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7화. 선잔(仙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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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정리한 한립은 주근깨 사내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잡화점을 나왔다.
임해성은 따로 금공금제가 존재하지 않아 한립은 대로를 따라 날아가 금색 건물 앞에 내려섰다.
나지막한 언덕 위에 건축된 순금으로 된 건물 꼭대기에는 거대한 금룡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거대 금룡 부조 덕분에 황궁을 닮은 건물의 위엄이 더 서는 느낌이었다. 그 금색 궁전 대문에 ‘仙棧(선잔)’이라는 고대 문자가 적혀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무척 거대한 대청이 펼쳐졌는데 적어도 천여 명이 오가는 듯 보였다.
다양한 복색을 한 수사들은 대부분 화신기 이하의 중저계 수사였고 연허기 이상의 수사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대청 왼편에 위치한 대형 상점은 각종 단약, 법보 재료를 팔고 있는데 물건의 품질이 바깥보다 좋아 많은 수사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청 오른쪽에는 입구에 기다란 돌 탁자가 놓인 매입 전문 점포가 있어 각종 재료를 팔려는 수사들이 길게 줄을 서있었다.
대청과 이런 점포들을 관리하는 이들은 전부 금색 의복을 입은 수사들로, 금포에 똑같은 금룡(金龍)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수행이 높은 이는 대청 깊은 곳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연허기 수사였다. 마치 대청 안이 또 하나의 작은 성 같았다.
대청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은은하게 금빛이 흐르는 청옥 석벽 위에는 작은 글자들이 떠올라 각종 임무와 보수를 알렸다.
석벽 인근에 모인 수사들은 임무를 살피거나 몇몇 씩 모여 어떤 임무를 맡는 것이 좋을지 논의를 하고 있었다.
좌우 상점을 둘러본 한립은 곧장 중앙 석벽 아래로 가서 어떤 임무가 있는지 보았다.
임무가 너무 많아 석벽이 깜빡일 때마다 다른 임무들이 떠올랐다.
맨 위에 금색으로 적힌 임무들만이 항상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아래 하얀색으로 적힌 글자들은 돌아가며 나타나는 형식이었다.
한립은 주변 인물들이 떠드는 소리를 통해 그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금색 글자는 선궁이 발표한 임무이고, 아래쪽 하얀 글자는 일반 수사가 등록한 임무였다. 역시 동행을 구하는 임무도 제법 보였다.
그 중에는 단순히 같은 목적지로 동행하자는 것도 있었고 호송임무도 있었다. 이동 거리가 길면 보통 화신, 연허기 이상의 수사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란대륙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 위험 지역이 허다했다.
심지어 대부분 다른 성으로 가려면 수십 만 리에 달하는 인적이 없는 황무지를 지나야 해서 수행이 부족하면 죽기 십상이었다.
한립이 정해둔 목적지는 이곳에서 그나마 가까운 황란대륙 중부의 명구성(明丘城)이었다. 재빨리 임무를 훑은 그의 눈에 세 가지 임무가 들어왔다.
단순히 일행을 모집하는 임무, 상인무리를 호송하는 임무 그리고 사람을 호송하는 임무였다.
“252번 임무를 맡고 싶네.”
한립은 석벽 옆에 앉아 있는 금의 중년인에게 말했다. 252번은 상인 무리를 호송하는 임무였다.
다른 두 가지 임무는 출발하려면 멀었지만 이건 며칠 내로 바로 출발할 수 있었다.
“선령부터 주세요.”
서책 모양의 옥판을 하나 들고 넘겨보던 중년인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선령?”
멈칫한 한립은 금방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선령은 임무를 수령하기 위해 필요한 신분영패의 일종일 것이다.
“아직 선령도 받아오지 않으신 겁니까? 저쪽에 있는 방이 보이시죠? 그곳에서 받아오시면 됩니다.”
금의 중년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청 깊숙이 위치한 푸른 문을 가리켰다.
한립은 외양을 바꾼 환술이 걸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푸른 문 쪽으로 걸어갔다.
십방루의 수배가 내려진 상황에서 북한선역 전역에 퍼져 있는 선궁에 자신의 행적을 들키고 싶진 않았다.
