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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42화 (1,299/2,000)
  • 1542화. 속도법칙

    *

    그 시각, 지하 동굴 속.

    하얀 선박 위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위쪽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눈썹을 꿈틀하고 눈을 뜬 한립은 순간적으로 체내의 정혈이 혈관을 타고 미친 듯이 도는 것을 감지했다.

    ‘설마 뭔가 접근하고 있는 건가?’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그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퍼져 나와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한립은 아무 말 없이 푸른빛을 반짝이고 사라졌다.

    구 씨 사내나 동행한 다른 수사들이 막을 틈도 없었다.

    지하 동굴을 나오자 강풍이 천만 개의 칼날처럼 그를 베어댔다. 푸른 보호막을 둘렀는데도 강한 바람이 느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방향을 잡은 그는 빠르게 날아갔다.

    흐릿한 모래 폭풍 속을 지나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속도가 크게 줄어 반 시진을 날아갔는데도 얼마 가지 못했다.

    선령력을 이용해 단숨에 강풍이 부는 지역을 돌파하려는데 불쑥 강대한 두 기운이 들이닥쳤다.

    우뚝 멈춰선 한립은 오른쪽 전방에 흐릿한 인영 두 개가 서있는 것을 확인했다.

    차가운 표정의 흑의 청년과 금포 노인이었다.

    “어째서 제 앞을 막아서신 겁니까?”

    한립은 그들의 수행을 가늠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진선경 중기의 선인 둘은 결코 선한 의도로 그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을 들은 금포 노인이 의아한 얼굴로 흑의 청년을 쳐다보았다.

    “한립! 아니, 한 수사 겨우 얼굴이 바뀌었다고 우리가 못 알아 볼 거라 여긴 것은 아니겠지요?”

    “당신들은 누굽니까?”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청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한립은 더욱 놀랐다.

    “방 아우, 연기를 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구만. 정말 우리를 모르는 것 같아. 설마…… 기억이라도 잃은 것인가?”

    “기억을 잃었든 말든 일단 죽이고 혼백을 뽑아 추혼술을 해보면 다 알게 될 일입니다.”

    노인의 말에 싸늘히 답한 방반이 검은 빛을 반짝이고 시야에서 없어졌다. 흑의 청년은 한립 코앞에 나타나 검은 장도로 그의 목을 베려들었다.

    ‘빨라!’

    내심 상대의 속도에 감탄한 한립도 주먹을 뻗고 있었다.

    팟.

    이때 방반이 또 사라졌다.

    한립의 주먹은 허공을 때렸고 어쩔 수 없이 몸이 앞으로 쏠렸다. 바로 그때 그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검은 장도가 날아들었다.

    이에 한립은 이미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전신에 진극막과 금빛 비늘을 일으켰다.

    탱!

    수백 장을 튕겨나간 한립은 모래 바람 속에 선혈을 남겼다.

    어두운 얼굴로 몸을 가눈 그는 흑의 청년의 평범해 보이던 장도가 뜻밖에도 진극막과 금색 비늘을 동시에 뚫고 몸에 상처를 낸 것을 보았다.

    비록 살갗이 뚫리고 바로 튕겨나가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흑의 청년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금의 노인은 옆에서 원형 진법 원반을 손끝으로 툭툭 짚으면서 무언가를 그려 넣고 있었다. 그의 소매 속에서 노란 삼각형 깃발이 날아올라 허공으로 사라졌다.

    한립은 그들을 훑고는 하얀 장검을 불러냈다. 흑의 청년이 잔영을 남기며 펄쩍 뛰어올라 장도를 휘둘렀다.

    챙!

    한립의 팔이 움직이고 검은 장도가 막힌 순간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방반의 잔영 속에서 검은 인영이 쑥, 하고 나타나 똑같이 생긴 검은 장도를 들고 한립의 배를 가르려 했다.

    흑의 청년과 똑같이 생긴데다 진선경 중기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신외화신? 아니야…….”

    한립을 놀랐지만 반응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복부와 가슴에서 하얀 빛 일곱 덩이를 일으킨 그는 팔을 크게 부웅! 돌려 두 번째 인영을 강타했다.

    퍽!

    괴력에 맞은 인영이 뒤쪽으로 날아갔다.

    “……!”

    그러나 그때 한립은 목 뒤쪽에서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틀자 목과 가까운 어깨 부분에 예리한 도가 스쳤다.

    푹!

