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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45화 (1,302/2,000)

1545화. 방반

*

십여 만 리 밖, 어둑한 남색 해역 위에 뇌전 빛이 일었다. 피 범벅이 된 한립은 그곳으로 이동하자마자 고꾸라져 바다에 빠질 뻔했다.

그의 안색은 이전보다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오랜 시간 도망을 다녀 기력을 소모한 몸으로 급박하게 혈영둔까지 써서 원기가 상한 탓이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귀원단을 삼키고 눈을 감았다. 의식으로 단전을 살피니 과연 원영 위쪽으로 익숙한 검은 사슬 네 개가 보였다.

그걸 본 한립은 도리어 한시름을 놓았다.

늦지 않게 달아나서 괴이한 사슬이 완전히 발동되지 않아 원영이 완전히 봉인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체내의 선령력 절반 정도가 봉인되었다.

원영 아래로는 깜빡깜빡 거리는 검은 빛도 둥실 떠있었다. 바로 금포 노인 잔해에서 빠져나온 기운이었다.

강력한 금제 같은 것은 아니었고 모종의 혼백 표식 같았다. 충분한 시간만 있으면 깨끗하게 제거할 수 있겠지만 흑의 청년이 충분한 시간을 줄 리 없었다.

더 짜증스러운 것은 검은 빛에서 노인이 아닌 청년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건 뭐지?’

한립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문뜩 전방의 해역을 보고 이채를 띠었다. 침음하던 그는 둔광을 일으켜 더 깊은 해역으로 날아갔다.

가면 갈수록 이상했다.

오는 내내 방대한 의식을 펼쳐 십여 만 리를 관찰했는데 평범한 물고기들만 유유히 헤엄쳐 다니고 바다요수들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건 평화로워도 너무 평화로운 상황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한립은 심해에 요수가 서식하는 해역을 향해 맹렬히 날아가 기운을 극도로 감춰 마치 돌멩이처럼 기척 없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동시에 방대한 의식으로 체내의 표식을 겹겹이 감싸 잠시 동안 외부와의 연계를 강제로 차단했다.

한립이 심해로 가라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반이 도착했다.

그는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힘에 의해 억눌려 있었지만 그가 심어 놓은 혼백표식이 여전히 희미하게 반응을 해왔다.

청년은 푸른 빛줄기로 변해 심해로 내려갔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해저에 도달했다.

깜깜한 해저는 고요하기만 했다.

‘찾았다.’

빠르게 도처를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수백 장 밖의 평범해 보이는 암석에서 멈추었다.

검은 장도를 든 방반은 과감하게 검은 도광을 방출해 암석을 갈랐다. 도광에 의해 고요하던 바닷물이 둘로 갈라졌다.

쿠앙!

도광이 떨어진 암석이 예상과 달리 쪼개지지 않자 방반은 미세하게 움찔했다.

암석 뒤에 숨어 있던 한립은 뒤쪽으로 빠르게 물러나며 입술을 꾹 다물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쉭! 쉭!

방반의 좌우로 분신들이 빠져나와 손에 든 검은 장도를 휘둘렀다.

겹쳐져 십(十) 자 형태를 이룬 도광은 기세등등하게 한립을 향해 날아갔고, 한립은 금빛 비늘이 자라난 두 팔뚝을 교차해 그것을 막았다.

깡!

그 충격으로 한립은 세차게 튕겨나갔다. 그러던 찰나에 해저 깊은 곳에서 분노한 포효소리가 전해졌다.

쿠쿠쿠.

해저 바닥이 터지고 사방팔방으로 튀는 모래와 돌 파편 속에서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쑥 올라와 무시무시한 기운을 드러냈다.

한립이 숨어 있던 암석은 거대한 존재의 표면에 있는 혹이었던 것이다. 이에 방반이 소스라치게 놀라 한립을 쫓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제야 방반을 향해 입이 찢어져라 웃어준 한립은 인근 바다 속 협곡으로 뛰어들어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방반은 요란하게 반짝이던 푸른빛을 숨기고 기운을 억눌렀지만 검은 그림자의 번쩍이는 청록색 눈동자는 정확히 방반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글이글 끓는 듯한 요수의 눈빛에는 명확한 살의가 담겨있었다. 방반은 오랜 세월 느껴보지 못한 공포감에 휩싸였다.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거대한 흑자색 문어였는데 무려 천여 장에 달하는 거대한 몸에 암석 크기의 검은 혹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여덟 개의 다리는 흑자색 비늘이 덮여 있어 악마의 촉수처럼 보였다.

