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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49화 (1,306/2,000)

1549화. 심해 조개

*

한립은 바깥의 흉흉한 뇌전 세상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무질서해 보이는 와중에 현묘한 변화가 무궁무진하게 숨어 있어 그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바로 그때, 허공의 먹구름이 출렁이더니 그 아래 해수면이 격렬하게 반응을 했다.

먹구름에서 내리 꽂힌 뇌전이 무언가 거대한 물체에 부딪친 듯 쿵! 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오는 동안 수없이 본 일이라 한립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보랏빛을 방출한 과해뇌주가 즉시 방향을 조정해 빙글 돌아가려하는데 먹구름은 더 빨리 거대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치지지직!

주변의 뇌전들이 먹구름층의 소용돌이로 몰려들어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작열하는 하얀색의 뇌전으로 변했다.

쿠쿠쿵.

그 안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과해뇌주는 전속력으로 비행해 소용돌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펑펑펑펑……!

다음 순간, 거대 소용돌이 중심에서 수없이 많은 거대 뇌전들이 분출되어 아래쪽 해역 수천 리에 떨어져 내렸다.

뇌전들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숲이 뒤집어져 통나무들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간신히 소용돌이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과해뇌주는 뇌전삼림을 피할 수 있었다.

한립은 눈을 반짝이며 그것을 지켜보았다. 이게 뇌폭해양에서 가장 알아주는 뇌폭(雷暴)이라는 것이었다.

다양한 뇌폭의 종류 중에서 뇌전소용돌이는 흔한 축에 속했다.

그가 오는 동안 본 것만 해도 안개 뇌폭, 조류 뇌폭, 회오리 뇌폭 같은 무시무시한 뇌폭들이 많았다.

그러나 손극의 말대로 과해뇌주가 굳건히 버텨줘서 무사히 이동하고 있었다.

열심히 수백 리를 이동한 과해뇌주는 먹구름 소용돌이에서 멀어지는 중이었다. 뇌전삼림을 떨군 소용돌이는 천천히 작아지다가 사라질 것이다.

“……!”

시선을 거두려던 한립은 소용돌이 속 가장 깊은 곳의 검은 구멍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거리가 워낙 멀고 아직 잔류한 뇌전이 간섭을 해서 제대로 본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뭔가가 있었다.

뇌폭해양 심처의 강력한 공간압력에 저항해 의식을 퍼트린 한립은 검은 구멍 속에 있는 엄청나게 큰 눈알을 확인했다.

수백 장에 이르는 눈알은 동공이 고양이처럼 수직으로 기다란 모양이었고 눈에 감정이라고는 실려 있지 않았다. 의식을 극한까지 퍼트렸는데도 눈알 주인의 모습은 알아볼 수 없었다.

주황색 눈알의 크기로 가늠하건데 그가 이전에 보았던 어떤 생물보다 큰 것이 분명했다.

이때 뜻밖에도 주황색 눈알이 한립이 의식을 감응하고 미세하게 눈동자를 굴려 그가 있는 쪽을 보았다.

가슴이 철렁한 한립은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여 의식을 회수하려 했지만 늦고 말았다. 엄청난 기운이 공간을 뛰어넘어 묵직한 망치처럼 그의 혼백을 강타했다.

욱!

입에서 피를 잔뜩 쏟아낸 그의 얼굴은 삽시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심하게 떨리고 있는 혼백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언제라도 꺼질 것만 같았다.

일촉즉발의 순간, 그는 의지를 굳건히 하며 연신결을 운용했다. 머릿속에 의식의 힘이 수차례 돌며 수정실들로 변해 혼백을 감싸고 떨림을 멈추려 했다.

수정실들은 서로 엉켜 사슬의 모습으로 혼백을 겹겹이 보호했고 이에 혼백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서둘러 단약 몇 개를 삼키고 작은 옥병에서 반절쯤 남은 보라색 액체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예전에 지기화신을 제련하고 남은 탄혼화 액체로 제련한 혼백을 보하는 영액이었다.

혼백과 의식 손상에 이만한 것이 없었다. 영액과 단약의 작용으로 그의 안색이 호전되었다. 그는 깊게 호흡하며 멀리 소용돌이 쪽을 살폈다.

과해뇌주가 쾌속으로 날아가 준 덕분에 꽤 멀리 이동했고 검은 구멍도 먹구름에 덮여 더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립은 방심하지 않고 팔을 휘저었다.

수백 개의 빛이 방안 곳곳으로 떨어져 잇달아 금제를 만들어냈다. 방반에게 얻은 검은 장도까지 불러내 단단히 쥐었다.

