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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41화 (1,298/2,000)
  • 1541화. 강자

    *

    대대적인 전투에 들어간 도마뱀 떼는 느닷없이 나타나 돌아다니는 하얀 선박을 향해서도 공격을 가했다.

    방어막을 펼친 선박은 수많은 도마뱀의 공격에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어했다. 이제 한립과 다른 합체기 수사들이 나설 때였다.

    화륵!

    유 수사는 주문을 외우고 빠르게 수결을 맺어 전신에서 검은 화염을 일으켰다. 검은 화염은 가느다란 실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복잡하게 교차한 화염 실이 거대한 그물처럼 전방의 도마뱀 대군을 덮쳤다.

    쿠콰쾅!

    검은 불 그물의 폭발에 열기가 자욱하게 퍼졌고 검은 불바다 속 도마뱀들은 사지가 뜯겨나가거나 통구이가 되어 떨어졌다.

    콰릉!

    한 손으로 수결을 맺은 기 수사는 커다란 남색 뇌전 구렁이 두 마리를 불러내 도마뱀 무리로 뛰어들게 했다.

    도마뱀 무리 속에서 뇌전 구렁이들도 폭발해 도마뱀들을 살점 조각으로 만들었다.

    한립은 비검 아홉 자루를 불러내 검기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검실들을 형성해 도마뱀들을 학살했다.

    세 수사들이 길을 뚫어도 흑배철석들의 수가 워낙 많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이에 선박도 수시로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성난 파도를 헤치고 대양을 건너는 작은 조각배 같았다.

    키악!

    돌연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쇠를 긁는 듯한 듣기 싫은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구 씨 사내를 비롯한 상회 사람들은 바늘에 머리를 꿰뚫린 것처럼 고통스러워했고 합체기 공봉들마저 가슴이 철렁했다.

    천여 장 밖에 작은 언덕 크기의 새까만 대형 도마뱀이 불쑥 솟아올라 날카로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등 뒤로는 검은 색 가시가 몇 개나 솟아 있어서 더욱 흉악해 보였다.

    거대한 몸집의 도마뱀은 합체기 경지에 이른 요수였다.

    키악!

    사람들이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이번에는 뒤쪽에서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땅이 갈라지고 또 다른 대형 흑배철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나타난 요수와 비슷한 생김새에 등에 붉은 무늬가 있고 머리에는 암홍색 뿔이 달린 녀석이었다.

    “헉, 철석왕! 저것들이 이렇게 많은 흑배철석들을 불러 모은 것이구나!”

    유 씨 공봉이 눈살을 찌푸리며 헛바람을 들이켰다.

    “둘이 싸우다 철석왕 중 하나가 죽으면 이 영역쟁탈전도 끝나는 것 아닙니까?”

    구 씨 사내는 희망이 생겼는지 눈을 빛냈다.

    “말은 그렇지만 쌍방의 실력이 비슷해 언제 승부가 날지 알 수 없네. 평소였으면 우리 둘이 최선을 다해 철석왕을 죽여 보았겠지만 이래서야…….”

    기 씨 공봉은 미친 듯이 달려드는 도마뱀 무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말을 하는 사이 대치하던 두 철석왕들이 동시에 뛰어올랐다.

    쿠앙!

    방대한 몸집의 요수들이 공중에서 충돌해 육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폭음 속에서 검은빛과 붉은빛이 요란하게 튀고 그 여파로 인근의 도마뱀들이 찢겨나가 죽기도 했다.

    도마뱀 떼에 휩쓸린 하얀 선박의 보호막도 번쩍번쩍 불안하게 깜짝이고 있었다.

    “선박이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류 선배님, 공봉님들 제발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

    암담해지는 보호막을 본 구 씨 사내가 다급히 소리쳤다. 몰려드는 도마뱀들을 상대하느라 바쁜 합체기 공봉들은 뭔가 다른 시도를 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바로 그 순간, 한립이 손가락을 튕겼다.

    위이잉!

    눈부신 하얀빛이 어디선가 폭발해 모든 이들의 시각이 잠시 마비되었다. 하얀빛은 정체 모를 파동을 품고 있어 수사들의 의식까지 봉쇄했다.

    그동안 은색 뇌전 빛을 번득인 한립은 자리에서 사라져 거대 도마뱀들 위에서 나타났다. 금빛으로 변한 그의 주먹이 퍽! 퍽! 거대 도마뱀의 머리를 내리쳤다.

    퍼석!

