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38화 (1,295/2,000)
  • 1538화. 동쪽으로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립은 중수 덩어리 대신 은색 뇌전 문양이 반짝이는 주먹 크기의 검은 구슬을 들고 있었다. 바로 중수문뢰였다.

    중수문뢰 제련이 퍽 익숙해지자 그는 구슬을 넣어두고 또 다른 중수 덩어리를 불러냈다. 그의 손에서 은색 뇌전이 일어 새로운 중수 속으로 날아들었다.

    중수문뢰의 위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으나 충분한 수량이 모이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기에 대비를 해둘 생각이었다.

    한 달이 흘러 첫 번째 경계 임무를 마칠 때까지 여정은 평화로웠다. 밀실에 앉아 있는 한립은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벌써 중수문뢰가 8개나 모였다.

    하나하나는 별것 아니지만 동시에 터트리면 진선 후기인 선인이라도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검은 구슬을 저물탁에 넣고는 단약을 복용하고 눈을 감았다.

    한참 후 피곤한 기색이 가시자 검은색 진법원반, 성이자모반을 꺼내들었다.

    한 달 전 그가 수정 알갱이 하나를 보내 주었으니 오늘은 지기화신이 중수를 보내야 할 날이었다.

    웅!

    법결을 던져 넣자 검은 빛이 휩싸인 성이자모반이 진동했다. 손가락으로 원반 몇 군데를 톡! 치니 검은 빛이 더욱 왕성해졌다.

    “흠?”

    한립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한차례 검은 빛이 요란하게 반짝인 후에도 원반 위는 텅 비어있었다.

    설마 지기화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벌떡 일어난 그가 생각에 잠겼을 때, 진법 원반에 검은 빛이 흐르고 소량의 중수 덩어리가 서서히 떠올랐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그는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중수를 거두었다.

    그런데 또 원반에 검은 빛이 흐르더니 시간차를 두고 소량의 중수 덩어리가 전송되어 왔다.

    막 표정을 풀었던 그의 얼굴이 다시 심각해졌다. 이제 보니 지기화신이 아니라 성이자모반에 문제가 생겨서 이전보다 중수 전송이 어려워진 것이다.

    검은 진법 원반을 들고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성석(移星石)이라 불리는 원반에 박힌 검푸른 영석 8개는 공간의 힘을 함유하고 있어 성이자모반 같은 전송 법기에 쓰인다.

    8개의 이성석들이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아직 그 힘이 충분한데 이상이 있는 것이 이상했다.

    ‘아!’

    고심하던 한립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거리가 멀어져서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전송진을 이용해 흑풍해역을 벗어났으니 지기화신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원반과 전송진은 구성 원리가 비슷하니 거리가 멀수록 전송이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심각한 문제였다. 막 황란대륙에 도착한 지금도 이런데 더 먼 촉룡도까지 가면 성이자모반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촉룡도에 안 갈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한립은 잠시 생각하다 이 문제는 촉룡도에 이른 다음 해결 방법을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그는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는 성이자모반에 법결을 던져 넣어 전송 속도를 높였다. 그래도 원반은 소량의 중수를 느릿느릿 가져올 뿐이었다.

    지기화신이 한 달 동안 정련한 중수를 흑풍해역에서는 순식간에 전부 전송받았는데 이곳에서는 장장 3일이나 걸렸다.

    한립은 성이자모반의 이성석들이 반투명하게 변한 것을 보았다. 이번 전송으로 영력이 크게 쇠한 모습이었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몇 번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한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원반을 넣어 두고 중수 덩어리를 불러내 은색 뇌전을 분출하는 일을 지속했다.

    * * *

    보름은 순식간에 지나가 다시 경계를 서야하는 때가 되었다. 방에서 나온 한립은 선박이 울창한 밀림지대로 들어선 것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홍군 여인도 사뿐사뿐 갑판으로 올라오고, 그들은 말없이 시선만 마주친 뒤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미장삼림 깊숙이 진입해 고계 조류 요수들이 적지 않게 출몰하니 주의하셔야 할 겁니다.”

    상회의 두 합체기 공봉이 피곤한 얼굴로 당부했다.

    “이제 두 분 선배님께서 수고를 좀 해주시지요.”

    구 씨 사내도 갑판으로 올라와 한립과 홍군 여인에게 손을 모아 인사했다.