푸른색 여닫이 문 앞에 선 그는 작게 숨을 내쉬고 문을 두드렸다.
끼익!
문이 저절로 열렸고 그 안에는 합체기 수행을 지닌 금포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걸 본 한립은 일단 안심했다. 상대의 수행과 의식으로는 자신의 가짜 용모를 꿰뚫어볼 가능성이 극히 낮았다.
“선령을 받으러 오셨군요. 들어오시죠.”
노인이 안으로 들어오길 권하는 손짓을 하자 한립이 공수를 하고 들어갔다.
“성함과 출신지역을 말해 주십시오.”
신속하게 은색 붓을 든 노인은 서책을 펼치고 대답을 기다렸다.
“류석, 흑풍해역 출신입니다.”
한립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노인은 은색 붓으로 서책에 몇 글자를 적어 넣고 금색 영패를 불러냈다.
화앗!
영패에서 금빛이 흘러나와 한립을 환하게 감쌌다. 순간 긴장했지만 한립은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금빛은 되돌아가 한립의 지금 모습을 영패에 새기고 사라졌다.
“됐습니다. 이 선령은 앞으로 각지의 선잔에서 임무를 맡고 보수를 수령할 때 신분증명으로 사용되니 잘 보관하시기 바랍니다.”
노인은 금색 영패를 던져주며 당부했다.
한립은 조금 얼떨떨했다. 금빛이 그의 모습을 기록한 것 외에 특별한 조사랄 것도 없이 영패를 주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무상맹 가면에 선궁의 신분 조사를 피하는 특수 기능이라도 있는 것인가?
“선궁은 수사들에 관해 굳이 과도한 정보를 요구하거나 신분의 진위를 판별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보던 금포노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말에 한립은 노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나왔다.
선잔 1층에서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수많은 수사들을 보고서야 방금 들은 말이 이해가 되었다. 쉽게 선령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었다.
선령을 취득한 그는 바로 임무를 맡을 수 있었다. 금의 중년인이 날린 법결을 흡수한 선령에 성의 어느 객잔으로 가라는 정보가 떠올랐다.
임무를 발표한 사람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 * *
임해성, 백운객잔(白雲客棧).
특별할 것 없는 대형 객잔은 성 안의 다른 객잔처럼 범인과 수도자를 모두 손님으로 받았다.
물론 객잔에서 머무는 이들은 수행이 높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안전과 편의를 위해 범인인 척 하기도 했다. 이건 일종의 속세에서 활동하는 수도자들의 사회규범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자기 옆방에 하늘을 날아다니고 물과 바람을 일으키는 ‘선인’이 있다고 생각하면 밤새 잠이나 잘 수 있겠는가?
오늘 백운객잔은 다른 때보다 더욱 부산했다.
며칠 전부터 상단이 객잔을 통째로 빌려 객잔의 장궤와 직원들도 물리고 바삐 일을 하고 있어서였다.
객잔의 식당부터 후원까지 물건을 가득 실은 커다란 상자들이 쌓여 있었고, 정원 밖에는 황란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운송수단인 마수가 끄는 화물마차가 가득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부유해 보이는 중년 사내가 그 사이를 오가며 수하들이 화물을 마차에서 정원에 정박한 하얀 선박에 옮겨 싣는 것을 감독하는 중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통통한 중년 사내의 얼굴에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북한선역 3대 상회 중 한곳인 승전상회(丞全商會)의 책임자인 그는 최근 백년 간 인근 지역의 특산물인 진귀한 재료들을 모아두었다.
대륙 간 이동에 위험이 따르는 만큼 안전하게 이 화물들을 대륙 중앙의 명구성으로 옮기면 몇 배로 가격을 올려 받을 수 있었다.
유일한 문제가 화물 중 대량의 재료들이 신선도를 위해 저물 법기에 담을 수 없어 비행 선박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것이 처음이 아닌 그는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최근 대륙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아서 연허기 공봉(供奉)이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니 더욱 몸을 사려야 했다.
그 자신은 겨우 화신기 수사였고 상회에서 객경으로 모신 공봉 중에 합체기에 이른 이가 둘 밖에 되지 않아 이번에는 막대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선잔을 통해 동행할 합체기 수사 두 명을 더 모집할 계획이었다.
