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6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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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치마 여인은 자신을 훔쳐보는 시선을 무시하고 팔짱을 끼고 있다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살짝 고개를 들어 한립 쪽을 쳐다보았다.
마침 한립이 시선을 거둔 뒤였기에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모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시간이 되었으니 각자 이 부적을 손에 쥐고 진법에 오르시면 됩니다.”
이때 어떤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법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회색 장포 노인이 어느새 일어나 원형진법을 들고 있었다.
노인은 소매를 털어 수십 개의 남색 부적을 한 치의 오차 없이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퍽 현묘해 보이는 남색 부적을 받은 한립은 반짝이는 은색 주술문자가 은과문인 것을 보고 눈을 빛냈다. 다른 이들은 부적을 손에 쥐고 곧장 원형 문양진법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립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따라 진법 올랐고 노인은 진법원반에 법결을 던져 놓고 주문을 외웠다.
우우웅!
둥근 벽의 주술문자들이 밝은 빛을 내뿜고 모든 영석들이 찬란한 광채를 발산했다. 영석이 함유하고 있던 영력이 홍수처럼 원탑 내부를 채우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올라선 문양진법이 눈부신 하얀 빛을 머금은 순간, 모두가 빛에 삼켜졌다.
휘잉, 휘잉-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천지가 뒤집히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인 한립은 바람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하는 것을 들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강풍은 그의 몸에 닿기 전에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차단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차츰 이상한 감각들이 사라지고 시야가 맑아졌다. 그는 이미 다른 이들과 같이 또 다른 거대 지하 동굴 안에 도착해 있었다.
천성탑과 비슷하게 생긴 벽면과 바닥에는 주술문자가 각인되어 있었고 영석들이 곳곳에 박혀 반짝였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부적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한립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세히 살펴볼 생각이었는데 백년에 한번 뿐인 전송의식은 정말 바람처럼 지나가 버린 것이다.
전송진 밖에는 혈색 좋은 산선 노인네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그 뒤로는 흑풍해역 수사들과는 복장이 확연히 다른 이삼십 명의 사람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도착한 사람들이 전송진에서 나오기를 기다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그들과 스쳐지나가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긴장해 그들 중 몇 명을 곁눈질했다.
그의 시선을 끄는 이들 중에는 사내도 있고 여인도 있었는데 평범한 외모와 달리 무의식중에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때 그들과 같이 전송되어온 우람한 체구의 거한이 산선 노인 앞으로가 인사를 했다.
“역 형,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하, 도주께서 누굴 보내나 했는데 노 아우가 왔구만! 이제 이곳은 자네에게 맡길 테니 한적한 나날을 즐기시게. 난 돌아가 봐야겠어.”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원형의 진법원반을 건네주며 웃었다. 그리고 거한과 짧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진법 위로 올라섰다.
웅, 웅-!
동굴 안이 하얀빛으로 가득차고 진법 안 사람들이 흑풍도로 전송되었다. 한립은 그들이 가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때 푸른 피부 거한이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흑풍동(黑風洞) 전송진은 백년 간 폐쇄됩니다. 흑풍해역으로 돌아가려거든 백년 후에 전송진이 개방될 때 충분한 선원석을 준비해서 이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이 동굴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만여 리 정도 가시면 임해성(臨海城)이 나오니까, 황란대륙이 처음이신 분들은 그곳에서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다들 가시는 길이 순조롭기를 빕니다.”
사람들은 거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를 향해 포권을 하고는 동굴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무리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바다냄새 가득한 해풍이 가장 먼저 그를 맞이했다.
고공으로 날아오른 그는 광활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앞쪽으로는 파도가 넘실되는 쪽빛 해양이, 뒤로는 구불구불한 푸른색 해안이 펼쳐졌다.
그가 막 빠져나온 동굴은 바로 해안 중에 툭 튀어나온 절벽에 위치해 있었다.
그와 같이 이곳이 도착한 이들은 대부분 둔광을 일으켜 흩어졌고, 홍군(紅裙) 여인도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밝은 빛줄기로 변한 한립은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처음에는 황량한 풍경이 이어지다가 내륙으로 진입하자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수목들이 어찌나 큰지 한 그루 한 그루가 우뚝 솟은 산봉우리 같았고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땅에는 관목과 잡초들이 자라나 덤불을 이루었다.
