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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40화 (1,297/2,000)

1540화. 선부(仙符)

*

공간을 둘러싼 수정벽도 난폭한 힘에 쿵! 쿵! 울려댔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폭음이었다.

꾸르륵…….

산처럼 수정 벽 주위에 버티고 있던 설섬 여섯 마리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설섬들의 눈에서 검붉은 선혈이 흐르고 기운이 쇠해갔다.

그때 수정벽 안에서 돌연 용 울음소리들이 울리더니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검은 빛 속에서 작열하는 핏빛 화염 화룡 세 마리가 튀어나와 검은 기운이 스며든 수정벽에 몸을 내던졌다.

쿠웅!

묵직한 충돌음과 함께 수정벽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치지지직!

세 마리 핏빛 화룡들이 수정벽을 녹여 거대한 구멍을 뚫은 것이다.

화룡들은 구멍을 통해 튕기듯 날아올라 청수한 사내와 비대한 추한이 있는 곳으로 구불구불 날아갔다.

이미 금정설섬의 머리 위로 돌아간 추한은 그들 형제가 펼친 진법이 깨진 것에 아연한 얼굴로 서둘러 다른 수결을 맺고 있었다.

다음 순간, 여섯 마리 설섬이 입에서 검은 냉기를 뿜어 공중에 얼음벽을 만들어냈다.

이때 수정벽을 빠져나온 한립은 너덜너덜한 장포를 입고 있었지만 체내의 장기가 충격을 받은 것 외에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한립은 고개를 들어 화룡들이 만들어낸 핏빛 화염의 강을 올려다보고는 눈빛이 흔들렸다. 화염 강은 불 속성 법칙의 힘뿐만 아니라 핏빛 법칙의 힘도 섞여 있었다.

죽임을 당한 홍월도 도주의 기운과 매우 흡사한 법칙의 힘이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의복이 군데군데 찢겨나가 새하얀 피부가 드러난 감구진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두 눈에 살의 가득한 그녀는 네모난 옥패를 꼭 쥐고 주술문자들이 가득한 혈홍빛을 내뿜고 있었다.

한립은 그녀가 교삼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홍월도를 떠나기 전 공수홍이 남긴 어떤 보물을 챙긴 것이리라.

고공에는 얼음과 불길이 만나 치솟은 검은 안개가 모여들어 먹구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청수한 사내나 추한은 처음의 여유 있던 표정은 잃은 지 오래였다.

안 그래도 감구진에 비해 수행이 낮은 그들이 육섬융화진 없이 상대를 어찌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란히 선 여섯 마리 설섬들만이 냉기를 뿜어 겨우 핏빛 화염의 침식을 막고 있었다.

그걸 본 감구진은 정혈을 내뱉어 얼굴이 한층 더 하얗게 질렸다. 정혈은 올록볼록하게 왜곡되다 아주 작은 용으로 변해 그녀의 옥패 속으로 뛰어들었다.

쿠오오!

옥패 속에서 네 번째 화룡이 튀어나와 화염 강에 합류해 기세를 높였다.

이에 옥패의 색깔은 옅어졌고, 강물은 넘실넘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다 못해 새빨간 불바다로 변해 퍼져나갔다.

청수한 사내와 추한은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혈관의 혈액이 통제 불능으로 날뛰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화들짝 놀라 다급히 선령력 일부를 이용해 마음을 안정시키느라 여섯 마리 설섬에게 충분한 선령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 잠깐 사이 더욱 강성해진 불바다가 냉기를 넘어 설섬들과 두 사람을 덮쳤다. 처참한 비명이 핏빛 화염 속에서 울려 퍼졌다.

핏빛 화염 속에서 잠깐 반짝이던 법보의 빛도 금세 사라졌다.

하얀 비검 아홉 자루를 회수한 한립은 선령력을 가느다랗게 퍼트려 중수문뢰 폭발로 흩어진 중수 먼지들을 모으는 중이었다.

드디어 핏빛 화염 안이 고요해지자 감구진은 다른 수결을 맺어 네 마리 화룡을 모은 뒤 옥패까지 넣어 버렸다.

하늘에서 엉망진창이 된 시체 두 구가 떨어져 내렸다. 육체와 혼백 모두 선인보다 못한 설섬들은 아예 뼛조각하나 남기지 못했다.

감구진은 단약 몇 개를 꺼내 삼키고는 멀리서 손짓해 저물탁 두 개를 불러왔다. 그녀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그중 하나를 한립에게 던져주었다.

