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4화. 중수뇌주를 연구하다
*
방 안에는 정좌를 한 흑의 노인이 기다란 옥함을 들고 한립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사께서도 앉으시지요.”
노인은 얼굴에 미소를 띠우고 공수했다. 맞은편에 앉은 한립은 말없이 손을 뻗어 극품영석 한 무더기를 낮은 탁자 위에 꺼내 두었다.
딱 500개였다.
“허허, 일처리가 명쾌하신 분입니다!”
흑의 노인도 미소 지으며 탁자에 옥함 세 개를 올려두었다. 일일이 옥함을 열어본 한립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거래를 마친 그가 몸을 일으켜 나가려는데 흑의 노인이 따라 일어나 그를 불렀다.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다른 분의 부탁을 받아 여쭙고 싶은 게 있어 그럽니다. 혹시 거래할 탄혼화가 더 있으신지요? 이만 년 이상만 되었으면 본회에서 고가에 매입하고자 합니다.”
“허! 탄혼화가 더 있었으면 다른 경매품을 낙찰하는데 썼을 겁니다. 지니고 있던 한 송이도 인연이 닿아 겨우 구한 것인데 무슨 다른 탄혼화가 더 있겠습니까.”
흑의 노인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걸음을 옮기려던 한립은 갑자기 돌아서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수사에게 물어 볼 것이 있습니다. 이 중수뇌주는 누가 제련한 것입니까?”
“음……. 저희도 우연히 구한 물건이라 누가 제련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흑풍해역 밖의 고인이라더군요.”
그 말에 한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방을 나와 경매회장의 좌석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시선들이 그를 훑었지만 불편해 하는 기색은 없었다.
“다음 보물은 진선 후기 짐승인 열천후(裂天犼)의 쌍뿔입니다. 완벽하게 보존이 되어서 영성이 전혀 유실되지 않은 물건이지요. 최저 극품영석 600개, 가격은 10개 단위로 올리실 수 있습니다.”
온화가 손을 저어 보랏빛이 흐르는 쌍뿔을 불러내자 무대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곧바로 수사들이 열띤 경쟁에 돌입했다.
한립은 더는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느긋이 구경을 했다.
한 시진이 훌쩍 지났을 때, 온화가 어딘가 모르게 들뜬 얼굴로 무언가를 꺼내 놓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본경매회의 압권이라 평가될 경매품 차례입니다.”
부적 여러 장으로 꼼꼼하게 봉인된 적홍색 목함에서 불꽃 형태의 천지영기의 파동이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도 그것이 무엇일지 무척 궁금했다.
몇몇 수사들은 의식으로 내부를 살피려다 목함에 붙은 부적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온화는 그러든 말든 웃는 낯으로 중얼중얼 주문을 외며 법결을 던져 넣었다.
부적이 한 장 한 장 떨어지다 마지막 부적까지 제거되었을 때, 목함이 단번에 열렸다. 안에는 적홍색의 동그란 단약이 하나 들어있었다.
손톱 크기의 단약에서 실낱같은 화염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주위로 퍼졌는데, 수많은 법칙 주술문자가 뭉쳐서 형성된 듯한 겉면의 무늬가 눈길을 끌었다.
끊임없는 탄성에 회장 내부가 끓는 솥처럼 시끄러워졌다.
“다들 제대로 보셨습니다. 바로 단약의 왕으로 불리는 도단(道丹)입니다!”
소개를 하는 온화도 신이 나있었다. 지단사로서 그가 도단에 품은 열망과 동경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길게 설명 드리지 않아도 도단의 가치는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불 속성 공법을 수련하시는 분들은 이 일품(一品) 불 속성 도단으로 단번에 불의 법칙을 장악할 수도 있을 겁니다! 최저가 극품영석 2천 개로 시작해서 가격을 백 개씩 올리실 수 있습니다!”
온화의 낭랑한 목소리가 회장 안의 수사들을 유혹했다.
한립은 극품영석 이천 개란 소리에 입 꼬리를 실룩였다. 최저가부터 이렇게 높으면 낙찰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지닌 보물과 극품영석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온화의 경매 시작 선포에 대다수 수사들이 입은 닿고 눈을 크게 떴다.
귀한 도단을 도대체 누가 가져가는지 보겠다는 분위기였다.
“2,000개!”
짧은 침묵을 깨고 3층 독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이곳에는 흑풍해역에 난다 긴다 하는 거대 세력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보유한 밑천은 대단했고 도단이 경매품으로 등장한 이상 부르는 게 값이었다.
“2,300!”
“2,500!”
