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2화. 제천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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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맹에서 회원 간에 서로의 신분을 밝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제 본 모습을 보였으니 성의는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소녀는 얼굴처럼 목소리도 고왔다. 자신보다 월등히 수행이 높은 진선을 앞에 두고도 안절부절 하지 않고 제법 의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질문에나 답을 해보게.”
“제 이름은 백소원입니다. 말씀드린 백송석의 증손녀이지요. 오래전…….”
소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한립도 사정을 파악했다.
어릴 적 사고로 부모를 잃은 소녀는 영특하고 근골이 뛰어난 덕에 가문의 노조인 백송석 밑에서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나중에 진선경에 도전한다며 폐관에 들어갔던 노조가 도겁을 하다 천마에게 몸을 빼앗긴 것을 그녀만 알아보았고, 그 사실을 가문 사람들에게 알렸지만 믿어주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그의 친조부도 믿지 못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천마는 처음에는 몸을 사리다가 백송석의 기억까지 흡수한 뒤로는 백가 전체를 손에 넣고 태사의 신분으로 백우국 조정까지 마수를 뻗었다.
그때 이후로 백우국은 괴상한 사건이 빈번히 발생해 수시로 성이나 마을의 백성들이 실종되곤 했다.
물론 백우국에 위치한 수도 세력이 조사를 해보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천마의 행동이 점점 이상해지자 나중에는 가문에서도 눈치를 채는 이들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조사하기도 전에 천마에 의해 제거를 당했지요! 천마는 제 근골이 괜찮은 것을 눈여겨보아 수련을 위한 노정으로 삼으려고 줄곧 가문의 금지에 저를 가둬두었습니다. 할아버지도 그런 저를 구하려다 천마의 손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백소원은 괴로운 듯 말을 멈추었다.
“너무 슬퍼하지 말게.”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 가면과 선조의 신물을 몰래 쥐어주셨습니다. 촉룡도로 가서 오직 수련에 매진해 능력이 될 때 가문을 위해 복수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겨우 화신기인 제가 밤낮없이 수련만 한다고 해도 어느 세월에 그 마두에 대항을 하겠는지요.”
“그래서 무상맹에 임무를 등록해 대신 복수해 줄 사람을 찾은 것이군.”
이해가 가는 행동이었다. 진선경은 고사하고 화신기 수사가 연허기가 될 때에도 오행합일의 관문을 지나야 해서 무척 어려웠다.
대승기 이후의 천겁은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습니다. 가면을 통해 무상맹의 존재를 알게 된 저는 천마를 죽이기 위해 임무를 등록했습니다. 그간 천마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가면에 의지해 왔고요. 빠른 시일 내에 그자를 죽이지 못하면 언젠가 발각될 테지만요.”
“이제 상황은 이해가 되었네. 그런데 가면과 신물이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라 했는가?”
“예전에 촉룡도에서 내문 장로직을 맡으셨던 선인께서 백 가의 선조 중 한 분이십니다. 백 가가 백우국을 관리하게 된 것도 그분 덕이고요.”
“어째서 촉룡도로 선인 노조를 찾아가 천마를 죽여 달라 부탁하지 않은 것이지?”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선조께서 수천 년 전에 갑자기 실종된 후 그 분을 찾기 위해 나선 가문의 합체기 장로들까지 전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때를 기점으로 백 가의 세력이 크게 꺾였지요. 증조부께서 서둘러 진선이 되려다 천마에 당하신 것도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다 그리되신 것으로 압니다.”
백소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네가 한 말은 증거가 없으니, 직접 백송석을 보고 확인한 후 나서겠네.”
소녀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화신 후기의 수행으로 진선을 피해 다닌 그녀도 그리 단순한 인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 알겠습니다. 다음 달 월초에 백우국이 10년마다 한번 씩 거행하는 제천행사가 있습니다. 황제가 문무백관을 이끌고 경내의 태아봉(太峨峰)으로 가서 제를 올리는 행사라, 백송석도 당연히 나타날 테고요. 속세의 성과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손을 써야 범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네.”
“그런데 뭐라고 불러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백소원은 눈을 반짝이며 한립의 이름을 물어왔다.
“려비우일세.”
* * *
백우국 동부의 태아산맥(太峨山脈)은 산세가 웅장하고 풍경이 수려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중 동악신산(東岳神山)이라고도 불리는 태아봉은 가장 높은 봉오리로 백성들은 이곳에서 언젠가 진선이 비승했다는 전설을 믿고 있었다.
