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6화. 결판
*
‘쯧, 아쉽게 되었어.’
방반이 달아난 방향을 바라보던 한립이 시선을 돌렸다. 그는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중상을 입고 달아났으니 시간은 번 셈이었다.
한립은 격노해서 길길이 날뛰고 있는 문어 괴수를 피해 해저 바닥을 따라 멀리 벗어났다.
수만 리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다 문어 괴수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자 그는 쏜살같이 바다를 빠져나와 수결을 맺었다.
쿠릉!
은색 뇌전들이 모여들어 뇌진을 이루고 그를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수만 리 밖에서 나타난 그는 뇌진을 이용해 같은 방향으로 몇 번을 더 이동했다.
원래 있던 해역과 아주 멀리 떨어진 무인도에 도착한 한립은 진법 깃발과 원반을 꺼내 반나절의 시간을 들여 성광의 힘을 모으는 진법을 펼쳤고, 그 주위로 열댓 개의 방어용 진법을 설치해 섬 전역을 물샐틈없이 보호했다.
진선경 후기의 괴수나 수사가 들이닥쳐도 한동안은 뚫을 수 없게끔!
준비를 마친 그는 성진대진(星辰大陣)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우우웅!
겹겹이 다채로운 빛깔의 보호막이 펼쳐진 섬은 화려하게 반짝였다.
아주 외딴 해역의 무인도여서 다행이지 누군가 이것을 보았다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이다.
금방 밤이 찾아와 하늘에 별빛이 떠올랐다. 섬에 떠오른 별빛이 찬란하게 빛났지만 주위의 보호막 덕에 가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밤하늘의 수많은 별빛이 일곱 줄기의 별빛 기둥을 이루고 섬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쿵.
둔중한 진동이 섬 전체를 울렸다.
이렇게 두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나자 섬을 에워싼 각종 보호막들이 우웅! 하고 흩어졌다.
* * *
모습을 드러낸 한립은 한 손에 검은 사슬을 들고 있었다.
원영이 완전히 봉인된 것도 아니고 이전에 사슬을 깬 경험도 있어서 단시간 내로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의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단전 내부의 혼백표식이 무슨 수를 써도 없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방반이 몸을 회복하고 쫓아올 가능성은 커져만 갔다.
한립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섬에 펼쳐놓은 진법 깃발과 원반을 회수하고는 푸른 빛줄기가 되어 날아올랐다.
* * *
다시 세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황란대륙 모처의 깊은 산골짜기 속에서 누군가 환희에 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소리가 들려온 곳에서 날아오른 눈부신 푸른빛은 검은 경장 차림의 청년을 품고 있었다. 바로 방반이었다.
그가 최초로 남긴 잔상이 이제야 천천히 흩어졌다.
“으하하, 하늘이 나를 돕는 구나! 죽기 아니면 살기로 삼킨 청교단이 스물네 번째 선규를 뚫어주다니!”
광소를 터트린 방반은 기운이 이전과 사뭇 달랐다. 잠깐 사이 환골탈태라도 한 듯 진선 중기 경지를 훌쩍 벗어나 후기에 이르러 있었다.
자신의 변화에 좋아하던 그는 평정을 되찾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어디 달아날 수 있으면 달아나 봐라, 한립! 어차피 넌 내 손바닥 안이다.”
모호한 푸른 빛줄기로 변한 방반은 무서운 속도로 동쪽으로 날아갔다.
이때, 어느 밀림 위를 지나던 한립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표정이 굳었다. 원영 아래에서 오랫동안 반응이 없던 표식이 돌연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올 것이 온 것인가? 이제 결판을 지어야겠지.”
그는 속도는 높이되 가던 방향을 유지했다. 전력으로 날아간 지 보름이 채 안 되었을 때 익숙한 기운이 의식 감응 범위 내로 진입했다.
“어쩐지 너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다 했더니 경지를 돌파하고 있었구나. 이거 만만치 않겠어.”
미간을 좁힌 한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둘 사이의 거리가 만 리 이내로 가까워지자, 한립은 은색 뇌전 빛을 방출해 뇌진을 형성하려 했다.
뒤쪽에 있던 방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밝은 둔광 속에서 푸른 주술문자들을 불러냈다.
쿠오오!
용울음 소리 같은 괴성을 지른 그가 푸른 환영으로 변해 몇 배나 빠른 속도로 쏘아져나갔다. 기이한 괴성이 웅웅 퍼져 파문을 일으켰다.
그 소리를 들은 한립은 갑자기 머릿속에 캄캄해졌고 자연히 뇌진 형성이 지체되었다. 거의 바로 회복을 했지만 푸른 환영이 가까운 곳까지 쫓아온 뒤였다.
쇄액!
