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53화 (1,310/2,000)
  • 1553화. 촉룡도

    *

    불구름을 거둔 백소원은 고공을 향해 증오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죽기 싫다면 산 아래의 범인들을 데리고 태아봉을 떠나게.”

    고공에서 한립의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이 빠져 있던 수사들은 백송석의 유골을 챙겨서 산 아래로 날아갔다.

    백 가의 청포 노인이 백소원을 향해 복잡한 눈길을 보내다 입을 열었다.

    “소원이 너도 우리와 함께 내려가자꾸나.”

    “저는 마두가 죽는 것을 제 눈으로 봐야겠어요.”

    백소원은 고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 답했다. 머뭇거리던 청포 노인은 한숨을 내쉬고 홀로 산을 내려가야 했다.

    그 시각, 고공의 검은 기운이 먹처럼 진해져 거대한 얼굴을 만들어냈다.

    “인족 육신을 버리게 만들어 마도수행을 망쳐? 내 너를 잘기잘기 씹어 먹어 주마!”

    섬뜩한 목소리가 하늘을 웅웅 울렸다.

    화르륵!

    거대 얼굴은 입을 벌려 작열하는 마염을 분출했다. 그러나 어느새 검은 장도를 든 한립은 손목을 살짝 움직였다.

    검은 도광이 솟아올라 마염을 양옆으로 가르자 그는 그 사이를 지나 거대 얼굴을 향해 장도를 마구 휘둘렀다.

    고공의 먹구름이 도광에 흩어지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새까만 뿔이 자라난 천마의 얼굴이 드러났다.

    천마 얼굴은 기습적으로 입안에 검은 소용돌이를 일으켜 한립을 빨아들였다. 입이 쿵 닫힌 뒤로 한립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런!’

    태아봉에서 올려다보던 백소원은 손바닥을 뒤집어 금색 구슬 하나를 그러쥐었다.

    구슬은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뇌전이 번득였는데 천외마두를 상대하는데 뛰어난 위력을 발휘하는 금강멸마신뢰였다.

    한참이 지나도록 천마 얼굴이 움직이지 않자 소녀는 직접 공격을 하려 했다.

    츠츠츠츳.

    그때 천마 얼굴 입가에서 은색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콰르릉! 콰쾅!

    이어서 은색 뇌전이 폭발하고 뇌붕이 튀어나와 한립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천마 얼굴은 산산조각이 나 검은 구름으로 흩어졌다가 전신이 새까만 노인으로 변해 허둥지둥 백소원을 향해 날아들었다.

    백송석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은 검은 장도를 휘둘렀다.

    슁!

    백소원을 붙들려 하던 새까만 노인은 도광에 의해 세로로 잘려 두 동강이 났다.

    촤악!

    검은 도광은 노인을 자르고도 멈추지 않고 태아봉에 떨어졌다.

    콰르르…….

    태아봉이 휘청이고 바위 파편과 먼지 그리고 놀란 산새들이 날아올랐다.

    혼란한 상황에 어쩔 줄 모르고 서있던 백소원은 아래쪽에 만 장 심연이 생긴 것을 보고 아연해졌다.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인 태아봉이 일격에 둘로 갈라진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가 별 생각 없이 갈라놓은 태아봉은 지도에서 사라지고, 선인이 마두를 축출했다고 전해지는 양단봉(兩斷峰)으로 불리게 된다.

    두 동강이 난 천마의 시체 중 한쪽은 심연을 기준으로 각기 다른 쪽에 박혀 있다가 어느새 하나로 합쳐져 기어 나오는 중이었다.

    “잠시 만요.”

    “자, 잠시 만요!”

    한립이 빠르게 하강해 노인의 잔해를 완전히 으깨려는데 머릿속과 귓가에 똑같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잘려 바닥에 떨어진 새까만 노인 잔해가 간절히 사정했다.

    “살려만 주시면 천마계약을 맺어 영원히 수사의 노복이 되겠습니다!”

    그 말에 한립은 묘한 표정을 지었고, 백소원은 한립이 허락을 하려는 줄 알고 깜짝 놀라 말리려 했다.

    바로 그때 한립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더니 허공에 새까만 그림자가 떠올랐다. 조금 전 의식연계를 통해 한립에게 멈춰 달라고 말한 마광이었다.

    “천마계약? 너 같은 얼간이를 데려다 어디에 쓰라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는 마광을 보고 바닥의 새까만 노인은 기겁했다. 겁에 질린 노인의 몸이 즉시 흩어지며 달아나려 했다.

    “어딜 가려느냐!”

    마광은 기회를 주지 않고 손바닥에서 검은 빛을 그물처럼 뿜어 노인이 변한 검은 기운을 잡아들였다.

    “악, 안 돼!”

    마광은 그물 속에서 다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간 천마를 한 입에 집어 삼켰다.

    탱.

