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3화. 원한
*
흐릿하게 변한 방반이 다시 세 화신으로 변해 덤벼들었다.
이번에는 화신들이 도중에 다시 흐릿하게 흩어져 수십 개의 진짜 같은 환영들이 수많은 검은 도광을 날리고 있었다.
등 뒤의 상처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고 금털 거원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을 팡팡 쳐댔다.
퍼퍼퍼퍽!
금색 주먹 허상들이 허공 가득 떠올라 도처로 흩어졌고, 광포한 힘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방반이 변한 수많은 환영들이 파동에 소실되고 결국 보호막을 두른 세 화신만이 남았다.
금털 거원이 공격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방반의 세 분신은 괴이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무언가를 떠올린 금털 거원이 멈칫했다.
돌연, 그 아래쪽에서 금빛이 성대하게 번져 밧줄처럼 거원의 사지와 몸통을 묶고 은은하게 법칙의 기운을 풍겼다.
거꾸로 뒤집힌 노란색 거대 우산이 지면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산만한 우산의 대가 노란 빛과 연결되어서 거원이 꼭 우산 손잡이처럼 보였다.
크앙!
금털 거원이 깜짝 놀라 힘을 주자 전신의 근육이 불끈불끈 튀어나오고 금털이 빳빳하게 섰다. 그런데도 노란 빛은 질기게 산악거원의 몸부림을 버텨냈다.
촥!
거대 우산마저 접혀 금털 거원이 그 안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허허, 지망산(地罔傘)에 갇혔으니 삼두육비의 거원으로 변신해도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네!”
우산 위에서 나타난 금포 노인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잘 하셨습니다.”
방반도 우산 옆으로 이동해 손을 뻗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우웅!
검은 안개에 휩싸인 칠흑 같은 검은 사슬이 떠올라 그윽한 광채를 반짝였다. 특수한 법칙파동이 느껴지는 사슬이었다.
거대 우산 속에 갇혀 있던 금털 거원은 눈을 부릅떴다. 무척 익숙한 이 기운은 그의 원영을 300년 넘게 구속했던 격원법련이 틀림없었다.
“내 원영을 봉인했던 녀석이 네 놈이로구나!”
노란 우산 속에서 하늘을 뒤흔드는 거원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이제야 생각난 것이냐? 당시에도 네 녀석을 제압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었지. 그때 죽은 줄 알았더니 아직까지 살아 있을 줄이야.”
방반이 아니라 우산 위쪽의 노인이 오만하게 답했다.
그 소리에 거원의 몸에서 금빛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 우산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얌전히 있지 못할까!”
금포 노인이 냉소를 하며 허공을 내리쳤다.
팟!
노란 주술문자들이 날아오르자 우산이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줄어들고 있었다.
그때 방반도 주문을 멈추고 두 손으로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주술문자에 둘러싸인 검은 사슬은 반대로 커져가며 옅은 공간파동을 분출했다.
쿵!
방반의 술법이 완성되려는데 우산 속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줄어드는 것 같던 거대 우산이 갑작스레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놀란 금포 노인이 갑자기 입에서 쿨럭 피를 토해냈다.
쿵!
다음 번 굉음에는 어둑해진 우산이 벌어지고 금빛이 튀어나와 삼두육비 금털거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원을 묶고 있던 노란 빛들은 진작 끊어진 뒤였다. 여섯 개의 팔을 긴박하게 움직인 거원은 순식간에 커다란 뇌전진법을 완성했다.
“어딜 달아나려고!”
눈이 찢어질 듯 거원을 노려보던 방반은 정혈을 토해 검은 사슬에 흡수시켰다. 사슬은 신속하게 몇 배로 불어났고 거원 앞으로 이동해 가슴을 관통하려 했다
콰릉!
그와 동시에 눈부신 은빛 뇌전에 휩싸인 거원이 사라지고 사슬은 허공을 꿰뚫었다.
서서히 흩어지는 은색 뇌전 빛을 본 방반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으나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평정을 회복한 그는 검은 사슬을 회수했다.
“저 자가 이 정도 실력을 지녔을 줄은 몰랐구만. 지망산의 법칙의 힘을 강제로 벗어나다니!”
금포 노인도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실력은 그렇다 치고 관건은 저 뇌전진법을 어떻게 파훼 하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 쫓아다니기만 하다가는 언제 저 놈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봉 형, 금제에 능하시니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몇 번 보다보니 상대의 뇌전진법에 대해선 원리를 대강 파악했네. 공간의 힘과 뇌전의 힘을 합쳐 진법을 펼치는 것이라 파훼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아. 다만 그러려면 특수한 부적이 필요한데 너무 급히 오느라 챙겨 오질 못했네.”
