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9화. 전투
*
기운을 감춘 한립은 멀리서 거리를 두고 따라가 보았다.
홍군 여인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녹지를 벗어났고 녹지 변두리에서 멈춰선 한립은 그녀가 그저 상단을 떠나려는 것 같다는 생각에 홀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전방 천여 장 밖의 밤하늘에 거대한 그림자 3개가 나타나 홍군 여인 앞을 막아섰다.
한립은 거대한 그림자가 작은 산 크기의 하얀 설섬(雪蟾)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매끈한 피부를 지닌 거대 두꺼비 요수는 뺨과 사지가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었고 배는 얼음덩어리로 되어 있어 어두운 밤에도 차가운 빛을 반짝였다.
한립은 거대한 설섬들이 그의 강대한 의식을 속이고 숨어 있어 깜짝 놀랐다.
꾸르르, 꾸르륵…….
설섬들은 낮게 울부짖으며 거대한 입에서 진한 보랏빛의 혀가 반절쯤 튀어나왔다. 그리고 설섬들 머리 위쪽으로 두 명의 수사들이 나란히 서있었다.
눈처럼 하얗고 청수하게 생긴 이는 사내인지 여인인지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웠고, 그 옆에선 비대한 사내는 살이 뒤룩뒤룩 쪄 못생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 형제를 기억하느냐? 감구진!”
청수한 이가 홍군 여인을 가리키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가느다란 목소리도 매우 중성적이었다.
“사낸지 여인인지도 모를 조무래기 따위를 내가 기억해야 하나?”
여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감히……!”
두 뺨이 붉어진 청수한 사내는 너무 화가 나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를 몰라도 상관없다.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거란 것만 알면 된다.”
비대한 추한(醜漢)이 끼어들어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구진이라 불린 홍군여인은 그들이 쓸데없이 꾸물거린다고 느꼈는지 뜻밖에도 먼저 공격해 들어갔다.
그녀의 손목에서 붉은 팔찌가 붉은빛을 내뿜었다.
쿠오오.
하늘을 찌를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팔찌가 화염으로 이뤄진 거대한 용으로 변해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청수한 사내는 입술을 달싹이며 발끝으로 아래쪽의 설섬을 건드렸다.
꾸르륵!
설섬 세 마리가 동시에 입을 벌려 대량의 얼음기둥을 분출해 거대 빙산을 쌓아 화룡을 막으려 했다.
쿠쾅!
화룡이 빙산과 충돌해 사방으로 불꽃과 얼음 파편이 튀었다. 이에 화룡은 더 이상 원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불바다로 변해 남은 빙산을 녹였다.
화르륵!
불빛과 한기가 넘실거리며 하얀 수증기가 뿌옇게 일어 일대를 뒤덮었다. 잠시 구경하던 한립은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싫어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그가 막 몸을 돌렸을 때 정면에서 강력한 영력 파동이 밀려와 발길을 붙잡았다.
깜짝 놀란 한립은 두 팔을 교차해 앞을 막았다.
펑!
강렬한 충격을 받아 홍군 여인 방향으로 튕겨 나간 한립은 태일화청부의 은신 효과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공중에 멈춰선 그는 자신이 있던 자리에 하얀 설섬 허상 세 개가 떠있는 것을 발견했다.
감구진을 막아섰을 때와 같은 수법이었다.
“하하, 여기까지 따라와 놓고 왜 숨어 있는 것이지? 우리 아이들 중에 한 마리가 금정(金睛) 변종인 것을 몰랐구나!”
청수한 사내가 요사스럽게 웃음 지었다.
한립은 그제야 아래쪽의 설섬이 다른 두 마리와 달리 하얀 막으로 덮인 눈동자가 은은하게 금빛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저는 우연히 지나던 길로 당신들 일에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한립은 두 사내에게 담담히 입장을 밝혔다.
손목을 털어 빙산과 대치중이던 감구진은 한립을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지나던 길이든 아니면 저년을 도우러 따라 온 것이든 육섬융화진(六蟾融火陣)에 걸려들었으면 죽음뿐이다. 둘이서 황천길 길동무나 하거라!”
추한의 말이 끝나자 한립과 감구진 주위로 설섬 여섯 마리가 나타나 밤하늘에 격렬한 파동을 일으켰다.
거대한 은백색 수정벽이 허공에 나타나 한립과 홍군 여인을 중앙으로 몰고 있었다.
수정벽이 나타나자 한립은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꼈고 주변 허공에는 파삭파삭 육각형의 눈꽃이 맺혔다.
한립은 얼굴을 굳히고 법결을 발동했다.
푸른빛을 밝힌 그의 단전에서 선령력이 빠져나와 따뜻하게 그의 몸을 감싸고 음산한 한기에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기이한 한류(寒流)는 희미하게 법칙의 힘을 함유하고 있어 선령력 외투를 뚫고 진극막에 직접 닿고 있었다.