    노인이 지니고 있던 저물탁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립은 그 사이 백송석의 가죽을 뒤집어쓴 천마가 사용하던 수레바퀴 영보 두 개를 챙겨 돌아왔다.

    마광은 흐릿하게 변해 그의 그림자로 돌아간 다음 머릿속에 몇 마디를 남기고 조용해졌다.

    “한 수사, 저 저물법기를 대신해서 살펴주시지요. 마계석(魔契石)을 찾으면 회복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새까만 노인을 잡아먹기 전보다 훨씬 더 목소리에 생기가 어려 있었다. 이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저물탁을 챙기려는데 하얀 빛이 쏜살같이 팔찌를 채갔다.

    미간을 좁힌 한립은 백소원이 팔찌를 꼭 쥔 채 서있는 것을 보았다.

    “저를 대신해 천마를 죽여주시고 소녀의 억울함을 풀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백 가의 물건입니다. 선인께서 겨우 이런 것을 탐내시지는 않겠지요.”

    백소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백송석을 가장해 극악무도한 짓을 벌이던 새까만 노인이 죽자 그녀는 속이 후련한 얼굴이었다. 마광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도 위축된 기색이 없었다.

    “오해가 있는 듯한데, 나도 백 가의 물건은 관심 없네. 그저 역외천마가 지니고 있을지 모를 마계석이 내게 중요하니 대신해 저물탁 안을 살펴 주게. 만일 마계석이 있으면 영석으로 값을 치르겠네.”

    “이것입니까?”

    한립의 말에 미소를 지은 백소원이 검은 팔찌를 살피다 검은 돌멩이를 꺼내들었다. 검은 안개가 감도는 돌멩이의 기운이 괴이했다. 한립은 마광의 반응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몇 개가 들어있든 전부 구입하지.”

    “음, 총 스무 개입니다.”

    “극품영석 스무 개로 그것들을 사지, 어떤가?”

    한립은 바로 극품영석 스무 개가 든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싫습니다.”

    “액수가 적단 뜻인가?”

    고개를 젓는 백소원을 보고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럴 리가요. 선배님의 신분에 물건 값을 적게 주어 속이실 리도 없고, 극품영석 하나만해도 백요국에서 상품 영석 백 개와 맞먹는 걸요. 증조부님이 살아계실 때 제가 1년에 받던 상품 영석이 고작 세 개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려 선배님께서 제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시는 겁니다.”

    백소원이 미소를 머금고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부탁?”

    한립은 백소원을 다시 보았다.

    그녀는 천마가 죽자 슬픔에 잠겨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잔꾀가 넘쳐나는 개구쟁이로 변한 듯했다.

    “예! 아직 무슨 부탁을 드릴 지는 생각을 못했는데, 절대 어렵거나 위험한 일은 아닐 겁니다. 아주 사소한 부탁입니다.”

    백소원은 열심히 한립을 설득했다.

    “……그러지. 생각할 시간은 딱 3일 주겠네.”

    “와, 약속 하셨습니다.”

    소녀가 빙긋 웃으며 작은 주머니를 던져주었다.

    “자네가 맡긴 임무도 완수했으니 보수를 주어야겠지.”

    “너무 소란을 피웠으니 일단 이곳을 떠나시지요. 보수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임무를 완수했는데도 보수를 내주지 않으면 선배님이 놔두셔도 무상맹에서 저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백소원은 한립을 향해 큰 눈을 깜빡이고 먼저 하얀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얼마 후, 두 사람은 태아봉에서 수천 리 떨어진 푸른 언덕에 내려섰다. 하얀 비단 천처럼 반짝이는 냇물이 흐르고 녹음이 푸르른 곳이었다.

    백소원은 언덕 위 무덤으로 달려가 비석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지, 드디어 마두를 죽였어요. 이제 안심하고 쉬세요.”

    백소원은 목이 멘 소리로 중얼거리며 엎드려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에 한립은 어서 보수나 내놓으라고 재촉할 수도 없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훌쩍이는 소리가 한참 들리다 멈추고 소녀가 걸어왔다.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서 실례를 했습니다. 죄송해요.”

    “사과할 일은 아닐세. 너무 상심하지 말게.”

    그녀를 돌아본 한립은 담담히 위로의 말을 건넸다. 눈시울이 붉어진 소녀의 눈가에 아직도 물기가 맺혀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길게 숨을 내쉰 백소원은 손바닥 크기의 녹색 영패를 불러냈다. 앞쪽에는 촉룡이란 두 글자가, 뒤쪽에는 뿔이 달리고 등에 날개가 돋은 괴상한 용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촉룡령입니다. 선배님께서는 고운대륙 출신이 아니라 모르시겠지만, 촉룡도는 입문 조건이 엄격해서 자질이 뛰어난 것은 물론 신분과 배경도 중요시 합니다. 오직 촉룡령을 지닌 자만이 자질에 상관없이 총룡도 내문에 들어갈 수 있지요. 저희 백 가 노조께서도 총룡도를 위해 큰 공을 세우셔서 상으로 받으신 물건이라 들었습니다.”