    도마뱀들은 외마디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머리가 깨져 지면으로 떨어졌다. 다시 은빛을 번득인 한립은 선박 위로 돌아가 있었다.

    거의 한 호흡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얀 빛이 가시고 눈을 깜빡인 선박 위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누군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답하는 이가 없었고 합체기 공봉들마저 어안이 벙벙했다.

    “도, 도마뱀들이…….”

    공봉 중 하나가 놀라 소리쳤다.

    하늘과 땅을 뒤덮고 서로를 죽이며 선박을 공격하던 도마뱀들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멈춰있었다.

    곧이어 기운이 강한 도마뱀 몇 마리가 울어대자 두 무리의 흑배철석들이 앞뒤로 갈라져 나타났을 때와 반대로 사막의 갈라진 틈 속으로 몰려 들어갔다.

    “어서 저길 보세요! 철석왕들이 죽어 있습니다.”

    누군가 수백 장 밖에 떨어진 머리 잃은 철석왕 시체를 발견했다. 다른 이들이 놀란 가운데 합체기 공봉 둘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구 수사,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 일 듯합니다.”

    “그럼요, 그래야지요! 다시 전속력으로 출발한다.”

    한립의 담담한 말에 구 씨 사내가 연달아 고개를 끄덕이고 명을 내렸다. 하얀빛을 머금은 선박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쾌속으로 날아갔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하얀빛이 번쩍하고 나서 철석왕들이 죽었다는 것 밖에요.”

    “제가 볼 때는 이 배 안에 은거 중인 강자가 타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철석왕을 죽이고 잠자코 있는 것이겠지요.”

    “에이, 설마 그러려고요! 내 생각에는 지나가던 마음씨 좋은 선인이 우리를 도와준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니, 평범한 수사가 합체기 요수 두 마리를 단번에 쓱싹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아니, 그냥 지나가는 선인이었으면 하얀빛으로 우리 시야를 가릴 필요가 없었을 거라니까요!”

    선박에서는 친분이 있는 자들끼리 모여 웅성웅성 거리고 있었다. 합체기 공봉들도 선박에 서서 누가 정체를 감춘 고수일지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놓고 주위를 둘러보지는 못했다.

    철석왕을 죽인 수법으로 보아 상대는 대승기 이상이거나 진선일 수도 있는데 감히 심기를 건드릴 수 없어서였다.

    한립은 선박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누가 쳐다보든 신경 쓰지 않았다. 흑암과벽을 빠져나온 선박은 아주 순조롭게 나아갔다.

    밀실로 돌아간 한립은 열손가락을 복잡하게 움직여 수결을 맺은 다음 손바닥 사이에 물빛과 뇌전빛이 교차하게 했다.

    서서히 형성된 검은 구슬은 중수문뢰였다.

    중수의 절반을 사용해 오는 동안 틈틈이 제련한 중수문뢰가 벌써 서른 개나 되었다.

    의복을 털고 일어나 바깥으로 나와 보니 끝없는 노란 모래가 보였다. 면적이 넓은 대신 별다른 요수가 없어 안전한 곳이었다.

    상회의 공봉들은 갑판 좌우에 앉아 여전히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한립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명구성에만 이르면 전송진을 이용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류 선배님.”

    구 씨 사내가 그를 보고 다가왔다.

    “아마 반나절 정도만 더 가면 명구성에 도착할 겁니다. 그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굉장히 기쁜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아니네. 그저 맡은 바 책임을 다 했을 뿐이네.”

    한립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선배님께서는 명구성에 이른 후에 무엇을 하실 생각이신지요?”

    “난…….”

    한립은 대답을 하려다 말을 멈추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 끝에서 몇 개의 검은 그림자가 휘휘 다가오고 있었다.

    “왜 그러십……. 이런, 강풍재(罡風灾)가! 어서 선박을 멈추고 구멍을 뚫어 그 안으로 숨어든다.”

    이상하게 여긴 구 씨 사내가 그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안색이 창백해져 소리쳤다.

    한립은 강풍재란 말이 낯설었지만 구 씨 사내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일인가 보다 했다.

    갑판 위가 난리가 나고 하얀 선박이 서서히 하강했다.

    쉬쉭!

    상회의 합체기 공봉들이 바람처럼 날아올랐다.

    기 씨 공봉이 커다란 노란 깃발을 들고 주문을 외우자 수십 배로 커진 깃발이 노란 빛줄기로 변해 사막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콰쾅!

