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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51화 (1,308/2,000)

1551화. 천마의 탈사(奪舍)

*

행운원주에서 내린 2백여 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인족이었고 이종족이 일부 섞여 있었다. 인족 중에는 소수지만 범인들도 몇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범인으로 보일 뿐 영계의 연체사와 비슷해 몸을 단련해 무력을 키우는 이들이었다. 산길을 따라 쭉 걸어간 그들은 좁지만 높다란 문을 지나 너른 대청 안에 이르렀다.

텅 빈 대청 안, 한쪽 구석에는 탁자에 놓은 향로만이 솔솔 연기를 뿜고 있었고 그 뒤로 의자에 앉은 새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자색 장포 노인이 눈을 감고 규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립이 그를 발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승기 수사인 노인이 눈을 번쩍 떴다. 곧이어 한립의 머릿속에 노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진선경 수행을 지니신 분이 어째서 합체기 수사의 기운을 하고 계신지 그 연유는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촉룡도의 관할에 들어오신 이상 반드시 촉룡도의 규칙을 따라주셔야 합니다.”

“어떤 규칙인지 들어보겠네.”

한립이 전음으로 답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겨우 대승기 수사가 그의 수행을 간파한 것에 약간 놀란 상태였다.

“저희 촉룡도는 외부수사를 배척하지 않으니 걱정하실 것은 없으십니다. 그저 진선으로서 속세의 분쟁에 관여해서는 안 되고 범인들의 질서를 무너트리거나 함부로 범인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당부 드리겠습니다.”

“잘 알았네. 그러도록 하지.”

“그럼 선배님의 여정이 즐겁고 순탄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한립의 협조적인 태도에 자색 장포 노인이 공손히 말을 마쳤다.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다른 이들을 따라 대청 오른쪽의 쪽문으로 걸어 나갔다.

바깥의 광활한 백석 광장에는 기이한 영수들이 끄는 마차들이 산을 내달리거나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주로 육체를 단련하는 범인들을 위한 대체 이동 수단이었다. 멀리 굽이굽이 연달아 이어진 산맥 위로 새하얀 눈이 덮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고운대륙에 이른 한립은 이곳이 황란대륙보다 훨씬 춥고 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립은 그 자리에서 옥간을 하나 꺼내 의식을 불어넣었다.

무상맹에서 거래를 통해 얻은 추적지도였는데 흑풍해에서 볼 때보다 훨씬 상세한 지형이 담겨 있었고, 지도에 붉은 선이 나타나 그가 위치한 응수도와 동북 방향의 백연성(白鳶城)을 잇고 있었다.

백우국(百佑國)이란 국가에 위치한 성까지는 아직 거리가 꽤 남아 있었다. 안전을 위해 합체기 수행에 부합하는 속도로 날아가면 십여 일은 걸릴 거리였다.

고운대륙은 황란대륙과 달리 어딜 가나 영기가 농염했다. 그만큼 수도종문들도 많아서 이동하는 동안 괜한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다.

한립은 방향을 확인하고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대략 열흘 정도 이동하던 그는 돌연 흔들리는 눈빛으로 눈 덮인 설산 위에 멈추었다. 조금 전 그의 의식 깊은 곳에서 청죽봉운검과 해 도인의 기운에 대한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처럼 강대한 의식을 지니지 못했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아주 미약한 기운이었다. 그는 설산의 골짜기로 내려가 원숭이라도 된 듯 펄쩍 뛰어 평평한 바위 위에 올라섰다.

그는 바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빠르게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그의 의식이 머리카락보다 가늘게 퍼져나가 희미한 의식연계를 따라 청죽봉운검과 해 도인의 종적을 찾기 시작했다.

뭔가 잡힐 듯 말 듯 하고 있을 때, 주변을 순찰하던 의식 가닥들이 느닷없이 끊겨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의식연계가 중단되었다.

누군가 고의로 의식을 차단한 것 같았다. 한립은 수결에 변화를 주어 다시 시도를 해봤지만 결국에는 눈을 떴다.