청록색 눈 밑으로 찢어진 거무튀튀한 구멍 안으로 음산한 이빨들이 보였다. 일단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 절대 살아 돌아올 수 없을 듯싶었다.

“지, 진선경 후기!”

휘익!

방반의 중얼거림에 자극을 받았는지 거대 문어가 다리를 중간으로 모았다가 펼치며 거대한 몸집으로 방반을 향해 쇄도했다.

흑자색 거산이 날아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거대 문어의 이동만으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력이 해수를 타고 전해져와 방반은 바르르 몸을 떨며 튕겨나가야 했다.

겨우 몸을 가눈 방반 앞에 나타난 문어는 8개의 다리를 움직였다. 방반은 당혹스런 상황에도 차분히 다섯 개의 허상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날아들던 문어 다리들이 미세하게 머뭇거리다 엄청난 힘을 실어 바닥을 내리쳤다.

쿠쿠쿵!

모래와 암석 파편이 마구 튀고 해저바닥에 수백 장 깊이의 고랑이 여덟 개나 파였다. 방반이 변한 다섯 분신들은 문어 다리를 피해 수면 쪽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러나 분노한 문어가 낮게 으르렁 거리며 입을 쩍 벌렸다.

푸확!

물 항아리 굵기의 흑자색 뇌전 다섯 줄기가 날아올랐다.

평범해 보이는 흑자색 뇌전은 기이하게 빨라 속도전을 주특기로 하는 방반을 따라잡고 다섯 분신에 정확하게 꽂혔다.

쿠르릉! 콰콰쾅! 콰쾅!

분신 넷은 흑자색 뇌전에 순식간에 타서 없어졌는데 가장 왼쪽의 방반만 남아 정신없이 물살에 휩쓸리다 왈칵 대량의 피를 분출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것은 아닌지 곧 균형을 잡았다. 그 대신 찢겨진 의복 밑의 금색 비늘갑옷이 어둑하게 변해 있었다.

뇌전을 맞은 자리가 움푹 들어가고 비늘이 떨어져 나간 갑옷은 그래도 뚫리지 않고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방반은 주저하지 않고 눈부신 빛줄기로 변해 불가사의한 속도로 물살을 가르고 달아났다.

후오오!

괴성을 터트린 문어도 여덟 다리를 수축했다가 펼치며 쾌속으로 헤엄을 쳤다.

문어의 이동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서 전력을 다하는 방반과 비교해도 크게 느리지 않았다.

방반과 문어가 쫓고 쫓기며 순식간에 멀어지자 해저는 평화를 되찾았다.

해저 협곡 깊은 곳에서 천천히 떠오른 한립은 청년과 거대 문어가 향한 곳을 바라보다 푸른빛을 일으켜 널찍이 간격을 두고 따라갔다.

계획은 성공적이었지만 바다 요수의 실력이 강하다고 해도 방반이 꼭 목숨을 잃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방반과 거대 문어는 그의 의식 감응 범위를 진작 벗어나 있었다. 대신 그들이 이동하며 남긴 선령력 파동이 워낙 선명해서 추적하는데는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흔적을 따라 반 시진 정도 갔을 때 한립이 멈춰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수백 리 앞 쪽 바다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용돌이가 치고 있었다.

그 혼란의 중심에는 드넓은 면적을 차지한 빛덩이가 눈부신 보라색 뇌전과 검은 안개를 뿜어내는 중이었다.

뇌전과 검은 안개가 교차할 때마다 폭발이 일어나 훼멸의 기운이 퍼져 그 아래 해저에서는 암홍색 암장(巖漿)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역? 아니야, 뭔가 달라. 영역과 비슷한 다른 신통인 것 같은데…….”

거대 빛덩이가 발산하는 영기의 압력에 한립도 두려움이 생겼다.

진선경 후기에 상응하는 기운을 지닌 저 거대 바다 요수가 지능이 부족해서 속은 것이지 안 그랬다면 그도 영역 신통에 갇히는 불행한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한립은 복잡한 생각을 거두고 남색 빛을 발산하는 눈으로 빛덩이 속을 들여다보았다. 어렴풋이 크고 작은 신영들이 빠르게 이동하면서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원래 거산 만하던 문어는 크기를 줄여 더 빨리 움직였고 해저 괴수를 피해 도망 다니는 이는 비교적 작은 방반이었다.

빛덩이 속에서 속도에 제약을 받아 열세에 처해 있으면서도 방반은 잘도 피해 다녔다. 물론 창백한 얼굴에 머리를 산발한 모습은 처량했다.