“다른 방법은요? 저 자가 지닌 비밀을 알아내기만 하면 오랜 세월 벗어나지 못하던 고비를 넘기고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을 겁니다.”
“그건……. 하아,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세. 혈연식(血燃息)이라는 비술을 사용하면 체내의 정혈과 원기를 불살라 일정 범위 내의 진법을 무력화 시킬 수 있지. 그거면 한립의 뇌진도 파훼할 수 있을 걸세.”
의미심장한 방반의 말에 고민하던 금포 노인이 답했다.
“그겁니다. 이번에 저 자를 따라잡으면 그 비술을 펼쳐 뇌진을 막아 주세요.”
“문제는 비술을 사용하면 원기와 정혈 손실이 막대해서 더는 아우를 도와 한립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세.”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뇌진만 쓰지 못하게 해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방반은 음산하게 웃음을 흘렸다.
* * *
백만 리 밖, 눈이 뽀얗게 쌓인 산맥 위에 뇌전들이 모여 진법을 형성했다.
은빛 속에서 나타난 방대한 존재는 삼두육비의 금털 거원이었다. 즉시 몸집을 줄인 거원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단약을 삼키고 방향을 확인한 다음 일각도 쉬지 않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이렇게 먼 거리를 한 번에 이동하느라 뇌붕의 힘을 적잖이 소모했다.
청년과 노인이 그를 추적하는 데 거리 한계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또 따라 잡히면 뇌전의 힘이 바닥나 퇴로가 막히고 말 것이다.
얼마 날아가지 못해서 체내의 정혈이 요동쳤다. 상대가 그의 위치를 감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립은 바로 방향을 틀어 미친 듯이 날아갔다.
날아가면서 단약을 연화시키는 와중에 의식으로 몸속을 샅샅이 뒤졌다. 혹시나 적들이 그 모르게 무슨 표식 같은 것을 심어두었나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찾아봐도 흔적 같은 건 없었다.
한립은 전속력으로 달아났지만 반나절 후에는 따라잡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전혀 싸울 마음이 없는지 그들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은빛을 번득였다.
파칙!
은색 뇌전들이 튀어나와 뇌전진법을 형성하고 있었다.
“꿈 깨거라!”
수백 리 밖에서 방반이 날카롭게 소리치며 손바닥에서 푸른 주술문자를 품어 곁의 금포 노인에게 흘려보냈다.
고리 모양을 이룬 푸른 빛 속에서 금포 노인이 사라져 한립 근처로 이동했다.
파아앗!
한립은 뇌전진법의 은빛에 휩싸이기 직전이었는데 느닷없이 노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핏빛 화염이 삽시간에 주변을 잠식했다.
뇌전진법은 핏빛에 닿자마자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럴 수가!’
바로 그 순간 안색이 급변한 한립의 뒤에서 새하얀 도광이 날아들어 그의 심장을 노렸다.
서걱!
동공을 수축한 한립은 푸른빛을 일으켜 횡으로 재빨리 피했지만 결국 피를 보고 말았다. 그의 팔이 기다랗게 벌어져 뼈가 들어나고 피가 용솟음쳤다.
그럼에도 한립은 상처를 처리할 틈도 없이 금빛을 일으켜 산악거원의 모습으로 변해 금색 비늘로 전신을 가렸다.
도광 뒤에서 나타난 방반은 손에 눈처럼 새하얀 장도를 들고 있었다.
몸을 흔든 방반의 좌우에서 똑같이 생긴 화신 네 명이 더 나타나 다 같이 장도를 휘둘렀다.
눈부신 도광 다섯 줄기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쇄액!
도광들은 중간에서 하나로 합쳐져 흐릿한 도 그림자로 변해 겹겹이 허상을 남기며 금털 거원이 심장으로 쇄도했다.
흡사 주변 풍경이 느릿해진 것처럼 도광은 압도적인 속도로 움직였다.
푸욱!
도광이 꿈처럼 금털 거원의 몸을 관통해 뚫고 나왔다. 심장이 아닌 약간 비켜나간 가슴 쪽이었다.
울컥 피를 토해낸 금털 거원은 크게 놀란 듯 했지만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며 포효했다.
거원이 분출한 정혈이 몸속으로 스며들었고, 가슴과 등에 커다란 핏빛 주술문자 하나가 떠올라 눈부신 빛을 발했다.