3층 독실에 위치한 이들만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일고여덟 명이 각축전을 벌여 일품 도단의 가격은 벌써 극품영석 3,000개에 도달했다.
“4,000!”
웅웅거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고, 경매회장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립은 이 특이한 목소리가 봉혈염옥정을 낙찰 받은 수사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4,200개!”
곧 또 다른 3층 독실에서 가격을 불렀다. 그런데 여인의 목소리가 평온하게,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을 제시했다.
“5,000.”
아무도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이가 없었다.
회장의 거의 모든 이들이 목소리가 들려온 독실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거액을 내고 도단을 사가는 것인지 궁금한 게 당연했다.
“극품영석 5,000개”
“더 없으십니까? 고민하고 있는 분이 계시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도단을 보게 될지 모르니까요!”
“낙찰! 축하드립니다!”
홀로 소리치던 온화가 낙찰을 결정지었다.
도단이 정체 모를 신비한 수사에게 넘어가면서 백년에 한 번 열리는 흑풍해역 대경매회도 끝을 맺었다.
온화는 몇 마디 인사를 하고는 경매회 종료를 알렸다.
한립은 인파에 섞여 천천히 궁전을 나서면서 다른 수사들이 흥미진진하게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본 각종 신기한 물건들과 특히 말로만 듣던 일품 도단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입에 침이 마르게 떠들고 있었다.
임시 거처로 돌아온 그는 바로 모든 금제를 발동하고 밀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손에 중수뇌주 세 알을 꺼내 놓았다.
엄지와 검지로 한 알을 집어 올린 한립은 코앞에서 뇌주를 관찰했다.
검은 안개가 드리운 구슬은 특수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경매회장에서 다른 수사들이 보인 반응에 따르면 그의 예상을 넘어서는 위력을 지닌 게 분명했다.
물론 거금을 주고 뇌주를 구입한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이것을 통해 중수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중수를 조종할 수는 있지만 활용법을 몰라 위력이 평범한 영보보다도 못했다. 구슬을 손바닥에 올린 그는 열손가락으로 표면을 더듬어 무늬를 느껴보았다.
한참 후 천천히 손을 편 그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어렸다.
중수뇌주는 지기화신이 정련한 중수와 재질은 같았는데 만져보니 머리카락보다 가는 굴곡이 이상한 문양을 이루고 있었다.
견문이 넓은 그도 전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문양이었다. 침음하던 그가 미간에서 수정 실 한 가닥을 뿜어 검은 안개 속, 구슬 내부로 침투시켰다.
구슬 안은 그 자체로 천지(天地)를 이룬 듯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희미하게 검은 별빛이 박혀 있고, 푸른색과 보라색 뇌전빛이 수시로 반짝거렸다.
동시에 그 안을 맴도는 옅은 법칙의 힘도 느껴졌다.
세 종류의 힘이 부드럽게 모여 조화롭게 공존하면서 서로 연계가 되어 있었는데 역설적으로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들었다.
구슬을 들고 반 시진을 만지작거린 한립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중수뇌주를 넣어두고는 동부를 나와 어디론가 날아갔다.
* * *
흑풍도에서 수만리 떨어진 아무도 살지 않는 해역에 광풍이 일고 격랑이 쳤다. 조금 전 고공에 도착한 한립은 의식을 방출해 주변 만 리를 살폈다.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중수뇌주 한 개를 꺼내 선령력 한 줄기를 불어넣었다.
구슬에 푸른빛이 어리고 복잡한 무늬가 희미하게 반짝이다 어둑해졌다. 다시 힘껏 투척하자 검은 구슬은 아무런 기운의 파동 없이 수천 장을 날아갔다.
쿠르르릉!
멀리서 굉음이 울렸다.
중수뇌주의 폭발로 거산 크기의 검은 태양이 떠올라 수백 줄기의 거대 청자색 뇌전을 발산했다. 치직거리는 뇌전이 사방팔방을 내리쳐 섬뜩한 법칙의 힘을 드러냈다.
뇌전이 닿는 곳마다 공간이 덜덜 떨리고 왜곡되다 갈라졌다.
검은 태양 때문에 아래쪽 해역에 깊은 구멍이 뚫리고 그 안에 있던 물고기와 바다 요수들은 가루가 되었다.
다음으로 검은 태양이 2차 폭발을 일으켜 검은 안개가 사방을 덮쳤다.
진극막으로 피부를 가린 한립은 남색 빛이 반짝이는 두 눈으로 중수뇌주 폭발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검은 안개가 삽시간에 들이닥쳐 피하려 했지만, 얼마 물러나지 못해 따라잡고 말았다.
피피피피핑!