    오는 내내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수시로 갑판에 올라와 주위를 두리번거렸는지 출발하기 전보다 피부가 푸석하고 눈에 실핏줄이 보였다.

    “내 맡은 바 책임은 다할 것이니 안심해도 되네.”

    한립은 그런 사내를 향해 한마디를 해주고 선박의 왼쪽에 가서 앉았다. 홍군 여인도 말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표표히 날아올라 선박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평온하게 날아가던 하얀 선박 앞쪽 밀림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붉은 구름이 떠올라 선박으로 쇄도했다.

    선박을 가린 하얀 구름에 전혀 미혹되지 않은 듯했다.

    “저건…….”

    두 눈에서 남색 빛을 반짝인 한립은 붉은 구름의 정체가 이상하게 생긴 붉은 새 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람보다 몇 배는 몸집이 큰 괴조들은 깃털이 많지 않아 주름진 붉은 피부가 그대로 드러났고 머리에는 닭 벼슬 같은 새빨간 벼슬이 솟아 있었다.

    특히 유난히 커다란 두 발톱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헉, 계관조(鷄冠鳥)!”

    그때 밖에 나와 있던 구 씨 사내가 안절부절못하며 소리쳤다.

    붉은 괴조들은 비행 속도가 극히 빨라 몇 호흡 만에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거리에 진입했고, 천여 마리에 달하는 새들이 각각 원영기 수사에 맞먹는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알알알알!

    흥분한 괴조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분출한 붉은 불구슬들이 하늘을 뒤덮었고 동시에 커다란 발톱에서 낫 형태의 붉은 빛들이 쏘아져 나와 귀청을 찢을 듯한 파공음과 함께 날아들었다.

    “어서 방어막을 작동하라!”

    구 씨 사내의 명령에 웅! 진동한 하얀 선박 주위로 빛 알갱이들이 떠올라 두꺼운 흰색 보호막을 응결했다.

    퍼퍼퍼퍼펑!

    붉은 불구슬과 발톱 빛이 보호막과 충돌해 연신 굉음이 터져 나왔다. 하얀 보호막은 아주 견고해서 쏟아지는 공격에도 깨지지 않고 반짝이기만 했다.

    이때 몸을 띄운 한립이 한 손을 저었다.

    쉬쉬쉭!

    9개의 하얀 비검이 그의 몸을 빠져나갔다. 하얀 기운을 자욱하게 머금은 한 벌로 된 영보급 보물이었다.

    대살의 저물대에서 찾은 것이었는데 어차피 손에 익은 법보도 없고 한 벌로 된 것이 청죽봉운검과 비슷해 남겨 두었었다.

    한립이 검결을 맺자 밝은 빛을 발한 9개의 비검이 수백 개의 하얀 검실로 변해 대형 그물을 만들어냈다.

    벌떼처럼 날아들던 붉은 괴조 떼는 하얀 검실 그물에 닿자마자 조각조각 나 핏물을 쏟아냈다. 괴조 수십 마리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한립의 공격에 홍군 여인도 서둘러 움직였다.

    그녀 앞에 나타난 붉은 화염으로 이루어진 화룡(火龍)이 입에서 굵직한 불기둥을 쏘아 똑같이 불 속성인 괴조들을 재로 만들었다.

    새떼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실력차이가 컸기에 한립과 홍군 여인은 신속히 태반의 괴조들을 죽였고 나머지는 미친 듯이 날갯짓을 해 달아났다.

    한립은 깨끗해진 하늘을 보고 수결을 풀고는 비검들을 회수했다.

    윙윙윙윙!

    하지만 하얀 선박은 얼마 가지 못해서 검은 벌 떼의 습격을 받았다. 이에 한립은 또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비검을 방출해야 했다.

    미장삼림 심처에 이르자 역시나 각종 비행 요수들이 수시로 나타나 선박의 은닉 신통을 꿰뚫어보고 공격을 했다.

    어떤 때는 하루 동안 각기 다른 요수들에게 열 번 이상을 공격을 당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이곳 지형에 익숙한 구 씨 사내가 고계 요수들이 머무는 곳은 빙 돌아서 갔기에 습격하는 요수들은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고, 보이는 것과 달리 수행이 합체기를 월등히 초월하는 한립과 홍군 여인이 있었기에 선박의 이동은 여전히 순조로웠다.

    한동안 지켜보던 구 씨 사내도 점점 마음을 놓았다.

    * * *

    경계를 선지 십여 일째 된 어느 날.