시야의 끝까지 펼쳐진 만황밀림에서는 이따금 요수의 것으로 추정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광활한 밀림을 보면서 묘한 설렘을 느꼈다.
같은 방향으로 반 시진을 더 날아가자 해안을 낀 성의 윤곽이 드러났다.
수백 리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지만 두꺼운 황사 보호막을 두르고 있어 멀리서 보면 노란 거북이처럼 보였고, 성문에 ‘臨海城(임해성)’이라는 세 글자가 고대문자로 적혀 있었다.
노란 보호막은 오직 성문 앞쪽에만 출입통로가 뚫려 있어서 매우 북적였다.
수시로 수사들이 빠져나와 홀로 혹은 무리를 이루어 밀림 쪽으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몇몇 수사들이 밀림 방향에서 날아와 성 안으로 들어갔는데, 핏자국과 먼지가 가득했지만 표정만은 좋아 보였다. 그런 모습을 눈에 담은 한립은 출구 쪽으로 내려갔다.
기운을 거두고 평범한 합체기 수사로 가장한 그는 다른 이들과 섞여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에는 청포를 입은 연허기 병사 두 무리와 그들의 수장인 듯한 합체기 수사가 서있었다.
그들은 딱히 신문을 하거나 하진 않았고 그저 한립처럼 낯선 얼굴의 수사들에게 약간의 영석을 거두고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성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길이 펼쳐졌고 다양한 상점들로 가득했다.
돌아다니는 이가 많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이 수사, 그것도 중고계 수사였고 범인들은 많지 않았다.
외관이 초라한 상점들은 각종 영초와 광석 그리고 요수 재료 등 제련에 필요한 원재료 등을 주로 취급했다.
“호오.”
상점들을 본 한립은 감탄했다.
겉모습과 달리 진열된 상품들은 품질이 흑풍성 고급 상점 못지않았다. 임해성은 거주지라기보다는 오가는 수사들의 보급을 위해 존재하는 거점 같았다.
한립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잡화점으로 들어갔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사내가 계산대 뒤에 앉아 있다가 그를 보고 서둘러 일어났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저희 상점이 규모는 작아도 없는 게 없습니다.”
화신기 수사인 주근깨 사내는 한립의 기운을 느끼고 굉장히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지도도 있더냐?”
“물론입지요! 저희가 취급하는 미장삼림(迷葬森林) 지도는 아주 자세해서 사냥을 하시든, 영초를 찾아다니시든 문제없이 다니실 수 있을 겁니다.”
사내는 손바닥을 비비며 설명하다 푸른 옥간을 꺼내들었다.
‘미장삼림…….’
임해성 밖의 만황삼림 이름이 미장삼림인 듯했다.
“미장삼림 지도를 찾는 것이 아니다. 황란대륙 지도도 판매를 하느냐? 다른 대륙 지도도 있다면 전부 꺼내 보거라.”
한립의 말에 주근깨 사내는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왜 그러지? 없는 것이냐?”
“아니요, 있습니다. 있고말고요.”
한립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사내는 퍼뜩 정신을 차렸는지 노란색과 남색 옥간을 꺼내 건네주었다.
한립은 노란 옥간에 바로 의식을 주입했다.
“그건 황란대륙 지도입니다. 남색 옥간이 인근 지역 지도이고요. 선배님께서 지도를 찾으신다면 저희 상점에 잘 오신 겁니다. 소인의 가문이 대대로 지도에 관련한 장사를 했으니 말입니다. 황란대륙 지도는 몰라도 인근 대륙지도는 임해성 전체에서 소인 밖에는 취급을 안 할 겁니다.”
사내는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허풍은 아니었는지 노란 옥간 안에 담긴 지도는 아주 자세했다. 그저 황란대륙의 지형만 그려 넣은 것이 아니라 특수한 지역 표시와 상세한 설명도 되어있었다.
그 중 임해성 밖의 미장삼림은 억만 리 면적의 숲 속에 각종 요수들이 도사리고 심처에는 진선급 요수가 서식해서 극히 위험한 지역으로 꼽혔다.