이때 푸른빛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검은 피부에 붉은 수염을 지닌 거한이 나타났다. 바로 변장을 한 한립이었다.
통통한 중년인은 그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달려 나왔다.
“허허허, 호송 임무를 위해 오신 선배님이시지요! 존함을 알고 싶습니다.”
“나는 류석일세. 구 수사가 맞는가?”
“예, 바로 접니다.”
고개를 끄덕인 통통한 사내는 한립을 객잔 안으로 들이고 수하에게 차를 내오게 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선배님의 선령을 제가 봐도 되겠습니까?”
사내는 한립이 자리에 앉자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는 말없이 선령을 꺼내 던져 주었다. 구 씨 사내는 아무런 이상이 없자 웃음이 더욱 밝아졌다.
“괜히 성가시게 해드렸습니다. 이틀 후면 출발할 예정이니 객잔 위층에서 푹 쉬시지요.”
곧 한립은 2층의 큰방으로 안내가 되었다.
그는 진법을 펼치고 침상에 정좌를 하고는 곧바로 두꺼운 경전들을 꺼내 놓았다. 성에 들어와 구입한 황란대륙에 관한 서적들을 읽어볼 참이었다.
* * *
이틀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갔다.
깊은 밤, 모든 화물을 실은 하얀 선박이 서서히 떠올랐고 뱃머리에 선 열댓 명의 수사 중에는 한립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 씨 사내 소관의 상회 수사들은 합체기 수사 둘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수행이 높지 않았다.
갑판에 선 한립의 시선은 그들이 아닌 뱃머리에 기대선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에게 닿아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자 그녀는 흑풍해역에서 함께 전송되어 온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이었다.
합체 초기의 기운을 내뿜는 그녀는 용모를 바꾼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선배님들 그리고 모두들 이번 상행은 여러분만 믿겠습니다.”
출발을 하려니 떨리는지 구 씨 사내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는 한립과 홍군 여인 방향을 보고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손을 저어 법결을 날렸다.
웅웅.
하얀 문양이 떠오른 선체에서 안개가 자욱하게 흘러나와 선박 전체를 보호했다. 밖에서 보면 허공에 뜬 하얀 구름처럼 보였다.
쉬익!
파공음을 내며 밤하늘을 가르기 시작한 하얀 구름은 속도도 무척 빨랐다.
“제가 생각을 해본 바로는, 가는 동안 선배님 두 분과 상회의 공봉 두 분께서 각각 조를 이루어 보름씩 번갈아 가며 호위를 맡고 다른 조는 휴식을 취하는 식으로 해볼까 합니다. 어떠십니까?”
“수사의 생각대로 하지.”
구 씨 사내의 말에 한립이 답했다. 홍군 여인 역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상회 공봉인 두 명은 당연히 이의가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보름간 선배님들은 휴식을 취하시고 두 분께서 먼저 좀 고생을 해주시지요.”
구 씨 사내의 말에 합체기 공봉 둘이 선박 좌우로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한립과 홍군 여인은 구 씨 사내의 안배에 따라 각자의 선실로 내려갔다.
응접실, 침실 그리고 작은 밀실까지 갖춘 선실은 모든 가구가 잘 구비되어 있었다.
한립은 손에서 수십 개의 푸른빛을 뻗어 선실 곳곳에 푸른 보호막을 형성했다.
보름의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그의 손짓에 허리춤의 진수대에서 검은 덩어리가 떠올랐다.
콰릉!
한립은 양손으로 수결을 맺어 은색 뇌전들을 차례로 중수 속으로 던져 넣었다.
검은 중수는 자극을 받은 듯 부풀어 올라 언제든 터질 것 같았지만 그의 두 손에서 흘러나온 푸른빛이 막을 이루어 폭발을 막고 있었다.
금을 타듯 빠르게 움직이는 열손가락에서 법결들이 쏘아져나갔고, 중수 속의 은색 뇌전들은 굴복하여 은색 뇌전실로 변해갔다.
가느다란 물빛이 비친 중수도 차차 안정을 찾으며 은색 뇌전실과 섞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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