새하얀 도광이 뇌전진법을 베었다. 두부처럼 부드럽게 썰린 진법은 콰릉! 하고 붕괴되었다.
급격히 하강해서 아슬아슬하게 도광을 피한 한립은 금빛 속에서 산악거원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가 변신을 마치자마자 푸른 환영이 앞을 가로막고 실체화되었다.
괴력이 담긴 커다란 금색 주먹이 뻗어나가 주변 허공에 파문을 일으켰다.
파앗!
방반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횡으로 움직여 가볍게 금색 주먹 허상을 피했고, 흐릿하게 셋으로 갈라졌다.
방반 중 한 명이 보광이 번쩍이는 장도를 휘둘러 거원의 팔을 베었다.
서걱!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솟구쳤다. 이전에도 도광을 막지 못하던 거원은 이제는 진흙 인형처럼 썰려나갔다.
나머지 두 방반이 거원에게 달려들어 각각 목과 가슴을 갈랐다.
크앙!
펄쩍 뛰어오른 거원의 금색 털들이 빛을 발했다. 무수히 많은 금색 털들이 뽑혀 나와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방반 분신은 안색이 달라져 공격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나 푸른 보호막을 펼쳤다.
피피피핑!
날카로운 금털 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푸른 보호막은 부서지지 않았지만 금털이 지닌 막대한 힘에 밀려나고 있었다.
금색 거원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제자리에서 빙글 돌아 은색 뇌전을 두른 뇌붕으로 변해 날개를 펄럭였다.
콰릉!
천둥소리를 남기고 사리진 뇌붕이 전방 수천 리 밖에서 나타났다.
“어딜 달아나려고!”
방반은 얼른 세 분신을 하나로 합쳐 푸른 그림자로 변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그러나 체내의 뇌전의 힘을 아낌없이 써가며 연달아 뇌둔술을 펼친 뇌붕은 방반을 수만 리나 앞서고 있었다.
이어서 뇌붕의 은색 뇌전들이 모여 뇌전진법을 형성했다.
흐릿한 푸른 그림자가 쾌속으로 날아들었을 때 은빛 뇌전에 휩싸인 뇌붕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가라앉은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 방반은 냉소했다.
대량의 뇌전의 힘을 소모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달아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땐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3일 후.
푸른 녹음이 가득한 수풀 속에는 푸른 기와를 올린 오래된 사당이 하나있었다.
쩍쩍 갈라진 나무 문 한쪽에 사람이 몸을 굽히면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틈으로 거미줄과 먼지와 이끼가 가득한 사당 내부가 보였다.
어떤 천지신령인지 모를 조각상이 엄숙하게 정좌를 하고 앉아 사당의 한쪽 구석으로 고개를 틀고 있었다.
그 조각상 뒤쪽에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청포 사내, 한립이 앉아 있었다.
‘하아…….’
지금 그는 무엇을 감응한 듯 고개를 들어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몸을 일으킨 그가 번득 날아올라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을 때 수천 리 밖에서 푸른빛이 날아들었다.
은빛과 푸른빛은 고공을 가르며 순식간에 수십 개의 산봉우리를 지나쳤다.
선령력을 빠르게 소모하는 대신 한립의 비행속도는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뇌둔술을 펼친 것에 비하면 느렸다.
그때 시야에 산봉우리 몇 개가 초승달 모양으로 분포한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쉭!
한립이 수직으로 하강해 어느 산봉우리의 정상에 이르자 짙은 하얀 안개가 피어올라 산맥 전체를 가려버렸다.
후우웅!
자욱한 안개 속에 은빛이 요동치더니 정교하기 짝이 없는 높은 담을 지닌 궁전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올랐고 산봉우리 사이사이를 아름다운 백옥다리가 이어 선가 장원 같은 고즈넉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푸른 둔광 속 방반이 그 앞에 멈춰 서서 생생한 궁전들을 보고 코웃음 쳤다.
“못 본 사이에 허튼 수작을 부려놓았구나!”
그는 주저 없이 안개 속으로 뛰어들어 산봉우리 중 한 곳으로 향했다.
두 눈을 살짝 감은 방반의 눈알이 눈꺼풀 아래에서 바삐 움직였다.
“……어째서?”
번쩍 눈을 뜬 그는 한립의 위치를 정확히 감응할 수 없자 꽤 놀라고 있었다. 애매하게 그의 근처에 있다는 것만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
방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6개의 분신을 만들어내 본체까지 총 일곱 방향으로 흩어졌다.
푸른빛들은 궁전 곳곳을 이리저리 돌다 아무 소득도 없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때 방반 중 한 명이 허리를 숙여 지면을 만져보았다.
“이건…… 진법 속의 또 다른 진법!”
