대대로 수백만 년 혹은 수천만 년 동안 연구해 놓은 성과를 쌓아 놓고 있었다.
인연이 닿아 그런 심득을 살펴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고, 안 되면 넓디넓은 북한선역에서 다른 방법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촉룡도로 오는 길에 백소원에게 들은 소식과 주변에서 수집한 자료들이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촉룡도는 무수히 많은 고계 선가 경전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외부에서 영입한 수사들을 크게 배척하지 않았다.
한립과 같은 산수는 촉룡도에 진입하기가 무척 어려운 대신 일단 입문을 하면 크게 구속을 받지 않고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한립에게는 크나큰 장점이 아닐 수 없었다.
선계에 다시 돌아온 후로 사슬을 제거하느라 흑풍해역에서 몇 년간 처박혀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계속 동분서주하느라 차분히 수련할 시간이 없었다.
흑풍해역이 안전하긴 해도 수련자원이 부족해서 제대로 된 고계 선가 경전을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
수련자원이 풍부하고 행동의 제약도 크지 않은 촉룡도라면 잠시 머물러도 좋을 듯싶었다.
현선의 신분에 운 좋게 하계에서 얻은 범성진마공 등 강력한 방법들 덕분에 진선경 초중기의 산선들은 상대가 가능했지만 법칙의 힘에 정통한 진선을 만나게 되면 고생할 것이다.
방반을 상대할 때처럼 언제나 운이 따라줄지도 알 수 없었다. 무궁무진한 수명을 누리는 진선도 죽임을 당하면 끝이었다.
강대한 실력이야말로 선계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는데 그는 적합한 선가 공법도 수련하지 못한 진선경 초기 수사에 불과했다.
한립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바깥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키 큰 청년이 40대 중년 사내와 같이 돌아오고 있었다.
하얀 장포를 입고 사각턱을 지닌 중년인은 외모는 평범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극도로 정순한 선령력을 지닌 진선경 수사였다.
한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백소원도 서둘러 따라 일어섰다. 붉은 옥 조각을 든 사각턱 사내는 둘을 훑어보다 한립에게 시선이 멈추었다.
“저는 기량이라 합니다. 두 분께서 백소의 장로와 어떤 관계인데 신물을 지니고 저를 찾으셨는지요?”
“선배님께 아룁니다. 저는 백소원으로 백소 어르신의 후손입니다.”
“오, 백 형의 후인이었구만! 그럼 이분은…….”
“저는 려비우라 합니다. 백 수사와 함께 촉룡도를 찾은 일개 산수인데, 운 좋게 기 수사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립도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소개했다.
“영광은요 무슨. 려 수사, 백 수사 모두 앉아서 이야기 나누십시다.”
기량이 웃는 얼굴로 자리를 권하자 키 큰 청년은 그들에게 차를 내준 후 바깥으로 물러났다.
“소원 수사, 백 형의 소식에 대해 하는 바가 있는가? 종문을 떠난 지 수천 년이 지났는데 아무 소식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네.”
“노조께서는 수 천 년 전에 백 가를 떠나시고 아직까지 소식이 없으십니다. 저희도 어디계신지, 평안하신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기량의 물음에 백소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 가문으로도 소식을 전혀 전하지 않았단 말인가?”
기량은 뜻밖이라는 얼굴이었다.
“기 선배님께서는 노조께서 어째서 떠나신 것인지 아시는지요?”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난 것으로 아네만……. 소원 현질은 너무 걱정하지 말게. 종문에 보관되어 있는 백 형의 원신정이 아직 꺼지지 않았으니 다른 중요한 일 때문에 돌아오는 일정이 지체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네.”
정확한 대답은 피했지만 기량은 걱정스런 백소원의 표정을 보고 몇 마디 언질을 해주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뜻밖의 희소식에 백소원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한립은 가만히 앉아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려 수사와 촉룡도에 온 연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한담이 끝나고 기량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백소원과 시선을 교환한 한립은 그녀에게 먼저 이야기하라는 눈짓을 했다.
“명성이 자자한 촉룡도를 흠모해 온 지 오래입니다. 이번에 무턱대고 선배님을 찾아온 것은 촉룡도에 입문하여 수련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물론 지금이 제자를 모집하는 기간이 아닌 줄은 알지만 기 선배님께서 저를 추천해 주실 수 있을 지요? 이것은 약소한 제 성의이니 부디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백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례를 올리고 저물법기를 꺼내 기량 앞에 내려놓았다.
“백 형의 후손이면 내게도 조카나 다름없거늘 무슨 이런 걸 준비했는가. 어서 거두시게.”
기량은 그녀를 질책하고 손을 저어 무형의 힘으로 허리를 굽히고 있는 백소원을 일으켰다.
“아……. 감사합니다, 선배님.”
총명한 백소원은 상대가 진심임을 알고 저물법기를 다시 넣어두었다.
“백 형을 대신해 자네를 추천하는 것은 어렵지 않네. 그저 촉룡도의 입문 기준이 엄격해 자네의 자질이 부족하다면 나도 어찌 도울 방법이 없다는 것만은 알아두게.”
“물론입니다. 자질이 부족하다면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백소원의 대답에 기량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립과 백소원이 눈짓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도 백 수사와 같은 이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촉룡도에 들어가 수련을 계속하고 싶으니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입문을 하게 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후에 필히 보답하겠습니다.”
한립은 공수를 하고 차분히 목적을 밝혔다. 이번에는 기량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백소원이야 대충 살펴도 영근 자질이 나쁘지 않고 내문 장로의 후손이라 신분도 확실해서 어차피 십중팔구는 입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려비우란 진선 산수는 당연히 일반 제자로 입문할 수 없었고, 산수가 촉룡도의 장로가 되려면 모집 기준이 까다로웠다.
신분, 배경, 수행, 근골 등을 일일이 조사해 하나라도 문제가 있으면 추천한 사람이 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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