    크게 흔들린 사막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위면은 검은 심연처럼 보였다.

    이때 검은 점들이 가까워져 거대한 구름을 이루고 포효소리를 내고 있었다.

    광풍에 휩싸인 선박으로 모래바람이 몰아쳤다.

    “서둘러서 하강한다.”

    구 씨 사내의 독촉에 하얀 선박이 검은 구멍 속으로 빠르게 내려갔다.

    기 씨 공봉은 선박이 지하 동굴 아래 안착하자 거대 깃발을 흔들어 입구를 봉쇄했다.

    노란 모래 먼지 때문에 천지가 뿌옇게 변한 지면은 모래 광풍으로 거대한 용처럼 포효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수백 장 아래 숨은 선박 사람들에게도 또렷이 들려왔다.

    “류 선배님께서 빨리 알아채셔서 제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숨을 돌린 구 씨 사내는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구 수사, 강풍재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아, 모르시는 군요. 강풍재는 이곳 사막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인데, 자주는 아니지만 일단 시작되면 주변 수십만 리가 강풍에 휩싸여 지하 깊이 굴을 뚫고 들어가 숨어야만 고비를 넘길 수 있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구 씨 사내는 강풍재에 대한 기탄을 드러냈다.

    “맞습니다. 이 사막을 못해도 백 번은 지나다닌 저도 강풍재를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쨉니다. 제때 지하로 숨지 못한 배 한 척이 멀리 떠밀려가 산산조각 나 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기 씨 공봉도 간담이 서늘했다는 어투였다.

    “원래는 이곳에도 성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강풍재에 휘말려 깡그리 사라진 후로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 씨 공봉도 알고 있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랬군요.”

    그 말에 한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 곧 도착하겠거니 했는데 하필 강풍재를 만나서 며칠 더 걸리게 생겼습니다.”

    구 씨 사내는 탄식하며 갑판에 머무르지 않고 화물이 멀쩡한지 점검하러 얼른 어디론가 날아갔다. 그리고 한립은 갑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강풍이 휩쓸고 있는 사막과 수십만 리 떨어진 곳.

    바람 한 점 없이 평화로운 구릉지대에는 곳곳에 숲이 있고 작은 촌락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구름지대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푸른 성이 바로 명구성이었다.

    흑풍성 못지않은 규모를 지닌 명구성에는 웅장한 건물들이 가득했다. 번화한 길이 쭉쭉 뻗어있어 시야에 다 담지 못할 정도였다.

    명구성 중심부에 위치한 하얀 탑은 우뚝 솟아 다른 건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명구성 전송진이 있는 곳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이때 두 사람이 하얀 거탑을 빠져나왔다.

    백발이 섞인 노인은 오채색 비단 장포를 걸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영준하게 생긴 청년이 검은 경장차림을 하고 있었다.

    “방 아우, 이곳부터는 전송진이 없으니 대륙 서쪽의 흑풍해역으로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걸세.”

    금포 노인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꽤 지나 그자가 아직 흑풍해역에 있을지는 모릅니다. 만일에 대비해 수고스럽겠지만 봉 형께서 확인을 좀 해주시지요.”

    검은 경장 청년, 방반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러지.”

    노인은 대답하며 나침반 모양의 법보를 불러내 주문을 외웠다.

    웅!

    금빛을 발한 나침반 위로 중심과 가까운 위치에 핏빛 점이 떠올랐다.

    “허허.”

    “그 자가 이미 흑풍해역을 떠난 것입니까?”

    금포 노인의 반응에 방반이 급히 물었다.

    “아우의 말이 맞았네. 게다가 명구성 가까이 와있구만.”

    “명구성 서쪽이겠지요?”

    “……맞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자리에서 멈춰있어.”

    금포 노인은 눈을 감고 감응을 해보다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가보죠!”

    방반과 노인은 둔광을 일으켜 성 수 백리 밖의 높은 산봉우리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본 서쪽 지역은 모래 바람으로 뿌옇게 뒤덮여 있었다.

    “자연재해를 만나 어디 숨어 있나 봅니다. 당장 가시죠!”

    “방 아우, 조급해 말게. 어차피 저자도 반드시 명구성에 들를 것인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성급한 방반의 제안에 노인이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봉 형께서는 그러시지요. 저는 더 이상 못 기다리겠습니다.”

    방반은 이 말을 남기고 펄쩍 뛰어올라 잔영으로 변했다. 이에 노인도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이 오색 빛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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