장도는 품질이 썩 괜찮은 후천선기로 파괴력이 강한 법칙의 힘을 함유하고 있었다.

그는 동시에 허공에 영보까지 여러 개 띄우고는 긴장된 얼굴로 사방을 경계했다. 거의 반 시진이 흐를 동안 선박은 평화로웠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한립은 천천히 긴장을 풀고 검은 장도와 영보만 넣어두고 주변의 금제들은 남겨 두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는 푸른빛을 일으키고 눈을 감았다.

며칠 뒤 푸른빛이 사라졌을 때 한립은 기력을 회복하고 눈을 떴다.

“그건 뭐였을까…….”

혼백의 손상을 절반 정도 회복한 그는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거대 눈알의 주인과 그의 격차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거인 앞에 선 개미라도 된 것 같았다.

상대의 시선 한 번에 그는 말 그대로 혼비백산할 뻔했다.

손극은 뇌폭해양에 뇌전의 힘을 조종하는 강력한 뇌수가 산다고 했는데 묘사를 들어보니 기껏해야 진선경 수사와 비슷한 수준의 뇌수였다.

한립은 손극의 다른 말도 떠올렸다.

뇌폭해양에 이런 공간의 압력이 생겨난 것은 하늘만큼 큰 짐승이 그 위에 도사리고 있어서라는 전설도 있다고 했었다. 그게 사실이고 거대 눈알의 본체가 그 하늘만큼 크다는 짐승일까?

마음이 복잡해지자 한립은 생각을 그만 두었다. 어렵사리 위기를 모면했으니 다시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반 년 후, 과해뇌주 꼭대기 층의 넓은 대청 안.

뇌폭해양을 건너는 수년 동안 선실에만 있는 것은 너무 무료했기에 선박에는 주루와 다실 같은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몇몇 위험 지역을 지나온 선박의 사람들은 점점 바깥의 천둥소리에 익숙해져 이곳에 모여 술을 마시고 담소를 나누었다.

한 탁자에 손극과 한립이 마주 앉아 있었다. 미소를 띤 손극이 붉은 술병을 들고 술잔을 채웠다.

“려 형, 이게 제 고향에서 유명한 홍학주(紅鶴酒)입니다. 맛이 그만이지요.”

손극의 말에 한립이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애주가인 손극은 저물법기 속에 각양각색의 명주들을 담아 다녔는데 혼자 마시는 것은 재미가 없다면 종종 한립을 청해서 함께 마셨다.

술에 취하면 경전에서 본 선계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잔뜩 늘어놓았기에 한립도 즐겁게 그와 술잔을 기울였다.

창밖에서는 밀집한 뇌운이 거대하고 밝은 뇌전들을 마구 내지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전율이 감도는 광경이었다.

이미 뇌폭해양 중심지대에 이른 과해뇌주는 금제를 최대한 강화한 채 이전보다 훨씬 느리게 이동했다.

“그야 말로 뇌전세계가 아닙니까! 실력이 부족하지만 않았으면 뇌폭해양 곳곳을 누비고 다닐 수도 있을 텐데요. 선인이 남긴 필담(筆談)에서 본 것인데, 뇌폭해양이 위험한 만큼 바깥에서는 구할 수 없는 진귀한 뇌전재료들이 풍성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뇌전법칙을 함유한 절세의 보물까지도요.”

손극은 창밖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기연과 조화는 항상 위험과 공존하는 법이지요. 물론 보물을 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확률도 높겠지만요.”

“려 형 말씀이 옳습니다! 자, 한 잔 더 하시지요!”

그들이 한담을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는데 바깥의 낌새가 이상했다.

콰르릉!

뇌운이 요동을 치는 범위가 대단히 넓어 시야 끝까지 먹구름들이 출렁였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또 뇌폭인가 봅니다!”

놀란 손극이 일어났고 한립도 그를 따라 대청의 출구로 향했다. 과해뇌주의 최상층은 뇌폭이 발생하면 가장 흔들림이 심한 곳이라 다들 피하는 중이었다.

뇌전들이 결집해 거대한 뱀 떼를 이루고 해역으로 떨어졌다.

콰르르르.

뇌전 뱀이 떨어진 해수면이 터져나갔다.

“유사뇌폭(游蛇雷暴)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은 서둘러 주루를 떠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유사뇌폭은 위력이 가장 큰 뇌폭이라 과해뇌주도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좌우로 움직이며 뇌전 뱀들을 피하는데 주력했다.

“술 마시다 흥이 다 깨졌군요. 려 형, 저는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술자리가 일찍 파한 것이 탐탁지 않았는지 손극은 한립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저건?’