천천히 몸을 일으킨 방반이 인상을 찡그리고는 총 일곱 개의 분신이 서로 등을 대고 둥글게 모여 검은 장도를 마구 휘둘렀다.
7개의 장도가 번쩍일 때마다 도광이 날아올랐다.
휘이이…….
돌풍과 함께 일곱 도광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림자로 변해 마치 거대한 검은 장도처럼 고공으로 솟구쳤다.
우웅!
하늘 쪽 허공이 진동한 뒤 아름다운 백옥 다리며 정교하고 웅장한 건물들이 구겨지듯 사라졌다.
환영이 사라진 곳에는 원래 있던 산봉우리들이 누군가에 의해 깎여 나가고 백옥 석판 위에는 괴수 도안을 품은 기이한 주술문자들이 둥글게 새겨져 있었다.
그 주위로 다양한 색깔의 수정돌이 잔뜩 박힌 십여 개의 하얀 돌기둥들이 울긋불긋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곱 신영을 하나로 합친 방반은 돌기둥을 보다 홱 고개를 돌려 한립이 수백 장 밖에 서서 손끝으로 진법 원반을 빠르게 짚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방반의 시선을 느꼈는지 살짝 고개를 든 한립의 입가에 잔잔하게 미소가 어렸다. 그가 발동 중인 진법의 이름은 이려환광진(魑蠡幻光陣)이었다.
무상맹을 통해 딱 한 번 밖에 사용할 수 없는 소모성 고계 환영진을 구하느라 그는 지니고 있던 극품영석 전부와 토손과 두 개 그리고 감구진이 내준 저물탁 속에 들어있던 영보 두 점까지 내줘야했다.
듣기로 이려환광진의 위력은 대단해서, 진선 후기 최고봉의 선인이라도 금선의 경지에만 이르지 않았으면 스스로 깨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차츰차츰 더 깊은 환각에 빠져 죽을 때까지 그 안에 갇히게 되고, 원영과 혼백도 달아날 수 없는 무서운 진법이었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일단 발동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한립은 시간을 끌기 위해 이려환광진 바깥에 구궁천건부를 펼쳐 놓아야 했다.
다음으로 조종하는 이도 진법 원반을 들고 진법 속에 들어가 진안 역할을 해야 했다. 진법에 갇힌 적과 마찬가지로 조종하는 이도 환각과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는 소리였다.
어쨌든 진법을 조종하는 이는 그것이 환각인지 분명히 알기에 먼저 정신을 차리면 환각을 자유자재로 조종해 적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네 놈이 죽고 싶구나!”
방반은 검은 장도를 앞으로 뻗은 채 쇄도했다.
이마에 듬성 듬성 땀방울이 맺힌 한립은 그의 장도가 백 장까지 가까워졌을 때 손끝으로 원반의 마지막 지점을 짚고 있었다.
화아앗!
눈앞이 환해진 방반은 돌기둥들에서 뿜어져 나온 화려한 빛에 시야가 아득해졌다.
다음 순간 그는 마치 벽을 투과한 것처럼 어둑한 대전 안으로 떨어졌다. 굵은 각기둥들과 그 위에 걸린 화로에서 유유히 타오르는 녹색 불길이 무척 익숙했다.
촤르르륵.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적막한 대전 안을 울렸다.
“무엄하구나! 감히 나를 향해 도를 휘둘러? 네놈은 사조도 안중에 없단 말이냐!”
위엄 가득한 탁한 목소리를 들은 방반은 자기도 모르게 칼끝을 바닥으로 내렸다.
“사존!”
새까만 의자에 시퍼런 피부를 지닌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곧 방반은 고개를 붕붕 휘저었다.
“……넌 사존이 아니다. 환영진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야!”
그는 고함을 지르며 다시 장도를 쳐들고 중년 사내를 가리켰다. 흐릿하게 흩어진 방반의 일곱 분신이 강시 사내를 포위하고 달려들었다.
“이놈, 어느 안전이라고 패악을 부리는 것이냐!”
노호성을 터트린 사내는 주문을 외거나 수결을 맺지도 않고 성대한 기세를 일으켰다.
채채채챙!
검은 사슬들이 대전을 가득 채우고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날아들었다.
방반의 일곱 분신은 재빨리 피했지만 하나같이 사슬에 뚫려 피를 토해야 했다.
“본 좌의 가르침을 받아온 네 녀석이 어찌 이런 대역무도한 짓을 벌인 것이냐?”
강시 사내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방반을 꾸짖었다.
그 말을 듣고 나자 방반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기운이며 말투가 그의 사존과 똑같았던 것이다.
‘한립이 발동한 것이 환영진이 아니라 특수한 전송진이라면?’
처음으로 방반의 마음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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