으스스해진 한립이 정염불새를 소환하려는 찰나, 몸에 붉은 화염층이 나타나 냉기를 대신 밀어내 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전신이 불길에 휩싸인 홍군 여인의 손끝에서 화염 실이 뻗어 나와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감춰두었던 수행을 개방한 그녀는 진선경 중기 수사였다.
“류석 수사,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저와 협공을 하시겠습니까?”
귓가에 감구진의 전음이 울렸다.
“육섬융화진이 협공을 원할 만큼 대단하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진화마저 없앨 수 있는 얼음 속성 진법인데 수사의 생각엔 어떨 것 같습니까?”
한립의 반문에 감구진이 냉랭히 답했다. 한립이 고민하는 동안에도 그들을 둘러싼 붉은 화염은 약해지고 있었다.
“이 진법은 특별히 저를 겨냥해 준비한 것이라 오래 버틸 수 없을 겁니다. 일단 냉기가 체내로 침투해 경맥을 막고 단전을 얼리면 당신과 전 다진 고깃살이 되고 말겁니다.”
“좋습니다, 협공하는 것으로 하시죠.”
그들이 막 동맹을 맺었을 때 청수한 사내의 주문소리가 들려왔다.
꾸르륵…….
여섯 마리 설섬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그들의 긴 혀가 목구멍에서 진동하며 형성된 은백색의 냉기가 수정벽으로 흘러들었다.
스스슷.
수정벽은 갈수록 두꺼워졌고 그 안의 기온은 더욱 떨어져 모든 게 뿌옇게 보였다. 눈에 보일 듯한 가느다란 냉기가 한립 주변의 붉은 화염을 잡아먹어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류 수사, 제가 전력으로 한기를 몰아내 주면 융화진법을 깰 방도가 있겠습니까?”
수결을 맺어 한기에 저항하던 감구진이 전음으로 물었다.
“저를 믿어주신다면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한립도 시간 끌지 않고 답했다.
화르륵!
말없이 손의 움직임이 빨라진 감구진 주변으로 화염이 더욱 성대하게 일었다. 동시에 그들을 잇는 화염 실도 두꺼워져서 한립은 한기의 침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남색 빛을 반짝이며 주위를 둘러보고는 갑자기 몸집을 부풀려 장벽 쪽으로 날아갔다.
감구진이 냉기를 몰아내준 덕에 엄청난 저온도 그를 어쩌지 못했다.
수정벽 어딘가에 멈춘 그는 한쪽 팔에 금색 비늘을 불러내고는 주먹을 뻗었다.
쾅!
맹렬한 화염에 둘러싸인 주먹이 수정벽을 강타했는데 얼음 조각이 튀거나 수정벽이 깨지기는커녕 눈부신 하얀빛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수정벽에서 쾌속으로 은빛이 뻗어 나와 한립을 휘감고 주위의 화염을 얼려갔다.
“역시…….”
곧 얼음 조각상이 될 것 같은 한립을 보고 감구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줄 알고 미리 한립을 희생양 삼아 시험해 본 것이었다.
펑!
그녀가 말을 끝맺기 전에 금빛을 방출한 한립이 꽝꽝 언 얼음을 털고 빠져나왔다.
“법체쌍수의 길을 걷는 분이셨군요. 이전에는 제가 수사를 얕보았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감구진은 곧 냉랭한 얼굴로 돌아가 칭찬을 건넸다.
“다시 이런 짓을 벌였다간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한립의 싸늘한 반응에도 그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 끝이었다. 자신의 행동에 전혀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융화한기(融火寒氣)에 봉인되면 반전의 법력이 얼어버릴 텐데, 어떻게……!”
“내 생각이 맞다면 저자는 현선일 게다. 진작 알았으면 그냥 보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청수한 사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비대한 추한이 섬뜩하게 눈을 빛냈다. 수정벽으로 날아간 추한은 한 손을 가져다 대고 주문을 외웠다.
웅!
추한의 몸에서 빠져나온 푸른빛이 작은 빛의 날개처럼 변해 아름답게 날아다녔다. 수정벽에 갇힌 한립은 불안해졌고, 감구진도 미간을 좁혔다.
수정벽의 은빛이 푸른빛과 반응해 맷돌 크기의 원형 문양진법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라!”
비대한 추한의 명에 문양진법들이 빛을 발했고 수정벽의 냉기가 뭉쳐 무수히 많은 얼음창을 형성해 한립과 감구진을 덮쳤다.
쉬쉬쉬쉬쉭!
한립은 두 주먹을 붕붕 돌려 수백 개의 금색 주먹 허상을 띄웠다. 다른 쪽에선 감구진이 손바닥에서 붉은 거검을 불러내 검무를 추었다.