창밖을 쳐다보던 한립이 몸을 돌리려다 눈빛이 달라져 의식을 퍼트렸다. 선박에서 오륙백 리 떨어진 해수면이 일렁이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수백 장에 달하는 남색의 매끈한 물체가 소용돌이 중간에서 떠올랐는데 껍데기에 뇌전 무늬가 가득한 거대 명주조개였다.

그것은 방대한 진선급 기운을 발산했다.

천천히 입을 벌린 조개 안에서 상아처럼 생긴 보라색 촉수 두 개가 빠져나왔고 그 사이의 구멍에서 보라색 안개가 분출되었다.

휙!

조개껍데기 속에서 사람 머리통만한 물체가 날아올랐다. 굵직한 보라색 뇌전에 둘러싸인 물체는 구슬처럼 보였다.

보라색 뇌전 구슬의 등장에 주위의 뇌전들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굵은 뇌전들이 모여들어 구슬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뇌전을 머금은 보라색 구슬이 더욱 밝게 빛나자 조개껍데기 속에서 흥분한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진주는…….”

한립은 눈이 번쩍 뜨였다. 거리가 멀어 자세히는 살펴볼 수 없었지만 보라색 구슬은 강렬한 법칙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웅!

침음하던 그는 걸음을 재촉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몇 겹의 진법금제를 발동했다. 그리고 몸을 날려 허상으로 변해 바깥으로 날아올랐다.

거대 선박 주변의 금제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태일화청부를 몸에 붙인 한립은 거대 조개를 향해 날아갔다.

* * *

뇌폭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소용돌이 중간의 거대 조개가 분출한 보라색 구슬은 흐릿하게 뇌전 입을 형성해서 무궁무진하게 제공되는 뇌전의 힘을 포식하고 있었다.

천지를 뇌전이 뒤덮는 뇌폭이야 말로 구슬의 힘을 키우기에 가장 적합한 때였다.

끼이익!

그런데 멀러서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거슬리는 고음의 소리가 천둥소리를 뚫고 낭랑하게 울렸다. 조개껍데기 사이에서 눈처럼 보이는 청록색 빛덩이가 떠올라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 수평선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이쪽으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거의 웬만한 섬 크기의 보라색 고래가 거대 조개 위쪽의 구슬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고래의 기운은 거대 조개 이상이었다.

콰릉!

거대 조개는 보라색 구슬을 곧장 회수하지 않고 껍데기를 활짝 벌려 굵은 보라색 뇌전 두 줄기를 뿜어냈다.

뇌전이 교룡처럼 고래를 향해 달려들었다.

츠츠츳!

보라색 뇌전이 지난 공간은 부들부들 떨렸고 타는 냄새가 났다. 그 모습에 거대 고래도 입을 쫙 벌려 새하얀 이빨로 두 보라색 뇌전 줄기를 물어뜯었다.

새까만 뇌전 빛이 번득거리고 고래 이빨이 보라색 뇌전 줄기들을 두 동강 냈다. 이번에는 거대 고래가 등에 난 새까만 구멍에서 뇌전 빛을 번득였다.

콰르릉!

거대한 검은 뇌전 교룡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거대 조개를 향해 쇄도했다. 조개가 낮게 으르렁 거리자, 뇌전의 힘을 잡아먹던 머리 위 보라색 구슬이 앞으로 나서서 검은 뇌전 교룡과 충돌했다.

콰릉! 쿠콰쾅!

검은 뇌전 교룡이 터져 길이가 제각각인 검은 뇌전빛으로 흩어져 거대 조개를 포함한 근방 십여 리에 우수수 떨어졌다.

날카로운 검은 빛이 닿는 자리마다 폭음이 들려왔다. 이때 검은 뇌전 빛들이 돌연 한곳으로 빨려 들어가기 사라졌다.

그러나 거대 조개는 작은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고 앞쪽에 보라색 구슬이 검은 뇌전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구슬이 검은 뇌전 빛들을 죄다 삼킨 것이다.

거대 고래는 열을 받아 씩씩거리며 커다란 꼬리로 허공을 쳐서 그 반동으로 거대 조개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거대 조개도 전혀 두려워 않고 보라색 뇌전에 휩싸여 응전했다. 두 방대한 물체가 해수면 위에서 싸우는 통에 하늘과 바다에 충격이 퍼져 나갔다.

격투를 벌이는 두 짐승들 사이로 십여 리 밖 허공에 흐릿한 인영이 조용히 숨어 있었다.

누군가 바로 옆에 서있다 해도 의식의 힘이 그를 뛰어넘지 않는 한 태일화청부를 이용해 기운을 감춘 그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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