“되찾기가 쉽지 않겠구나…….”

그는 한참을 어두커니 바위에 앉아 있다가 백연성으로 날아올랐다.

* * *

3일 후.

두 강이 교차하는 하얀 성 밖에 푸른 둔광이 뚝 떨어졌다.

이마가 불룩 튀어나오고 곱슬곱슬한 수염을 지닌 사내는 어울리지 않게 맑은 눈을 지니고 있었다. 변장을 한 한립이었다.

성으로 들어가기 전 무상맹 가면으로 용모를 바꾼 그는 수행을 완전히 감추고 범인처럼 걸어서 백연성으로 다가갔다.

성 주변에는 눈이 쌓여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쌀쌀해서 지나는 이들 대부분이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축기기 수행을 지닌 수사들로 딱히 검문을 하기 보다는 그냥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백우국 내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한 백연성의 백성들은 범인이 대부분이라 관리하는 이들도 세속화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성 안으로 들어선 한립은 또 옥간을 꺼내 지도를 보았다. 붉은 선은 그를 성 동쪽의 주루로 이끌고 있었다.

이리저리 골목을 꺾어 그다지 북적이지 않은 길을 걷다보니 주루를 홍보하는 깃발이 보였다. 주루의 입구에 이른 한립은 범인들이 빚은 곡주의 진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의 기억 속의 곡주와는 약간 달랐다.

어릴 적, 장 숙부는 그의 집에 들를 때마다 마을에서 빚은 백주를 들고 와 농가의 조촐한 반찬을 안주삼아 아버지와 술잔을 기울였었다. 너무 어릴 때라 마셔보지는 못했어도 냄새를 맡아보면 코가 얼얼해지곤 했었다.

오랜 시간 떠올리지 못하던 기억에 멍하니 서있던 그는 문턱을 지나 주루로 들어섰다.

막 점심때가 지나 빈자리가 많고 한가해 보였는데 사내 둘이 벽 쪽 식탁에 앉아 땅콩 같은 것을 씹으며 떠들고 있었다.

어깨 한쪽에 수건을 걸친 점소이가 한립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미소를 띠우고 다가왔다. 그런데 점소이가 입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 그의 어깨를 밀어 옆으로 치웠다.

“단골손님이시니 내가 안내할 것이다. 너는 가서 다른 일이나 보거라.”

뚱뚱한 중년인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점소이 뒤에서 걸어 나왔다.

“쳇! 처음 보는 구만. 뭐가 단골이라는 거야?”

점소이는 장궤가 한립을 안내해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투덜거리다 빈 식탁에 기대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말없이 뚱뚱한 장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간 한립은 2층 가장 안쪽의 우아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장궤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휙 몸을 돌려 문을 닫고 손을 저어 방음 금제를 발동했다.

“수사, 이리로 앉으시지요.”

두툼한 팔로 자리를 권한 그의 얼굴에 이전의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신물은 가지고 오셨겠지요? 괜찮으시면 제가 확인을 좀 해야겠습니다.”

뚱뚱한 장궤도 그의 맞은편에 앉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한립이 임무와 추적지도가 기록된 옥간을 탁자 위에 놓자 내용을 확인한 장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상맹 수사가 맞으시군요.”

“이제 구체적인 임무를 알려주시지요.”

한립도 빙빙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 전에 따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뜸을 들이는 장궤의 모습에 한립이 눈살을 찌푸렸다.

“수사의 수행 말입니다. 임무를 완수할 능력이 되는지 확인이 되어야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장궤는 한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말에 한립은 푸른 기운을 일으켜 진선경 초기의 수행을 드러냈다.

약간만 방출했는데도 뚱뚱한 장궤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숨도 잘 못 쉬었다.

그 모습에 서둘러 기운을 거둔 한립의 눈에 의심이 어렸다.

상대는 무상맹 가면으로 용모와 수행을 감추고 있어 그의 의식으로도 정확한 수준을 알 수 없었지만 적당히 실력을 보여주려 방출한 기운에 저리 쩔쩔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제 짐작이 맞다면 진선경 초기 수사시겠지요?”

