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7화. 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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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큼 와서 벌을 받지 않고 뭐하는 것이냐!”
그가 마음을 정하기 전에 강시 사내가 소리를 높였다. 방반은 공격을 하지도 못하고 얌전히 꿇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방반이 장도를 들고 달려든 순간 한립도 눈앞이 뿌옇게 변하며 환영진에 빠졌다.
휘잉!
귓가에 강한 바람이 스치는 고공에서 그는 더 높은 곳으로 솟아오르는 중이었다.
고공에는 무표정한 거대 얼굴이 흐려지며 눈부신 보랏빛이 반짝인 뒤 하얀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
“선계의 문!”
‘이건…… 내가 도겁 비승을 하는 중인 것인가?’
상대해야 할 환각이 설마 도겁 비승을 다시 하는 것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콰르릉 콰콰쾅!
그가 놀라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 귀청을 찢을 듯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굵직한 뇌전 일곱 줄기가 거대 얼굴의 입 속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무너트리고 땅이 꺼질 듯한 파멸의 기운이 밀려들었다.
무심코 한 손을 펼쳐 금색 뇌화를 연달아 쏘아 보내고 고개를 숙이니 그의 손에 익숙한 촉감의 암녹색 장검이 들려 있었다.
현천참령검이었다.
머리 위쪽의 무시무시한 압력을 감지한 그가 잠시 주저하다 현천참령검을 손에 들고 암녹색 빛줄기로 변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쿠콰쾅!
굉음이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고 화려한 광채가 강렬한 법칙을 품고 퍼져나갔다.
고공에서 추락하기 시작한 한립은 피투성이가 된 온몸이 너무 아파 불 속에서 타 들어가는 나무가 된 기분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암녹색 목검마저 가루로 변해서 흩날리고 있었다.
고공의 거대 얼굴이 실체화되어 아무런 감정 없이 냉랭하게 만물을 내려다보고 펑! 하고 사라졌다.
이어서 점점 열리고 있던 선계의 문이 닫히고 그 자리에는 거대한 공간균열만 남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한립을 집어 삼키려 들었다.
빛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어둠의 공간은 그에게만 기이한 흡입력을 발생해 끌어당기고 있었다.
힘이 쫙 빠진 한립은 체내의 법력을 조금도 일으킬 수 없어 몸이 어둠의 공간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건 그저 환상이야. 진짜가 아니야. 진짜일 리 없…….”
한립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이게 환상이라는 것을 주입했다. 의식의 바다에 거친 파도를 일으켜 빨리 깨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이때 고공의 균열에 앞에서 파동이 일고 검은 허상 세 개가 튀어나왔다.
몸은 꼼짝할 수 없었지만 눈은 밝아서, 유령처럼 흐느적거리는 세 허상의 몸통에 그와 똑같이 생긴 머리가 붙어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건 심마? 아니, 역외천마인가…….”
한립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지척에 이른 천마 허상들이 충돌해 그의 몸은 자기처럼 깨져나갔다.
푸른 혼백이 된 그는 몸이 박살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쩝쩝쩝쩝…….
천마 허상들은 아귀처럼 달려들어 그의 혼백을 야금야금 뜯어먹었다.
푸른빛이 뜯겨나가 천마 허상들에게 삼켜질 때마다 극통이 밀려와 인내심이 뛰어난 그도 참을 수가 없었다.
피부가 벗겨지고 뼈가 갈려나가는 통증이 그를 갉아먹어 점점 의식이 혼미해져갔다. 그와 같은 얼굴로 히죽거리며 푸른 혼백을 뜯어먹는 허상들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이, 이게 정말 환상이란 말인가?’
무력감에 빠진 한립의 마음에 실낱같은 의문이 생겨났다.
‘정말 내가 도겁에 성공하지 못해서 영환계도, 류낙아도, 흑풍해도, 감구진도 전부 역외천마가 그를 농락하며 만든 환상이 아니었을까?’
‘영계 제일의 대승기 수사도 역외천마를 어쩌지 못하고 이렇게 당하는 구나…….’
절망이 찾아들고 있었다.
의식이 몽롱해진 한립의 푸른 혼백이 옅어지다 거의 투명하게 사라지려고 하고 있었다.
“한 수사, 환각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우리 역외천마들은 실제로 저렇지도 않단 말입니다.”
갑자기 냉랭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와 한립은 절망에서 깨어났다. 탁해지던 그의 눈빛에 빛이 들어왔다.
그의 뇌리로 서늘한 기운이 흘러들어 고통을 주었다. 동시에 즐겁게 그를 뜯어먹던 천마 허상들이 처량한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고, 한립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는 진법 원반을 들고 마지막 지점을 짚은 그 자세 그대로였다.