그의 머리 위에서 은색 족자가 은색 주술문자들을 방출해 보호막을 이루고 가끔 피하지 못하는 공격을 대신 막아주고 있었다.

쾅!

그 시각, 번개처럼 날아든 문어 다리에 맞은 방반의 은색 보호막이 불안하게 반짝거렸다.

한참 동안 조그만 적을 죽이지 못한 문어는 성질을 부리면서 다리를 더욱 빠르고 강하게 휘둘렀다.

그걸 피하거나 막고 있는 방반은 속으로 끙끙 앓았다.

그의 수행으로는 당장 영역 비슷한 흑자색 공간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 머리 위의 족자형 선기가 망가지면 죽은 목숨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한립에 대한 증오가 더욱 깊어졌다.

푸확!

이때 문어가 다리를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느닷없이 입을 벌려 새까만 먹물을 분사했다.

지독한 비린내를 맡은 방반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화들짝 놀란 그는 의식의 힘을 이용해 머릿속을 맑게 하는 한편 은색 족자에 선령력을 불어넣었다.

웅!

은색 주술 문자들이 쏟아져 나와 원반 모양의 방패로 변해 먹물을 막았다.

치지지직…….

놀랍게도 먹물이 닿은 은색 방패 표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부식된 방패에는 구멍이 숭숭 뚫렸다. 먹물은 거칠 것 없이 방반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화르륵!

위기의 순간 급히 수결을 맺은 그는 어려운 주술을 외워 구멍 뚫린 은색 족자에 불길을 일으켰다.

족자에서 흘러내린 주술문자를 머금은 불길이 방반을 동그랗게 감쌌고, 새까만 먹물도 그 불구슬 안으로는 침투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쾅쾅쾅쾅…….

그러나 방반이 숨을 돌리기도 전에 문어의 여덟 다리가 거대한 곤봉처럼 방반을 둘러싼 은색 불구슬을 미친 듯이 때리기 시작했다.

불안하게 흔들린 은색 불구슬이 점점 사그라 들었다.

“안 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방반은 비명처럼 괴성을 터트리며 푸르스름한 단약을 꺼내들었다. 엄지손톱 크기의 단약은 깨알 같은 푸른 주술문자들과 생생한 푸른 교룡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진선경 후기로 넘어설 때 쓰려고 거금을 들여 준비한 이 청교단(靑蛟丹)은 일품도단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귀한 보물이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이 단약을 꺼낸 것은 약성을 이용해 잠재력을 끌어다 쓰기 위해서였다.

특이한 효과를 지닌 청교단을 복용하면 원래 경지를 넘어서는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더 높은 경지를 직접 체험하면서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도 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방반은 단약을 꿀꺽 삼켰다.

으아아!

진한 푸른빛이 퍼져나간 그의 몸에서 피곤한 기색이 싹 가시고 오히려 이전보다 강한 기운이 발산되었다.

선령력이 날뛰는 통에 전신에 어린 푸른빛이 너울거려 푸른 화염처럼 보였다.

그의 몸 곳곳에서 푸른빛 23개가 깜빡깜빡 거리다가 어느 순간 또 하나의 빛이 나타났다.

총 24개의 빛은 서로 공명해 더욱 밝은 빛을 방출했고, 기운이 더욱 증폭된 방반은 문어 괴수와도 엇비슷한 경지에 이르렀다.

방반이 혀끝을 깨물어 뱉어낸 핏물이 머리 위 은색 족자로 스며들었다.

웅!

구멍이 뚫려 훼손된 부분이 핏물로 채워지자 선기도 다시금 왕성하게 은색 불길을 일으켜 커다란 불구슬로 변했다.

쿠쿠쿵!

급속도로 방반을 둘러싼 보호막까지 빨아들인 불구슬이 폭발하며 은빛을 머금은 사나운 파동이 문어 다리들을 밀어냈다.

그 사이 푸른 그림자로 변한 방반은 검은 장도를 꽉 쥐고 공간 끄트머리로 돌진했다. 흑의 청년은 일곱 허상으로 분리돼 손에 쥔 장도에서 검은 검빛을 뿜어냈다.

“길을 터!”

일곱 줄기의 검은 도광이 하나로 합쳐져서 언덕만한 크기로 변해 흑자색 벽에 박혔다.

쩌적!

벽이 갈라져 그가 충분히 빠져나갈만한 틈새가 벌어졌다.

푸른빛으로 변한 방반은 빛덩이 공간을 빠져나가 미처 손쓸 시간도 주지 않고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문어 괴수가 방반을 쫓아 나왔을 때는 망망대해 속으로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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