    금색 비늘 몇 장이 부서지고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몸을 돌려 보니 뒤쪽에 세 번째 흑의 청년이 서있었다.

    흠칫 놀란 한립은 허공에서 빙글 돌아 백여 장 밖으로 물러나 명청령안을 발동하고 하얀 비검들을 불러내 주변을 돌아 그물망처럼 그를 보호하게 했다.

    흑의 청년들은 입 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고 흐릿하게 각기 다른 방향에서 한립을 향해 쇄도했다. 검은 장도 표면의 주술문자들이 공간을 왜곡하며 날아들었다.

    두 눈에 왕성한 남색 빛을 뿜어내고도 한립은 잔영을 남기면서 쾌속으로 움직이는 세 인영과 검은 장도 중 가짜를 찾아낼 수 없었다.

    “이건…… 속도 법칙과 분신술을 동시에 펼친 것인가!”

    한립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하얀 비검 한 자루가 충격에 멈춰 섰다. 비검 그물망의 틈새가 채워지기 전에 도광이 뚫고 들어와 한립의 등을 노린 것이다.

    휙 돌아선 한립은 주먹으로 도광에 반격을 가했다.

    채챙! 채채챙!

    이제 흑의 사내 중 한 명이 장도를 쥐고 그의 주위를 부단히 돌아다니며 비검 그물망을 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명청령안을 펼쳐 상대의 동작을 따라갔지만 의식으로 조종하는 아홉 자루 비검들은 계속 한 발짝씩 늦어 틈이 생겼다.

    주위를 맴도는 나머지 두 개의 분신은 수시로 기습을 하거나 살수를 펼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어느덧 한립의 몸에 열댓 개의 칼자국이 그어졌다.

    진극체를 이뤄 몸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단단한 덕분에 방반 화신이 공격을 성공해도 그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립도 이대로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금포 노인의 술법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웅!

    한립 근처의 허공이 부들부들 떨리고 황토색 빛이 사방에서 몰아치는 모래 바람마저 멈춰 세우고 다가왔다.

    움직임을 봉쇄하는 금제인 듯했다.

    그 모습에 한립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한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쿠르릉 콰쾅!

    그의 몸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수많은 은색 뇌전들이 튀어나와 찬란한 뇌전진법을 이루었다.

    화앗!

    금포 노인은 낌새가 이상해진 것을 눈치 채고 손끝으로 진법을 가리켜 황토빛을 더욱 키웠다. 뇌진(雷陣)을 발동하는 한립의 움직임이 살짝 느려졌다.

    방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사납게 눈을 번득인 화신들은 세 방향에서 쏘아져 나가 그를 검은 장도로 내리찍었다.

    ‘어쩔 수 없지!’

    한립은 이를 악물고 뇌붕혈맥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콰릉!

    눈부신 은빛 속에서 한립의 신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황토빛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검은 도광이 우수수 떨어져 한립이 있던 자리를 초토화 시켰다.

    방반의 세 화신이 하나로 합쳐져 장도를 쥐고 한립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았다. 술법을 거둔 금포 노인도 그의 옆으로 날아와 코를 킁킁 거렸다.

    “피 냄새가 남아 있네. 뇌진을 발동하려고 자네와 분신의 협공을 그대로 맞았으니 멀쩡하진 못할 게야.”

    “……3백 년 전에도 그런 줄 알았지만 죽지 않고 현선이 되어 나타난 놈입니다. 봉 형께서 한 번 더 이 자의 종적을 찾아주시면 다음번에는 결코 달아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방반의 간곡한 부탁에 금포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수결을 맺었다.

    콰르릉!

    수십만 리 밖의 모래 언덕 위에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고공에서 떨어지는 은빛 뇌전 속에 누군가 처참한 몰골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모래 언덕에 떨어진 인영은 방금 전 달아난 한립이었다.

    그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의식을 방출해 위험 요소가 없는지 파악하고 단약 두 개를 꺼내 털어 놓고 운공을 했다.

    혼란스런 체내의 기운을 다스린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자신을 공격한 그들의 신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자신에게 강력한 살의를 지닌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영환계에서 처럼 소위 십방루의 현상수배 때문에 현상금을 노리고 온 이들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분명 그가 잃어버린 3백 년 전의 기억과 연관된 자들일 것이 분명했다.

    지금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무상맹에서 준 가면의 환술이 어째서 그들에게 통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유로 그를 노리든 간에 지금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수행이 그보다 높았고 한 명은 속도법칙을 장악하고 다른 한 명은 진법금제에 능해 당장 정면 대결을 하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다.