전방에는 방반이 달려들던 자세로 우두커니 멈춰서 딱 팔뚝만큼의 거리를 남겨두고 장도로 한립의 미간을 겨누고 있었다.
돌기둥에서 흘러나온 화려한 광채는 부단히 흑의 청년의 몸으로만 흘러들어갔고 더는 한립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마광 수사!”
한립은 의식연계를 통해 마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환각에 당할 뻔한 것을 생각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진법이 너무 막강해서 천외마족인 제가 본래 이런 류의 수법에 능하고 수사의 의식의 힘이 보통의 진선경 수사에 비해 강하지 않았더라면, 중상을 입은 제가 돕고 싶어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마광의 탄식 어린 대답에 한립도 침음하다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진법의 오채색 광채를 따라 한립도 광선으로 변해 방반의 환각 속,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방반은 무릎을 꿇고 벌벌 떨면서 ‘살려주십시오, 사존!’, ‘제발, 용서를!’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대전 안에 그가 나타난 것도 모르는 듯했다.
성큼성큼 걸어간 한립은 방반 앞의 흐릿한 풍경 속에 사슬을 칭칭 감은 강시 같은 중년인이 의자에 기대앉은 것을 보았다.
“어째서 허락도 받지 않고 격원법련을 사용한 것이냐. 네 죄를 알렸다?”
강시 사내의 질책에 벌벌 떨던 방반이 다급히 해명했다.
“사존께 아룁니다. 제자도 정말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상대가 너무 강해 저희 셋 중 하나가 목숨을 잃고 나머지도 원기를 크게 상한 상태였습니다. 격원법련을 사용하지 않고는 그 자를 죽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대답에 흥미를 느낀 한립은 천천히 강시 사내 앞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신기하게도 그의 모습이 강시 사내와 겹쳐져 완벽하게 환각 속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대체 상대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더냐?”
한립은 강시 사내의 말투를 따라했다.
“하계에서 비승한 한립이란 선인입니다. 시간법칙의 힘을 함유한 특수한 수정 알갱이를 지니고 있어 저희 셋이 그걸 빼앗기 위해 그 자를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방반의 답변에 한립은 내심 한숨을 푹 쉬었다. 놀랍게도 수정 알갱이 때문에 악연이 시작된 것이었다.
“호오? 그런 진귀한 물건을 그 자가 어찌 얻은 것인지는 알아냈느냐?”
“그건……. 상대를 붙들지 못해 저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겠지?”
“저, 정말 모릅니다. 제자가 어찌 사존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제자와 다른 선인이 벌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벌을 받았다고? 설마 너희 셋이 작당해 벌인 일이 아니라 명령을 내린 자가 따로 있단 말이냐?”
“아, 그것이……. 명을 내리신 대인의 신분이 높아 감히 발설할 수가 없습니다. 용서를…….”
방반이 떠듬떠듬 말을 마치기 전에 가슴에 묵직한 충격이 가해졌다.
그가 펑! 하고 날아가 대전 돌기둥에 처박혔을 때 강시 사내의 하얀 소맷자락이 펄럭이고 검푸른 사슬이 또 날아들었다.
사슬에 맞아 대전 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니기 시작한 방반은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 왈칵 피를 토해냈다.
“사존, 제발 살려주십시오!”
애걸을 하면서도 방반은 함부로 명을 내린 자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이래도 본 좌를 능멸 하려느냐! 오늘 내 너를 멸해 사존을 속이면 어찌 되는지 본보기로 삼겠다.”
강시 사내의 표정이 싸늘해짐과 동시에 대전 전체에 촤르륵 하는 금속 소리가 들려왔다.
둥실 날아오른 검푸른 사슬에서 태산과 같은 압력을 느낀 방반은 질식할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마, 말하겠습니다. 말하겠습니다.”
한립은 손을 저어 대전의 사슬들을 가라앉히고 말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저희 세 사람에게 명을 내린 분은 바로……!”
누군가를 언급하려던 방반은 갑자기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머리를 감쌌다.
웅!
방반의 혼백의 기운이 아닌 다른 힘이 그의 머릿속에서 빠져나와 주위의 환각에 파문을 일으켰다.
한립은 일이 틀어진 것을 눈치 채고 환각에서 빠져나오자 아까 그 자세 그대로 멈춰있던 방반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환각에서 깨어나려는 것이었다.
한립은 과감하게 그의 아래턱을 눌러 입을 벌린 다음 눈알 크기의 검은 구슬을 강제로 쑤셔 넣었다. 그리고 즉시 몸을 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올랐다.