    소녀는 영패를 만지작거리며 조그맣게 설명했다.

    “귀한 물건이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걸로 촉룡도에 들어가라 당부하셨는데 원한을 내려놓지 못해 기회를 잃고 말았네요.”

    한숨을 쉬던 백소원은 푸른 영패를 내밀었다. 한립은 미미하게 표정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영패를 받아들었다.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신다고 하신 것은 참말이시지요?”

    “무슨 부탁을 할지 결정을 했나?”

    “백 가의 다른 사람들과는 정이 깊지도 않고 여러 가지 오해가 쌓여 더는 가문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촉룡령은 없지만 촉룡도에 한 번 가보려고요.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될지 모르니까요. 선배님께서 총룡령을 원하신 것은 분명 촉룡도에 들어갈 마음이 있으신 거겠죠? 그렇다면 저도 함께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백소원의 말은 한립도 예상 못한 것이었다.

    고운대륙은 광활했다. 이곳에서 촉룡도가 위치한 종명산맥까지는 매우 먼 거리라 그녀 홀로 떠나면 험난한 여정이 될 게 분명했다.

    화신기 수행을 지닌 그녀는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가능성 보다 도중에 죽을 가능성이 더 컸다.

    “마음을 확실히 정했다면 데리고 가주겠네. 허나 종명산맥까지 같이 가는 것으로 거래는 끝일세.”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저를 데리고만 가주시면 절대 성가시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

    활짝 웃음 짓는 백소원을 보고 한립은 옥으로 만든 새 모양의 하얀 베틀 북을 불러냈다. 방반의 저물법기에서 찾아낸 극품영보로, 거의 선기급의 능력을 발휘했다.

    서둘러 그를 따라 베틀 북에 오른 소녀는 알아서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도와주신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선배님!”

    “…….”

    베틀 북이 새 모양 허상으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 * *

    영맥이 흐르는 종명산맥은 천지영기가 왕성해서 온도가 비교적 낮은 데도 초목이 푸르고 영수와 영초들이 서식했다.

    얼마나 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구불구불 이어진 산맥은 거의 고운대륙 절반을 관통했고 높은 산봉우리들은 항상 푸른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산맥에서 수시로 들려오는 이상한 굉음이 종소리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도 종명산맥이었다.

    산맥도 유명했지만 그곳에 자리를 잡은 촉룡도 일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들은 북한선역 전체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촉룡도 일맥은 북한선역에서 가장 오래된 문파 중 하나였다.

    개파조사인 촉룡진인이 촉룡도를 세운 이후 줄곧 고운대륙 제일 명문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영향력은 고운대륙 전역에 뻗어 있었고, 걸출한 제자들이 많아 북한선역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거대 종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종명산맥 중부, 산맥 가장 자리에 위치한 거대 산봉우리는 정상이 구름에 묻혀 있었다. 그 산허리에 위치한 백옥 광장에 높은 탑들이 늘어서서 빛을 발했다.

    이곳은 총룡도의 외부 산문 중 한 곳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곳이기도 했다. 방문객이 많기 때문에 이런 곳이 종명산맥 곳곳에 수십 개는 되었다.

    하얀 장포를 입은 촉룡도 제자 몇이 광장의 영빈정(迎賓亭)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화신기 수행을 지닌 그들은 머리에는 뿔이, 등 뒤로는 날개가 자라난 괴룡 문양이 수놓아진 의복을 입고 있었다.

    “대체 몇 무리나 온 겁니까?”

    호리호리한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스물다섯 무립니다. 우리 촉룡도가 명성이 대단한 탓이니 어쩔 수 없지요.”

    포동포동한 사내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런데 너무 무료하지 않나요?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보라색 머리카락을 지닌 꽤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불만스레 말했다.

    “은 사매야 화신 최고봉에 이르러 연허기에 이를 날이 코앞이니 이곳에서 당직이나 서고 있는 것이 답답하겠지.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어?”

    호리호리한 사내가 웃음기를 띠고 물었다.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3할 정도밖에 자신이 없어요.”

    자줏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사매가 몰라서 그렇지 이곳 일도 좋은 점이 있다고! 통 큰 선배님을 만나 잘만 모시면 따로 영석을 받을 수도 있다니까. 특히 사매처럼 자태가 고우면 우리 같은 사내보다 영석을 받을 확률이 높지 않겠어?”

    통통한 사내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정말요?”

    순간 자발 소녀의 눈이 밝아졌다. 이때 종명산맥 바깥에서 하얀 둔광이 날아들었다. 하얀 베틀 북 위에는 누런 얼굴의 중년 사내와 하얀 치마를 입은 절색의 소녀가 서있었다.

    몇 년이 지나 여기까지 온 한립과 백소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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