백우국 문인들도 종종 태아봉에 올라 자신의 시를 읊으며 재능을 뽐냈고 산봉우리 곳곳에 시를 새긴 돌을 남겨 놓아 매년 많은 백성들이 찾는 명소였다.
그런데 지금은 한 달 전부터 갑옷을 입은 병사들에 의해 통제가 되어서 일반 백성은 물론 황족이나 공신들도 산을 오르지 못했다.
다들 황제가 곧 하늘에 복을 기원하는 제를 올릴 것을 알고 있기에 불만을 품는 이는 없었다.
태아봉은 봉쇄가 되었어도 제례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산 아래 동진군(東秦郡)은 인근 고을에서 밀려든 백성들로 인산인해였고, 제례 당일에는 해가 뜨기 전부터 태아봉으로 향하는 관도 옆으로 백성들이 빼곡하게 늘어서서 황제의 용안을 보기 위해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황제와 문무백관의 행렬이 성 안으로 들어섰다.
황제의 호위병인 어림군(御林軍)에 둘러싸인 행렬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곧장 태아봉으로 향했다.
태아봉 정상에 마련된 원형 제단에는 이미 향로들이 놓여 있었고 황제를 위해 바닥에 깔린 붉은 비단 옆으로 예부 관원들이 늘어서서 행렬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평범한 용모의 중년 관원이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용모를 바꾸고 태아봉에 잠입한 한립이었다.
백소원은 다른 은닉술을 펼쳐 제단 바깥에 숨어 있었다.
한동안 관찰해보니 순찰을 도는 병사들 속에 원영, 축기기 수사가 십여 명 섞여 있었고 그 옆의 예부상서는 화신기 수사였다.
백 가에서 암암리에 심어 놓은 수사들이 틀림없었다.
두 시진 가량이 지나자 황제를 태운 수레가 태아산 정상에 도착했다. 겨우 약관을 넘긴 젊은 황제는 환관의 부축을 받아 수레에서 내렸다.
바로 제단으로 가지 않는 것이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다른 이들도 속속들이 도착했다.
어가의 바로 뒤에 선 마차에서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자색 장포 노인이 시종 두 명의 부축을 받아 어렵사리 내려섰다.
노인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두 눈이 흐리멍덩한데다 허리도 구부정했다. 옅은 미소를 띤 황제는 노인의 곁으로 걸어가 그와 함께 제단으로 향했다.
나머지 문무백관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한립은 눈동자 깊은 곳에 남색빛이 스치자 노인이 태사 백송석 임을 알아보았다. 잘 걷지도 못하는 노인네 흉내를 내고는 있었지만 의식으로 살피니 대승기 수사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황제와 백송석이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라 제단 위에 섰고 다른 이들은 아래쪽에서 멈추었다.
노인은 예부관원의 모습을 한 한립의 곁을 지날 때 걸음이 미세하게 느려졌다. 그리고 제단 밖 어딘가를 힐끗 본 노인의 눈이 찰나의 순간 밝아졌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려 선배님, 마두가 벌써 저희를 발견한 듯싶습니다. 설마 그걸 모르셔서 아직도 나서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요?”
한립의 머리에 다급한 백소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광 수사, 도와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한립은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의식연계를 통해 전음을 보냈다. 잠시 후 마광의 대답이 들려왔다.
“잘 숨기고는 있지만 천외마족 부류가 확실합니다.”
그 말에 한립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하시어 백성들을 두루 살피시옵고, 만세의 태평을…….”
그러는 동안 황제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제물로 소, 돼지, 양을 바치고 향을 피운 뒤 어가로 물러나 있었고, 백관을 대표하는 백송석이 제단 아래를 굽어보며 황제를 대신해 제문을 읽고 있었다.
기운이 너무 없어서 말소리도 작고 떠듬떠듬 읽는 모습이 중늙은이가 따로 없었다. 이때 한립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옆에 서있던 예부관원이 기겁해서 그를 말리려 했지만 그는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뒤였다.
휘이이잉!
제단 중앙에 나타난 그는 소매에서 푸른 돌풍을 일으켜 황제를 포함한 다른 이들을 산 아래로 이동시켰다.
범인들 틈에 숨어 있던 수사들은 영기의 빛을 일으키며 저항했지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떠밀리듯 태아산 아래로 내려갔다.
“저 계집이 도움을 청했나 보군?”