“류 수사, 아까부터 들었던 생각인데. 이전에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저처럼 생긴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저는 수사를 처음 보았습니다.”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으나 감구진은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오늘은 수사가 저를 도왔으니 이 청풍쇄선부(靑風鎖仙符)로 사례하죠.”

그녀의 소매 속에서 보라색 부적이 빠져나와 표표히 한립에게로 날아왔다. 한립이 받아서 보니 부적에 적힌 현묘한 은색 주술문자는 은과문이었다.

충만한 영력이나 부적의 재료가 태일화청부나 갑원부 이상이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공수를 한 한립은 나중에 잘 연구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부적을 챙겨 넣었다.

“저를 몰래 쫓은 것은 따지지 않겠습니다만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제가 어찌 나와도 야박하다 하지 마세요.”

홍군 여인은 냉랭히 한 마디를 남기고 몸을 돌렸다.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한립은 쓴웃음을 짓고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는 그리 오래지 않아 선박으로 되돌아갔다.

조금 전 전투는 아주 먼 거리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선박 안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승전상회 합체기 공봉들도 여전히 갑판 앞쪽 좌우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한립은 마치 허상처럼 소리 없이 선실로 들어갔다.

시간이 흘러 이튿날 해가 뜨기 시작하자 선박은 예정대로 출발했다. 그러나 홍군 여인, 감구진이 사라져 구 씨 사내는 영문을 몰라 궁금해했다.

한립을 제외하면 내막을 아는 이가 없었고, 그마저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가 어찌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아 보수를 치르지 않았으니 오히려 그가 이득을 본 것이기도 했다.

미장삼림과 달리 흑암과벽은 황량하기 짝이 없어서 살아있는 동식물을 찾기도 어려웠다.

하얀 선박은 가능한 높은 고도로 날며 하얀 안개 금제를 발동해 구름으로 위장하고 속도를 냈다.

어떤 요수의 기습도 없었지만 한립은 구 씨 사내의 부탁으로 다른 합체기 공봉들과 같이 갑판에서 경계를 서게 되었다.

반나절이 지나 그리 넓지 않은 흑암과벽 깊은 곳으로 진입했을 때 한립은 아래쪽을 힐끗 보았다.

조금 전부터 지면의 중력이 증가한 것을 또렷이 느꼈기 때문이다. 선박도 영향을 받아 하얀빛을 반짝이며 중력에 저항하고 있었다.

침음하던 한립은 방대한 의식을 지하 수백 장까지 퍼트려 보았다.

‘과연 광물이 풍부하구나. 적잖은 원자현철광(元磁玄鐵礦)이 매장되어 있어. 그러니 이렇게 강한 인력을 발휘하는 것이겠지…….’

광물을 제외하고 암수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주변에 없거나 더 깊은 지하에 숨어 있을 터였다. 의식을 더 깊은 곳까지 퍼트리려던 그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지하광맥 때문에 혼잡한 원기와 중력이 합쳐져 그의 의식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조사를 강행하지 않고 의식을 흩어버리고는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

그는 슬쩍 눈썹을 끌어올리고 두 눈에 남색 빛만 반짝였다.

그때 시간차를 두고 합체기 공봉 중 한 명이 안색이 달라져 일어났다. 그도 의식감응 중에 검은 도마뱀의 출현을 알아챈 것이다.

흑암과벽에 여러 번 와본 그는 도마뱀이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암수, 흑배철석(黑背鐵蜥)인 것을 알아보았다.

강철처럼 단단한 몸을 지닌 도마뱀 암수는 실력은 그리 강하지 않아 축기 전후의 수사와 비슷했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군집 생활을 하는 요수라 때로는 수가 몇억 마리에 이를 때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암수인 흑배철석은 대낮에는 활동을 하지 않았다.

의문을 품었던 합체기 공봉은 이상한 생각을 지웠다. 어차피 저계 흑배철석 몇 마리뿐인데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또 다른 합체기 공봉도 흑배철석을 발견하고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선박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방의 도마뱀들이 가면 갈수록 많아지고 크기도 커졌다. 나중에는 결단기 이상의 흑배철석까지 나타났다.

“유 수사,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왼쪽 갑판의 합체기 공봉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기 수사의 뜻은…….”

오른쪽 갑판 공봉이 불길한 생각에 말을 하다 말았다.

합체기 공봉보다 의식의 힘이 약한 선박 위 다른 이들도 이제 흑배철석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선배님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구 씨 사내가 날듯이 다가와 급박하게 물었다.