각종 천지보물이 풍부해 멀리서도 수사들이 찾아와 미장삼림에서 사냥과 채집을 했는데 일단 숲으로 들어가면 요수에게 죽든 아니면 다른 수사에게 살해를 당하든 아무도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황란대륙에는 미장삼림 말고도 위험지역이 꽤 많았다. 이곳과 비교하면 흑풍해역은 비교적 안전한 구역이었다.
의식을 회수한 한립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미리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흑풍해역 바깥의 선계는 그의 예상보다 더 위험했다.
그의 실력으로도 무사히 황란대륙을 지나갈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다음으로 남색 옥간에 의식을 불어넣은 그는 길게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인근의 다른 대륙 지도가 맞기는 했는데 황란대륙 지도에 비하면 아주 엉성했고, 그저 중요한 지역에만 약간의 주석이 달려있었다.
지도에 따르면 황란대륙과 그 동쪽에는 촉룡도가, 고운대륙과의 사이에는 뇌폭해양(雷暴海洋)이라는 해역이 존재했다.
게다가 그가 위치한 임해성은 황란대륙 서북쪽 끝에 있어서 고운대륙까지 가려면 일단 황란대륙을 횡단한 뒤 뇌폭해양을 건너야 했다.
지도에는 뇌폭해양이 사시사철 뇌전이 미친 듯이 내리치는 뇌전폭풍 지대라고 적혀 있었다.
“저……. 괜찮으십니까, 선배님?”
두 옥간을 들고 멍하니 서있는 한립을 보다 못한 주근깨 사내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얼마지?”
사내의 물음에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가격을 치르고 따로 계산대에 얼마간의 영석을 올려놓았다.
“가문 대대로 지도 장사를 했다고 했으니 황란대륙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몇 가지 질문에 만족할 답을 준다면 이것도 네 것이다.”
“제가 아는 것이라면 숨김없이 대답하겠습니다.”
사내는 힐끗 상품 영석들을 보고는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들기며 답했다.
“임해성에서 출발해 황란대륙을 가로지르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 무엇이냐? 예를 들어 전송진이 있다던가?”
“아, 황란대륙에 대해 정말 잘 모르시는군요. 인근 대륙 중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한 황란대륙은 대부분이 황무지입니다. 성이 있더라도 인구가 희박해서 전송진을 설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요! 특히 이곳 임해성처럼 작은 성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시든 날아가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 사내의 말에 한립이 미간을 좁혔다.
“그, 그래도 가는 내내 날아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임해성에는 없어도 대륙 중부로 가시면 몇몇 세력들이 성 안에 설치해둔 전송진이 있으니까요. 물론 이용 가격은 결코 싸지 않을 겁니다.”
“어느 성에 전송진이 있는지도 아느냐?”
“하하, 아마 못 보셨겠지만 조금 전 구입하신 황란대륙 지도에 표시해두었습니다. 하얀 소용돌이 표식이 바로 그것이지요.”
이번 질문에는 사내도 자신 있게 답했다. 바로 노란 옥간에 의식을 불어넣은 한립은 중부와 동부의 몇몇 성 위에 아주 작게 하얀 소용돌이 표식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군.”
의식을 회수한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부 지역 뒤쪽으로는 소용돌이 표식이 된 성이 많아 일단 중부지역으로만 가면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할 일이 없을 듯했다.
“저기……. 선배님께서 황란대륙을 가로질러 가시려는 것이지요?”
머뭇거리던 사내가 질문을 했고 한립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혼자 가시면 위험한 일이 많으실 겁니다. 소인의 생각에는 일단 선잔(仙棧)으로 가보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알아들었다. 잘 답해 주었으니 영석은 네 것이다.”
흑풍해역에서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선궁과 교류하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소위 선잔이란 곳은 선궁에서 각지에 설치한 선궁이 발표한 임무를 얻거나 개인이 임무를 등록할 수 있는 장소였다.
잡화점 장궤의 뜻은 합체기 수행을 지닌 그가 대륙을 횡단하는 것은 너무 위험할 테니 이동경로가 비슷한 임무 대열에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본래 수행으로 그냥 대륙을 횡단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으나 일단 이곳에 대해 잘 몰랐고, 손에 익은 각종 보물을 잃은 상태라 모험을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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