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5화. 촉룡도(燭龍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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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섬이 뇌전 빛에 매몰되었다.
이번에는 미리 방비를 하고 있어 물속에 처박히는 것은 피했지만 한립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손바닥을 펼친 그는 허공에 구불구불 가느다란 실처럼 떠다니는 선령력들과 미세한 입자로 흩어진 중수를 불러 모았다. 정련하기 쉽지 않은 중수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 * *
3일 뒤 이른 아침, 한립은 암초 섬에서 솟구쳐 고공에 떠올랐다. 바닷바람에 의복을 휘날리는 그는 약간 피로해보였지만 눈빛만은 태양처럼 빛났다.
그의 손에는 흐릿하게 은백색 무늬가 있는 주먹 크기의 검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모양이나 무늬가 뇌전 문양과 흡사했다.
며칠 동안 수많은 착오를 겪어가며 중수뇌주를 모방해 만든 중수뇌전구슬이었다.
중수뇌주보다 약간 큰 구슬은 검은 기운이 드리워있지 않고 은색 뇌전 문양이 더해져 중수문뢰(重水紋雷)로 이름 지었다.
법칙의 힘을 이용하지 못해 응집한 중수가 충분히 정순하지 않아 구슬의 크기가 비교적 컸고 뇌전 봉인도 약한 편이었다. 하지만 첫걸음 치고는 괜찮은 시작이었다.
뇌전을 너무 적게 주입하면 위력이 떨어지고 많이 주입하면 폭발이 일어나, 적당한 중수와 뇌전의 배합을 찾느라 한동안 고생을 했었다.
고생 끝에 비교적 만족스러운 구슬 하나를 만들어냈으니 위력을 시험해볼 차례였다. 구슬에 선령력 한 줄기를 불어넣은 한립은 그것을 전방의 해수면 위로 던졌다.
쾅!
4, 5백장을 날아가던 중수문뢰의 은색 문양이 빛을 발하고 폭음이 들렸다. 이어서 광포한 은색 뇌전들이 주변 백여 장을 뒤덮었다.
진작 멀리 피해있던 한립은 폭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전에 중수뇌주가 폭발할 때와 비슷하게 해수면 위로 커다란 검은 태양이 떠올랐고 그 안에서 은빛이 반짝였다.
다른 점은 이전 태양과 달리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한 법칙파동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태양의 폭발로 바닷물이 증발하고 묵직한 압력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고, 밀려나간 바닷물이 하늘 높이 치솟아 거대한 파도로 변했다.
꽤 심하게 물결이 쳐도 이전보다는 얌전한 모습이었다.
구슬이 폭파한 곳으로 돌아온 한립은 주변의 변화를 관찰하며 열손가락을 튕겨 가느다란 선령력 실들을 흘려보냈다.
스스슷.
맨 눈으로는 골라내기 힘든 검은 먼지들이 선령력에 이끌려 그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한참 후, 주먹 크기로 뭉쳐진 두 덩이의 검은 액체는 뇌전구슬이 함유하고 있던 중수였다.
“법칙의 힘이 개입하지 않으면 역시 안 되겠어. 위력이 중수뇌주의 10분의 1도 되지 않으니…….”
말은 이렇게 해도 내심 중수문뢰의 효과에 흡족해 하고 있었다. 중수뇌주의 은밀함은 그대로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동하기 직전까지는 전혀 눈에 띠지 않았고 폭발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놀라운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폭발 후에 중수 먼지를 모으면 대부분은 다시 활용할 수 있었다.
가장 관건은 중수뇌주는 쓰면 끝이지만 중수문뢰는 시간만 주어지면 수십 개, 심지어 수 백 개도 제련할 수 있었다.
한립은 갑자기 푸른 가면을 불러내 썼고, 눈앞에 푸른빛이 흘러나와 허공에 푸른빛의 진법 원반을 만들어냈다.
이어서 그 안에서 파동이 일어 푸른 대머리 독수리 가면을 쓴 넉넉한 장포를 입은 사람의 허상이 떠올랐다.
“제가 발표한 임무 때문에 연락을 취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관련된 소식이 있어서요.”
허상은 아주 가느다란 고음으로 말해 사내인지 여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정도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수사가 찾는 도단의 약방이나 시간법칙과 관련된 공법이 어디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이어야지요.”
한립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허상이 작게 웃음 지었다.
“분명히 적어 놓았지만 확실한 정보가 아니면 보수는 드릴 수 없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소문을 전할 생각이시라면 그만 두시지요.”