“우리도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암수에 속하는 흑배철석들이 낮인데도 활동하고 있네. 신속히 이곳을 벗어나야겠어.”

유 수사와 시선을 마주친 기 수사가 답했다.

“전부 잘 들어라! 전속력으로 전진한다.”

그 말에 구 씨 사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수하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한립은 시종일관 옆쪽으로 물러나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에 구 씨 사내는 약간 불만이 있었지만 딱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따로 고용한 두 명의 합체기 수사 중 한 명이 실종되었고, 다른 한 명은 이곳 환경에 익숙하지 않으니 큰일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속도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선박은 나아갈수록 더 강력한 중력의 작용을 받았다.

꽤 품질이 좋은 선박이었지만 규모가 크다보니 비행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방의 흑배철석들은 수가 급증했고 멀리서 선박을 향해 공격적으로 포효를 해댔다.

도마뱀들 중에 더 크고 원영기 실력을 지닌 것들까지 나타나자 합체기 공봉들조차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곳을 일단 빠져나갔다가 며칠 후에 다시 지나시지요. 며칠 늦어도 안전하게 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보다 못한 구 씨 사내가 이렇게 말하자 합체기 공봉들도 동의하는 얼굴이었다.

이때, 이변이 발생했다.

쿠르릉!

전방에서 굉음이 들리고 주변 백 리의 사막이 진동을 했다. 허공의 선박마저 무언가에 영향을 받아 비틀거리고 있었다.

선박 위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무슨 일인지 살피는데 멀리서 굵직한 검은 기둥 같은 게 불쑥 솟아올랐다가 붕괴해 검은 알갱이로 흩어졌다.

선박의 수사들은 검은 알갱이들이 크고 작은 흑배철석들인 것을 알고 기함했다.

새까만 도마뱀들이 떨어져 내리며 하늘을 가린 통에 사막이 어둑해졌다.

“제길, 흑배철석 수조(獸潮)입니다.”

기 씨 공봉이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요수의 난 혹은 수조라 불리는 재난이었다. 구 씨 사내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얼굴에 핏기가 가셨고 한립도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도 흑암과벽에 관한 경전을 읽다 이곳에서 마주칠 수 있는 수조에 대해 읽은 적이 있었다. 선인조차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어서! 어서 뱃머리를 돌려라!”

구 씨 사내가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훔치며 목청껏 소리쳤고,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수하들이 동분서주하며 일에 착수했다.

우웅!

하얀빛을 강하게 머금은 선박은 쾌속으로 방향을 틀어 뒤쪽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얼마 달아나지 못해 전방에 쿠쿠쿵! 하는 괴음과 함께 지면이 갈라지고 검은 도마뱀 기둥이 솟아올랐다.

앞뒤로 수많은 도마뱀에 둘러싸인 선박은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돌아가려 해도 도마뱀 수가 워낙 많아 금방 포위되고 말았다.

이렇게 많은 흑배철석에게 공격당하면 제아무리 단단한 선박이라도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선배님들, 이제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구 씨 사내가 벌벌 떨면서 애처롭게 한립을 비롯한 합체기 수사들을 쳐다보았다.

두 합체기 공봉들도 어두운 얼굴로 싸울 준비를 했다.

선박을 버리고 달아나면 무사히 탈출할 확률이 5할 이상은 되었지만 선역 3대 상회인 승전상회의 공봉이 상단을 버리고 달아나면 황란대륙은 물론 북한선역 전체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호오.”

한립이 담담히 좌우를 살피다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왜 그러십니까, 류 선배님?”

“모두 자세히 보시지요. 흑배철석들의 목표가 우리가 아닌 듯합니다.”

그의 말에 주변을 살핀 합체기 공봉들도 희색을 드러냈다.

좌우에서 만나 흑배철석들이 합심해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물고 뜯고 할퀴느라 난리였다.

게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전방과 후방에서 나타난 흑배철석들의 모습이 약간 달랐다.

전방의 도마뱀들은 암홍색 무늬가 있는 반면 후방의 도마뱀들은 온몸이 새까만 색이었다.

“이제 알겠습니다. 종이 다른 흑배철석 떼가 서로 영역 다툼을 하는 모양이에요! 어쩐지 대낮에 나타났다했더니…….”

“목표가 우리가 아니라면 괜히 휘말리기 전에 어서 달아나야 합니다.”

기 수사와 유 수사가 한마디씩 하자 선박은 과감히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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