펑!
거원의 몸이 터져 핏빛으로 변하더니 빙글 돌아 금포 노인의 핏빛이 퍼진 범위를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금제의 바깥으로 탈출한 핏빛은 은색 뇌전진법을 형성해 번득이며 사라졌다. 금포 노인은 황당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방반은 물론이고 노인 역시 한립이 마지막에 보여준 동작들이 어찌나 빠른지 뭐 막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다.
다섯 분신을 하나로 합친 방반은 너무 열이 받아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금포 노인은 주문을 외워 몸에 붙은 핏빛 화염을 끄고는 창백한 얼굴로 얼른 단약을 꺼내 복용했다.
“제기랄! 또 놓쳤어!”
방반은 거의 허공에서 발을 구르며 분통을 터트렸다. 봉 노인의 혈연식 비술에서 한립이 교묘히 빠져 나간 것이다.
“한립이 이렇게 교활할 줄은 몰랐네. 이제 어쩔 생각인가?”
청년 옆으로 날아든 금포 노인은 아직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무조건 쫓아야지요!”
방반은 단호하게 말하며 손을 휘저어 푸른빛으로 두 사람을 감쌌다.
백만 리 밖, 뇌전진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핏빛이 반짝이고 힘없이 나타난 한립은 얼굴이 백짓장 같았다.
심장과 손가락 한마디 정도 떨어진 곳에 상처가 벌어져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한립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지막 순간 안간힘을 써서 몸을 틀지 않았으면 심장이 뚫렸을 것이다.
마치 환영처럼 날아들던 도광을 떠올리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방반이 처음에는 본 실력을 발휘하지 않다가 불시에 날린 공격이라 크게 당할 뻔했다. 희소식은 상대가 괴이한 사술을 발동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녹색 부적을 꺼내 가슴에 붙이자 피가 멎고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귀원단까지 복용해 기운을 북돋은 한립은 날아가며 단약을 연화시켰다.
짐작대로 반나절 뒤에는 청년과 노인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귀원단의 뛰어난 효과로 부상을 대부분 회복했지만 된통 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들이 의식 감응 범위에 들어오자마자 뇌진을 펼쳐 달아났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방반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거리를 좁힐 수 없으면 어떤 공격도 할 수 없었다.
* * *
며칠 뒤, 새까만 삼림 위.
푸른빛이 더없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하늘 가득 떠있는 먹구름에서 시시때때로 굵은 벼락이 내리쳐 멀리서보면 뇌전 수풀을 이룬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둔광 속 한립은 신중히 벼락을 피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십여만 리 밖, 뇌전삼림 외곽에 도착한 방반과 금포 노인은 뇌전으로 가득한 숲을 보고 미간을 좁혔으나 어쩔 수 없이 추격을 계속했다.
* * *
보름 후, 적홍색 산맥 위를 푸른 둔광이 바람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산맥 곳곳에는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어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해를 가렸다.
푸른 둔광이 불길과 연기를 그대로 관통해 달아나는 바람에 방반과 금포 노인도 그 뒤를 따라가야 했다.
* * *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한 달이 훌쩍 넘도록 지속되었다. 거대한 습지 위에 은빛 뇌전이 떠올라 뇌전진법을 형성했다.
콰릉!
천둥소리와 함께 진법 중앙에서 나타난 한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두 달 동안 달아나느라 단약으로 보충을 했음에도 체내의 뇌붕의 힘이 거의 바닥나기 직전이었다.
아껴가며 몇 번을 더 쓸 수는 있어도 그러면 원래 위력의 절반 밖에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뇌전진법을 사용할 때마다 전송거리가 줄어 이제는 한번에 50만 리 밖에 벗어나지 못했다.
뒤쫓는 청년과 노인도 이점을 간파하고 더욱 바짝 그를 쫓았다.
한립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대로가 가다가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붙들리고 말 게 분명했다.
그러나 도망 다니는 동안 관찰한 바로는 그의 위치를 감응하는 것은 흑의 청년이 아니라 그 옆의 노인 같았다.
자신의 위치를 추적하고 뇌진을 파훼할 금제를 펼치는데다 그를 가둘 수 있는 후천법기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머리를 굴리던 한립은 둔광을 다른 쪽으로 틀었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들리고 바다가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적홍색을 띠는 바닷물에서 코를 찌르는 쇠 냄새가 나고 있었다.
“여기야!”
한립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두 팔을 벌려 수십 개의 남색 빛을 전방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