“하하, 그건 제 이야기를 듣고 수사가 결정하시지요?”
허상의 말에 한립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류궁(蒼流宮), 촉룡도(燭龍道), 복릉종(伏凌宗)에 대해서는 들어보셨나 모르겠습니다.”
“창류궁은 북한선역의 유명한 수선종문(修仙宗門)이라 들었고, 나머지 두 종파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다 북한선역에 있는 세력들입니다. 제가 알기로 수사가 관심을 보이는 시간법칙에 관한 공법을 전승하는 종문들이고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한립은 흥미가 일었지만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세 종문 중 창류궁이 가장 세력이 크고, 복릉종이 가장 은밀하며 촉룡도가 가장 오래 되었지요. 세 곳은 삼대 지존법칙 중 하나인 시간법칙을 백만 년 넘게 연구해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복릉종의 비전(祕典)인 환진보전(幻辰寶典)을 높은 경지까지 익히면 시간법칙을 깨달을 가능성이 커진다고 하고, 창류궁에서 전승되는 수연사시결(水衍四時訣)이란 공법은 시간법칙과 연관이 있다고 하지요. 촉룡도도……. 비슷한 공법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이름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공법이 더 뛰어난지도 아십니까?”
“다 각 종문의 기밀에 속하는 공법이라 그건 저도 모릅니다.”
“세 종문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시겠지요?”
“창류궁은 선역 남방의 상아대륙(上阿大陸), 점창산맥(点蒼山脈)에, 복릉종은 선북 북방의 소천유경(小天幽境)에, 그리고 촉룡도는 선역 동방의 고운대륙(古雲大陸) 종명산맥(鐘鳴山脈)에 위치해있습니다.”
“어찌 하면 촉룡도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흑풍해역은 북한선역 서남쪽의 변방이었다. 그렇다면 촉룡도나 창류궁이 비교적 가깝다는 이야기였다.
거기다 본명팔령항이 우선순위를 두어야할 청죽봉운검과 해 도인이 동쪽에 있다고 했으니 촉룡도가 가장 적합한 후보였다.
허상은 바로 답하지 않고 유유히 물었다.
“제가 제공한 정보가 보수를 받을 만 하다고 보십니까?”
“이게 전부라면 저도 시간을 좀 들이면 얻을 수 있는 정보라 생각됩니다.”
“허허, 제 이야기를 듣지 않고 촉룡도로 간다면 기껏해야 외문객경이나 될 겁니다. 그들의 비밀경전을 열람하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하겠지요.”
한립의 냉정한 대답에도 허상은 담담히 말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촉룡도는 공법과 경전을 엄격하게 관리해서 내문제자와 장로들에게만 공개합니다. 종문 내의 내문장로의 추천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지위지요. 진선경의 수행을 지니고 있어도 추천이 없으면 외문객경으로 오랜 시간 시험을 거쳐야 내문으로 진입할 자격을 얻을 수 있거든요.”
“그럼 수사께서 추천해줄 내문장로를 찾아줄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건 못해드립니다. 다만, 공교롭게도 수사가 어찌하면 촉룡도 장로의 내문 신물을 얻을 수 있는지는 알고 있지요. 신물만 있으면 바로 촉룡도 내문에 들 수 있을 겁니다.”
“알고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그 정보면 보수를 내어드리겠습니다.”
한립은 이제야 빙긋 웃으며 보수를 약속했다.
“예전에 맹에서 받은 임무 중에 하나가 촉룡도 내문 장로 중 한 명의 후예들을 위해 곤란한 일을 해결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임무의 보수가 바로 해당 내문 장로의 신물이고요. 그 임무를 수사에게 넘겨드리지요.”
“보수가 상당한 만큼 쉽지 않겠습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임무에 적혀 있지 않아 모르고, 진선경 수행을 지닌 수사만 완수할 수 있다고 표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세한 사정이야 촉룡도 장로의 가문을 찾아가 후인을 만나보면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간제한이 있는 임무입니까?”
“아니요. 임무를 받은 사람에게는 옥간이 하나씩 주어지는데 그게 스스로 부서지지 않으면 임무가 아직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그 임무를 이어받지요. 옥간 등 관련 물건도 함께 전송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한립은 잠시 고민하다 임무를 받기로 결정했다.
쉭!
말을 마친 그는 물빛 저물대를 푸른 진법원반 가운데로 날려 보냈다. 동시에 하얀 옥간이 진법원반에서 서서히 떠올라 그에게 날아왔다.