    모래 바닥에서 일어난 한립은 황란대륙 지도를 꺼내 들어 살폈다. 잠시 후 지도를 넣어둔 그는 방향을 가늠해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갈랐다.

    반나절이 지나 산세가 험한 어느 산맥 상공.

    푸른 빛 속의 한립이 수풀로 내려가 단약을 복용하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런데 일다경이 흐르고 번쩍 눈을 뜬 그는 놀란 기색이 다분했다.

    “어떻게 벌써 쫓아 온 거지?”

    그가 펼쳐 놓은 의식의 끄트머리에 강대한 기운 두 개가 나타나 엄청난 속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벌떡 일어난 그는 둔광을 일으켜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이틀 뒤, 이른 아침.

    광활한 원시밀림 위를 지나던 푸른빛에서 키 큰 사내가 나타나 수풀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우지끈!

    밑동이 다섯 아름이 넘는 거목이 사내에게 깔려 부러지자 울창한 가지와 이파리가 꺾여 흔들거렸다.

    그 소리에 밀림 속 새들이 날아오르고 야생동물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나무 잔해 속에 초췌한 몰골로 정좌를 한 한립은 거목에 맺혀 있던 이슬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환술로 외양을 변화시킨 그는 단정한 중년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물처럼 깊은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밝게 빛났지만 피로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선령력을 거의 다 써가며 이틀간 쉼 없이 달아났는데도 흑의 청년과 금포 노인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들은 반드시 그를 죽이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했다.

    “이렇게 달아나기만 해서는 안 되겠어. 최소한 저들이 누군지는 알아야 할 텐데…….”

    한립은 단약 여러 개를 삼키고 생각에 잠겼다. 그가 마음을 다잡고 선령력을 회복한지 겨우 일다경 만에 또 다시 의식에 강력한 영력 파동이 포착되었다.

    이번에는 그도 다급히 달아나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밀림 위로 떠올랐다. 하늘 끝에서 푸른 빛줄기가 날아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검은 장도를 든 흑의 청년의 모습이 보였고 금포 노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십방루에 거금을 걸고 수배까지 내린 연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한립은 상대방 눈에서 충만한 살의를 읽고 소리쳤다. 그가 새롭게 변신한 모습으로는 청년을 속이지 못하는 것이 확실했다.

    방반은 미세하게 움찔했지만 대답하지 않고 잔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한립도 서늘한 눈빛으로 진령혈맥을 일으켰다.

    크앙!

    한립은 폭발적으로 금빛을 터트리며 몸이 급격히 부풀어 올라 금털 거원으로 변신했다. 세 분신으로 갈라진 방반도 검은 장도를 휘둘러 검은 도광 그물로 거원을 포위하려 했다.

    고개를 쳐들고 포효한 금털 거원이 두 주먹을 미친 듯이 내질렀다.

    쿠콰쾅!

    검은 도광 그물 대부분이 괴력에 부서지고 주먹에서 나온 압력이 주변 공기를 묵직하게 내리 눌렀다. 방반의 세 분신도 살짝 몸을 떨다가 동시에 장도를 거두고 없어졌다.

    다음 순간, 금털 거원 뒤에서 세 명이 동시에 등장해 검은 장도로 한립을 내리 찍었다.

    예리한 세 줄기 도광은 떨어지는 와중에 하나로 합쳐져 공간을 왜곡하며 무섭게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금털 거원은 피하지 못하고 피부에 반투명한 막을 떠오르게 했다.

    까강!

    검은 도광이 거원의 등에 떨어져 깨지면서 금색과 검은색 파동이 섞인 태양이 떠올라 무지막지한 돌풍을 불러 일으켰다.

    앞으로 튕겨나간 금털거원의 등에는 반투명한 막이 찢어져 금털 가죽에 상처가 남았다.

    그리 깊지는 않아도 핏물이 금빛 털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반탄력으로 방반도 뒤쪽으로 튕겨나가 허공에서 몸을 가누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지면에 떨어진 거원을 보는 방반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일격을 제대로 맞고도 저렇게 멀쩡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방반이 놀란 만큼 거원으로 변한 한립도 가슴이 철렁했다.

    처음부터 산악거원 변신술을 펼쳤기에 대충 넘어간 것이지 안 그랬으면 큰 부상을 입을 뻔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리 대비만 하면 쾌속 공격이 장점인 청년을 막을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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