장대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검은 안개 속 머리카락 굵기의 검은 바늘들이 그의 진극막을 찔러왔다.
미친 듯이 번쩍거리던 진극막은 안정을 되찾은 후 표면에는 하얀 점들이 남아 있었다. 다행이라 생각한 한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극막이 굳세지 않았으면 그의 몸은 검은 바늘에 구멍투성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중수를 응결해 만든 검은 뚫고 들어가는 힘이 강해서 단단한 그의 육체라도 불시에 공격당하면 막기 어려웠다.
심하게 요동친 바다도 움푹 들어가 반경 천장의 거대한 구덩이가 발생했다. 의식을 빠르게 퍼트린 한립은 깜짝 놀랐다.
중수뇌주가 폭발한 곳을 중심으로 십여 리 내의 모든 생물들이 중수 바늘에 뚫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폭발의 여파만으로도 이렇게 치명적인 위력을 낸다면 검은 태양이 직접 닿으면 그라도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대경매회에서 많은 이들이 중수뇌주를 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자 폭발로 인한 여파는 점차 가라앉았다.
그는 법칙의 힘이 사라진 것을 감지하고는 중수뇌주 폭발 중심부로 날아갔다.
공기 중에는 아직 타는 냄새가 남아있었는데 아래쪽 바다의 깊은 구덩이는 바닷물이 흘러들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극품영석 수백 개에 달하는 중수뇌주 한 알을 이렇게 써버린 것을 회장의 다른 수사들이 보았으면 놀라 눈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이건 분명 법칙의 힘이야. 뇌전의 힘을 강제로 중수 속에 봉인해서 선령력으로 촉발하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는 혼잣말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중수뇌주를 써 본 결과, 단순히 뇌전의 힘과 법칙의 힘을 가둬둔 것치고는 위력이 너무 강력했다.
‘아!’
눈을 감은 그는 폭발 장면을 여러 번 회상하다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중수뇌주를 발동한 순간, 겉면에 금제가 활성화 되어 뇌전으로 하여금 중수를 공격해 법칙의 힘을 머금은 미세한 먼지로 만들었다.
이 중수 미세먼지가 공격범위 전역을 쉼 없이 강타하는 것이었다.
공격 범위에 있는 물체는 중수, 뇌전 그리고 법칙의 힘에 동시에 공격받아 달아날 수 없는 압력에 눌려 진선도 감당하기 어려운 공격을 연달아 받게 되었다.
원리를 파악한 한립은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신념의 힘이 체내의 법력을 오염시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지기화신 체내의 법칙의 힘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이 방법으로 중수뇌주를 제련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관찰을 통해 중수를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감각이 생겨 수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한립은 고공으로 날아올라 작은 암초로 향했다.
팟.
암초 섬에 내려선 그는 중수가 가득 찬 진수대를 불러냈다.
지난 3년 동안 신비한 영액으로 탄혼화를 숙성시키는 한편 수정 알갱이 제련도 틈틈이 계속해서 지기화신이 빠르게 중수를 정련할 수 있게 도왔다.
그렇게 모은 중수가 이제는 작은 개울 절반을 채울 정도는 되었다.
그의 손짓에 수박 크기의 중수가 선령력에 싸여 진수대에서 빠져나왔다. 쉬지 않고 흐르는 검은 물결은 거대한 산봉우리와 비슷한 중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대로 눈을 감은 한립은 머릿속에서 계획을 점검한 다음 한 팔을 뻗었다.
콰릉!
손가락을 굽혀 허공을 쥐자 은색 뇌전이 손바닥에서 튀어나와 그물을 이루고 손을 둘러쌌다. 은색 뇌전 그물은 살아 있는 것 마냥 중수를 향해 퍼져나갔다.
중수 덩어리가 자극을 받은 듯 부들부들 떨어 한립은 선령력으로 검은 물결을 더 힘차게 뭉쳐야 했다. 대량의 선령력이 유입된 중수 덩어리는 안정을 찾아갔지만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걸 본 한립은 중수 덩어리 속으로 뇌전의 힘도 불어넣었다. 뇌전 빛들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중수 덩어리에 미세한 틈을 만들어 안으로 들어갔다.
다량의 뇌전 빛이 들어가자 중수는 서서히 수축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한립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가려는데, 느닷없이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중수 덩어리와 뇌전이 동시에 터져 강렬한 기류로 그를 한방에 날려버린 것이다.
첨벙!
물에 빠진 그가 다시 암초 위로 올라왔을 때는 암초 절반이 파괴되어 바닷물이 들어차 있었다.
한립은 의복을 정돈하고 진수대를 꺼내 또 다른 중수 덩어리를 꺼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