옥간의 내용은 상대가 말한 것처럼 간략했고 지도 한 장만 담겨 있었다. 그 지도의 글자를 보니 고운대륙 지도였는데, 사실상 고운대륙 종명산 인근 말고는 대부분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추적지도입니다. 고운대륙 종명산 인근에 도착하시면 목표지점까지의 최단경로가 표시될 겁니다.”
한립이 보낸 저물대를 확인한 허상이 지도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그랬군요. 고맙습니다.”
허상은 한립에게 공수한 뒤 흐릿하게 사라졌다. 푸른빛 진법원반을 거둔 한립도 가면을 벗고 흑풍도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며칠 후.
백년에 한 번 열리는 대경매회의 열기가 식지 않아 흑풍도는 아직도 인파로 북적였다. 상점들은 이 기회에 손님들을 끌어 모으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차와 사람들이 오가는 널찍한 대로에 평범하게 생긴 청포 청년과 까무잡잡한 소년이 거닐고 있었다.
바로 한립과 모설이었다.
“류 선배님, 보통 분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천성탑의 전송 자격을 손에 넣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소년이 헤벌쭉 웃자 하얀 치아가 반짝였다. 이에 한립은 그저 조용히 미소만 머금었다.
“나중에라도 흑풍도를 떠나 바깥세상을 돌아보고 싶지 않느냐?”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문득 이렇게 물었다.
“바깥세상을요? 흑풍도도 흑풍해역 전체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인 걸요. 저 같은 산수는 다른 지역에 가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어리둥절해 하던 모설은 자조적으로 답했다.
“하하, 세상천지가 얼마나 넓은데 어찌 흑풍해역에만 매여있을 수 있겠느냐. 게다가 넌 자질도 있고.”
“저 정도 자질이 선배님의 눈에 들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앞으로도 선배님 같은 좋은 손님을 만나 영석을 좀 모으면 조금이라도 더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한립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년에게서 예전의 자신을 보았다. 소년보다 자질이 한참 떨어지던 그도 우연히 신비한 병을 얻어 지금의 수행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는 씩 웃음 지으며 별말 없이 모설의 안내를 받아 천성탑으로 걸어갔다.
* * *
반 시진 후, 대로의 끝에 이른 그들 앞에 드넓은 백석 광장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광장을 가로질러 그 한가운데 위치한 원형 석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산만한 높이의 새하얀 석탑 외벽에는 깊이가 고르지 않은 선들이 분포해 특수한 진법문양을 이루고 있었다.
“저곳이 바로 천성탑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선배님을 배웅해야겠습니다.”
모설은 한립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이고는 아쉬운 얼굴을 했다. 바로 그때 마음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모설,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기지 말거라. 저물대에 든 영석과 공법은 이별 선물이니 열심히 수련에 임하면 두각을 나타낼 날이 올 것이다.”
멍하니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설은 자신의 허리춤에 낯선 저물대가 걸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류 선배님!’
소년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원탑 인근에서 키 큰 푸른 인영을 발견하고 울컥 눈물을 쏟았다.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허리를 숙인 소년은 오래도록 일어날 줄 몰랐다.
그러나 한립은 소년은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원탑으로 다가갔는데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웅!
의아해하고 있을 때 기이한 영력 파동이 일어 그의 소매 속 물건을 발동시켰다.
팟!
도주 육균이 내준 검은 영패가 유유히 떠올라 탑으로 스며들어 사라졌고, 공간파동에 휩싸인 한립도 종적을 감추더니 어느 순간 이미 탑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원탑 내부가 뒤집어진 찻잔처럼 생긴 것을 발견했다. 벽에는 깨알 같은 주술문자와 문양들이 새겨져 있고 품질 좋은 영석들이 잔뜩 박혀 있었다.
바닥에 새겨진 원형 문양들에서는 미약하지만 공간파동이 느껴졌다. 그 문양진법 밖에 벌써 3, 40명이 모여 있었다.
인족도 있었고 다른 이종족도 있었는데 다들 수행이 약하지 않아 보였다. 모인 사람들을 살피던 한립은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에게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절색의 미모를 지닌 여인이 딱 붙는 붉은 치마를 입고 있어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정교하기까지 한 이목구비는 눈꼬리가 살짝 길게 빠져 냉담한 느낌을 주었지만 그게 또 요염하기 짝이 없는 불같은 신체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주변에서 몰래 힐끔거리는 자들의 눈빛에는 희롱하는 기색이 다분했는데 함부로 무례하게 구는 이는 없었다. 한립 역시 잠시 시선을 빼앗겼지만 수행을 파악할 수 없자 경계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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