창백한 얼굴로 가쁜 호흡을 하던 장궤가 호흡을 고르고 물었다. 한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그렇다면 이 임무는 받지 마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진선경 이상의 수사면 누구나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는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등록한 임무의 내용은 어떤 이를 죽이는 것입니다. 수사와 동급인 진선경 초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지만 동급 수사를 넘어서는 실력을 지닌 자라, 수사께서 괜히 목숨을 잃으실까 염려가 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동급 수사라면 이기지는 못해도 싸우다 목숨을 잃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안심하고 임무 내용을 말해 주시지요.”

잠시 고민하던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그의 자신 있는 어투에 장궤도 더는 말리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수사께서 죽여 주셔야할 사람의 이름은 백송석, 백우국 재상 태사(太師)입니다. 그 자를 죽이는데 성공하시면 약속한 보수를 드릴 것입니다.”

“범인 국가의 태사란 말입니까? 촉룡도 경내에서는 수도자가 함부로 속세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압니다. 진선경에 이른 선인이 어찌 일국의 중천으로 일하고 있단 말입니까.”

뜻밖의 이야기에 한립은 연이어 질문을 했다.

“아, 고운대륙 분이 아니시군요?”

장궤는 바로 답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잘 모르시겠지만 고운대륙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범인들이 살아가고, 그들이 건립한 크고 작은 국가만 해도 백만 개는 됩니다. 그 중 백우국 같은 국가들은 겉으로는 속세의 황실이 관리하는 듯 보이지만 배후에 수도 가문들이 버티고 있어 그들이 실권자나 다름없습니다.”

“그 말은 백송석의 가문이 백우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단 뜻으로 들립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수도가문 뒤에는 또 다른 수도종문 세력이 있고요. 그저 속세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규정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가문이 멸족을 당할 위기가 아니면 수도종문이 나서지 않아 일반 백성들은 배후 세력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백송석을 치면 그를 지지하는 종문 세력과 척을 지게 되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 촉룡도의 비위를 거스를 수도 있고요.”

한립은 근심을 드러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죽이고 싶은 건 진짜 백송석이 아니니까요!”

“…….”

고개를 젓는 장궤의 알 수 없는 말에 한립이 입을 다물자 상대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수사께서 죽여주실 것은 역외천마입니다. 백송석이 승선(昇仙) 도겁을 치를 때 그의 육체를 빼앗은 것이지요. 탈사(奪舍)에 성공한 천마는 들키지 않기 위해 진선경 초기의 수행을 대승기 수준으로 억누르고…….”

“잠깐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천마가 그렇기 은밀하게 벌인 일을, 그래서 전혀 소문이 나지 않은 일을 수사는 어찌 알게 된 것입니까?”

한립은 상대의 말을 끊고 물었다.

“그건…….”

장궤는 입만 달싹거리고 대답하지 못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 이 점을 확실히 설명하지 못한다면 납득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말에 장궤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한립도 그를 재촉하지 않아 조용히 시간만 흘러갔다.

숙고하던 장궤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두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갔다. 푸른 물결이 일고 토끼 머리 가면을 벗은 장궤는 푸른빛에 휩싸여 역동적으로 모습이 변해갔다.

곧 뚱뚱하던 사내는 어디로 가고 겨우 열 일고여덟 살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묘령의 소녀가 서있었다.

살구 씨 같은 동그랗고 큰 눈을 지닌 소녀는 아직 애티가 흘렀지만 분홍색 연꽃무늬 치마를 입은 모습이 더없이 맑고 수려했다.

그녀의 미간에는 옅은 주름이 져있었는데 그게 소녀의 미색을 깎아내리기보다 오히려 동정심을 일으켰다. 한립은 이제야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소녀는 겨우 화신 후기 수사였다.

‘저 수행으로 어떻게 무상맹에 들어간 거지?’

찬찬히 뜯어보아도 뭔가 콕 집어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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