백송성이 제문 낭독을 멈추고 유유히 몸을 돌려 한립을 보았다. 구부정한 몸을 펴자 그에게서 권력자의 위엄이 느껴졌다.
냉소를 흘린 한립은 다짜고짜 주먹을 뻗었다.
노인은 주먹에서 느껴지는 기세에 눈꼬리를 꿈틀하고는 번득 뒤로 물러났고 주먹은 제단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콰아앙!
제단 전체가 박살이 나다 못해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열댓 개의 빛줄기가 나타나 한립을 포위했다.
“감히 우리 백 가 노조 대인을 습격해!”
푸른 장포 노인이 한립을 손가락질했다. 주먹을 거둔 한립은 그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백송석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화신 후기밖에 안 되는 백 가 수사들을 상대로 입씨름을 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때 가느다란 신영이 날아들었다.
“둘째 숙조님, 백부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려 선배님은 제가 천마를 멸하기 위해 모신 분입니다. 다들 저 마두에게 속아 헛되이 목숨을 잃지 마시라고요!”
분홍 연꽃무늬 치마를 입은 소녀가 절박하게 소리쳤다.
“닥치거라, 이 불효막심한 것! 네 할애비를 죽이더니 이제는 공공연히 가문의 명예를 떨어트리려 하느냐. 내 형님을 대신해 너를 손봐줄 것이다.”
백소원이 둘째 숙조라고 부른 청포 노인이 벌컥 성을 내더니 그녀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힐끗 그쪽을 보고도 한립은 개의치 않고 ‘백송석’에게 한걸음씩 다가갔다.
그가 다가갈수록 백송석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노인의 두 손에서 오색 화염을 품은 커다란 불 바퀴 두 개가 떠올랐다.
“이제 그만 진짜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썩 괜찮은 영보였지만 한립의 비웃음만 짙어졌다. 백송석은 대답 없이 주문을 외웠다.
휘이잉…….
바람 소리와 함께 급속도로 커진 오색 수레바퀴 두 개가 한립을 향해 굴러갔다. 태아봉 암석들은 불길이 지나자 그 열기에 녹아내렸다.
백가 수사들은 노조와 한립의 싸움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청포 노인의 눈빛에 전부 백소원 쪽으로 몰려갔다.
그들과 싸울 마음이 없는 백소원은 방어용 법보 세 개를 불러낸 뒤 불 구름으로 주변을 둘러쌌다.
백소원은 청포 노인보다 어리고 손아래 사람이었지만 이미 화신 후기에 이른 지라 일대 다수로 싸워도 한동안은 무리가 없었다.
한립은 수레바퀴를 피하지 않고 그저 한 발을 내디디며 금색 비늘이 어린 두 손바닥을 뻗었다.
쿠쿵.
금색 손바닥 허상 두 개가 나타나 활활 타오르는 오색 수레바퀴를 멈춰 세웠다. 백송석은 잠시 멈칫하더니 주문을 멈추고 다시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수레바퀴의 오색 화염이 더욱 맹렬하게 타올라 사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두 손으로 허공을 밀어 올리는 자세를 취하자 거대 손바닥이 수레바퀴를 들어 고공으로 투척했다.
다음 순간, 백송석 코앞으로 쇄도한 그는 갑자기 불끈 두꺼워진 한 팔로 상대의 머리를 내리쳤고, 미리 대비하고 있던 노인은 짐승 얼굴이 새겨진 원형 방패를 불러내 공격을 막았다.
퍼억!
산도 무너트릴 괴력에 방패가 움푹 들어가고 노인도 튕겨나갔다. 백송석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에 한립이 주먹을 쥐고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주먹이 날아들자 백송석은 부서지기 직전의 방패를 들어올렸다.
퍽!
결국 짐승 얼굴 방패는 주먹을 막지 못하고 가운데가 뚫리고 말았다.
쿠앙!
엄청난 진동과 함께 주먹에 가슴이 움푹 파인 백송석이 고개를 쳐들고 입을 벌렸다. 그 안에서 검은 마기가 빠져나와 하늘을 뒤덮었다.
태아봉을 중심으로 수백 리가 밤이 된 것처럼 어둑해졌다.
“이게 갑자기 무슨…….”
“다들 공격을 멈춰보세요!”
“소원아, 네 말이 전부 사실이었던 게냐!”
백소원을 둘러싸고 공격하던 백 가 수사들은 천마가 빠져나가자 힘없이 추락하는 노인의 빈껍데기를 보고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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