붉은 검기들이 뭉쳐 만들어진 새빨간 태양이 허공에서 화염 덩어리를 날렸다.
콰쾅쾅!
굉음이 끊이지 않는 와중에 금색 주먹 허상과 붉은 화염 덩어리는 부단히 터져나갔는데 얼음 창은 부서지지 않고 충격에 물러섰다 다시 떨어져 내렸다.
한립은 계속해서 주먹을 붕붕 휘둘러 얼음 창을 밀어내면서 명청령안으로 사태를 파악했다. 얼음 창 위에는 지극히 가느다란 법칙 실이 하나씩 붙어있었다.
법칙의 힘이 실린 얼음 창은 단단한 만큼 꿰뚫는 힘도 강해 현선인 그의 몸도 공격을 당하면 멀쩡할 수 없었다.
‘진선경 초기밖에 안 된 저들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법칙의 실을 사용하는 것이지?’
한립은 무심코 감구진 수중의 붉은 거검을 보고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찬찬히 생각해 보니 떠오른 것은 ‘교삼’이란 호칭이었다.
‘설마 저 여인이 교삼?’
진선경 수사들을 이끌고 홍월도 도주를 죽인 임무의 책임자가 여인일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정벽은 점점 더 두꺼워져서 내부의 냉기는 짙어지고, 한립과 감구진이 활동할 공간은 좁아져만 갔다.
“류 수사, 이대로 가다가는 퇴로가 끊길 겁니다.”
감구진이 신중한 얼굴로 전음을 보내왔다.
“무슨 생각이 있으십니까?”
한립은 진작 정염불새로 체내의 급소들을 보호해 냉기가 침투하는 것을 막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상황이 불리해진다는 것에 동의하는 바였다.
“호법을 서주시면 진법을 깨보겠습니다.”
“그러죠.”
감구진이 교삼일 가능성을 떠올린 순간, 본 실력을 숨기기로 작정했기에 그녀가 대신 실력 발휘를 하겠다면 대환영이었다.
그는 주먹을 날려 달려드는 얼음 창들을 튕겨내고 펄쩍 뛰어 감구진 옆으로 이동해 두 팔을 뻗었다.
휘휘휙!
하얀 비검 아홉 자루가 그의 소매 속에서 날아올라 현란한 검빛들을 뿜어냈다.
한립이 수결을 맺자 하얀 검기들이 검실로 변해 조금 작지만 촘촘한 그물을 이루고 그와 감구진을 보호했다.
그걸 본 여인이 붉은 대검을 거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녀가 꺼내든 네모난 암홍색 옥패에서 은연중에 만황의 기운이 발산되었다.
수정벽 바깥에서 이를 본 비대한 추한이 입술을 달싹여 청수한 사내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둘의 수결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낮게 울부짖던 설섬 여섯 마리의 몸통에서 얼음이 녹아내리고 새까맣게 광택이 흐르는 육체가 드러났다.
팟.
이와 동시에 비대한 추한의 두 손도 검게 물들어 손바닥을 빠져나온 검은 기운이 수정벽에 흘러들었다. 그걸 보고 움찔한 한립은 소매 속으로 거무튀튀한 중수문뢰 여러 개를 몰래 쥐었다.
그런데 그가 구슬을 발동하기도 전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암홍색 옥패를 쥔 감구진도 밝은 빛에 휩싸였다.
‘이건 중력법칙? 아니야, 얼음 속성 법칙이야!’
한립은 금방 법칙의 힘에 의해 꽁꽁 얼어붙었다는 것을 알고 즉시 정염불새를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의식 속에서 불새의 애달픈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정염불새도 법칙의 힘에 제압당해 그를 도울 수 없었던 것이다.
도처에서 무수히 많은 얼음 창들이 검은색으로 변해 더욱 강력한 법칙의 힘을 품고 한립과 감구진에게 날아들었다.
이에 한립은 얼굴을 굳혔다. 현선의 육체를 지닌 그는 한동안 버텨내겠지만 감구진은 위태롭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으면 그 혼자 진법 안에 갇혀 악전고투를 벌여야 했다. 눈빛이 서늘해진 한립은 정혈을 태워 체내의 선령력 일부를 소매 속에 가려진 손으로 보냈다.
그 미약한 선령력에 자극을 받은 중수문뢰가 소매 속에서 떨어졌다.
쿠릉!
굉음과 함께 한립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검은 태양이 나타나 번득이는 은빛으로 한립을 뒤덮었다.
가까이 있던 감구진도 조금 늦게 혼돈과 같은 검은 빛에 잡아먹혔다.
쿠콰쾅…….
천둥소리가 부단히 들리고 가느다란 검은 빛들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원형의 기파를 이루고 엄청난 압력으로 얼음 창들을 밀어냈다.
놀랍게도 빼곡하게 밀려들던 얼음 창들이 깨져나가고 수정벽 속 공간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