오랜 환각에서 벗어난 방반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의 입 안에서 청자색 뇌전이 튀어나와 경천동지할 폭발을 일으켰다.
검은 태양이 떠올라 하늘과 땅을 뒤흔들고 모든 것이 잠잠해질 때까지 한립은 만 장 고공에서 무너져 내리는 산봉우리와 끝없이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방반을 죽여 마음에 부담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를 공격한 세 선인에게 명을 내린 배후가 따로 있을 줄은 몰랐다.
방반의 혼백에 표식을 남겨 강력한 환영진을 뒤흔든 배후는 이미 방반이 큰일을 당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아래쪽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법은 완전히 파괴되고 방반도 육체와 혼백이 가루가 되었다.
한립은 폐허가 된 지면으로 내려가 방반의 저물탁과 암석 아래 깔려있는 검은 장도를 찾아 들고 날아올랐다.
단번에 수만 리를 이동한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방반에게 들은 내용을 종합해보면 아직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코앞에 닥친 위기는 넘긴 셈이었다.
의식을 퍼트려 방향을 정한 그는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얼마 후, 제법 규모가 있는 성을 발견한 그는 삼십대 청년 유생의 모습으로 종이부채를 펄럭이면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황란대륙 동부에 속한 이 성의 이름은 관월성(觀月城)이었다.
방반과 봉겸지의 추격을 피해 이리저리 방향을 틀면서도 주로 동쪽 방향으로 날아와 크게 시간 낭비는 하지 않았다.
외진 곳에 위치한 임해성과 달리 거대한 흑풍성보다도 더욱 번화한 곳이었다.
다만 다른 점은 돌아다니는 인파의 대다수가 법력이 전혀 없는 범인들이었고 간혹 보이는 수사들도 거의 결단기 이하의 중저계 수사들이었다.
게다가 수도자들도 기운을 숨기고 다들 범인과 섞여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동안 지나온 크고 작은 성들은 처음 도착한 임해성만 빼고는 전부 속세의 여러 국가에 속해 있었다.
이런 성에서는 기운을 드러내거나 비행하는 것이 불가했고 속세의 규칙을 따라야 했다. 속세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감독하는 것은 배후의 수도 세력들이었다.
물론 중대형 성 안에는 암암리에 수사들을 위한 시장이 마련되었다. 주변 수만 리에서 가장 큰 성인 관월성도 당연히 수사들을 위한 시장이 존재했다.
한립은 성 동쪽으로 가서 그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눈속임 용 금제를 지나 석재를 쌓아 만든 하얀 거탑 앞에 도착했다.
수십 층에 이르는 탑은 햇빛을 반사해 아름답게 반짝였다. 관월성 전송진이 위치한 탑이었고 그 주위로 금빛 찬란한 선잔 건물도 우뚝 솟아있었다.
하얀 거탑으로 들어간 한립 앞에 곧바로 다섯 개의 전송진이 펼쳐졌다. 전송진 옆에는 금포 수사가 한 명씩 서있었다.
금색 장포에 수놓아진 금룡 도안이 그들이 선궁 소속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전송진마다 수사 몇 명이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내부를 둘러본 한립은 중간의 전송진으로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우선 저쪽에서 영석을 납부하시고 전송부를 받은 다음 인원이 찰 때까지 기다리시면 전송진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한립이 입을 열기도 전에 금포 청년이 미소를 머금고 안내를 해주었다. 청년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기다란 돌 탁자에 금포 노인이 앉아 줄을 선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가장 앞줄에 선 사람이 금색 영패를 보이고 영석을 건네는 식이었다.
한립은 말없이 몸을 돌려 거탑을 나섰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가 누런 피부에 중년인으로 탈바꿈한 그는 먼저 선잔으로 가서 선령을 관리하는 곳으로 향했다.
“이름, 출신지.”
대머리 노인이 사무적으로 물었다.
“려비우, 농옥산맥(瓏玉山脈) 출신입니다.”
류석이란 신분으로 임해성을 출발했으니 누군가 뒤를 캔다면 행적을 들킬 수 있었다. 안전을 위해 대외활동은 다른 신분으로 하는 것이 나았다.
다시 하얀 거탑 안에 나타난 그는 긴 돌 탁자 앞에 줄을 섰다.
“어디로 가는 전송진을 이용할 겁니까?”
금포 노인은 선령을 받아들고 무표정하게 물었다.
“홍호성(紅湖城).”
눈을 반짝인 한립이 생각해둔 목적지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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