    휘이잉!

    하얀 검실들이 빙글빙글 돌아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산봉우리만 한 푸른색 괴수를 가두고 있었다.

    분노에 차 포효를 터트리는 괴수의 몸에서 검푸른 금속성의 광채가 튀어나와 몰아치는 검실들의 공격을 막았다.

    동시에 괴수의 입에서 푸른 바람이 흘러나와 검실 소용돌이를 뒤흔들려 했다. 그러나 강력한 하얀 검실들은 금방 푸른 괴수의 금속성 광채를 산산조각내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서걱서걱!

    괴수는 참혹한 비명을 내지르며 검실에 잘려 살점 덩어리로 변해버렸다.

    한립의 손짓에 검실들이 아홉 자루의 비검으로 돌아가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하얀 선박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울창하던 밀림지대가 사라지고 넓은 평지가 나타나 거의 미장삼림을 벗어난 것 같았다.

    반나절 만에 숲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자 검은 돌들이 깔린 황량한 자갈사막 지대가 눈에 들어왔다.

    서서히 멈춰 선 하얀 선박에 구 씨 사내와 두 합체기 공봉이 나타나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해가 져가니 흑암과벽(黑巖戈壁)으로 진입하기 전에 이곳에서 하룻밤 쉬었다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할 것이다.”

    한립은 흑암과벽이란 이름을 어느 경전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지하광맥 때문에 지심원자력(地心元磁力)이 영향을 받아 중력이 다른 곳보다 몇 배로 강한 굉장히 위험한 지역이었다.

    거기다 이곳에는 낮에는 땅속 깊은 곳에 숨어 있고, 밤에 나와 활동을 하는 강력한 야행성 요수, 암수(暗獸)가 서식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 자갈사막을 지나는 이들은 반드시 날이 밝은 후 전력으로 이동했다. 선박이 천천히 지면으로 하강했다.

    갑판 위에는 번을 서는 합체기 공봉 둘만 남고 나머지는 선실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 * *

    밤이 깊어 어두운 남색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자 둥근 보름달이 떠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사막의 밤하늘에 별들만이 흩어져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암벽 옆에 정박한 선박도 어둠에 잠겨 몇몇 선실에서 새어나오는 등불만이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이때 선박에서 키 큰 인영이 소리 없이 빠져나와 바깥의 자갈 바닥에 내려섰다. 바로 한립이었다.

    제비처럼 암석들 사이사이를 지나 빠르게 쏘아져 나간 그는 선박에서 멀리 떨어져서야 둔광을 일으켜 하늘을 갈랐다.

    단숨에 십여만 리를 이동한 그는 사막에 위치한 녹색 지대에 내려섰다. 수백 리에 달하는 녹지에는 주로 더위와 추위에 강한 사막 미루나무와 호수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녹지를 초승달 모양으로 둘러싼 작은 호수에 달빛이 비추어 제법 운치가 있었다.

    찰랑.

    호수로 걸어간 한립은 손으로 물을 떠서 맛보았다. 맑고 감미로운 물맛에 입안이 시원해졌다.

    바닥에 앉은 그는 의식을 방출해 주변 수만 리를 살핀 뒤 품속에서 암녹색 작은 병을 꺼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어서 한 줄기 별빛이 드리우자 작은 병위에는 이파리 모양의 문양이 반짝였다. 작은 병은 하얀빛에 휩싸여 점점 더 눈부시게 변했다.

    호수 표면에 하얀빛이 비쳐서 눈 덮인 설원처럼 풍경 전체가 하얗게 보였다.

    한립은 눈을 감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가 금방 다시 눈을 떠야 했다.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즉시 작은 병을 품에 숨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출했던 의식을 회수하고 근처의 호수 버드나무 뒤로 가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그의 머리 위로 누군가 휙 지나쳐 먼 곳으로 사라져 갔다. 영력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마치 범인이 날아간 것 같았다.

    ‘저 여인이 여긴 어쩐 일이지?’

    두 눈에서 남색빛을 반짝인 한립은 붉은 신영을 확인하고 의아해했다. 흑풍해역에서 같이 전송되어 온 홍군 여인이었다.

    자신을 노린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지만 둔광 속도를 낮추고 은밀하게 이동하는 게 이상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서 뭘 하려는 걸까…….”

    침음하던 그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보라색 태일화청부를 불러냈다. 부적이 보랏빛을 머금고 그는 흐릿하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