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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27화 (1,284/2,000)
  • 1527화. 연단 시합

    *

    한립이 잠깐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문 앞이 밝아지고 안에서 노 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안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그 소리에 한립도 성큼 구멍 속으로 발을 디뎠다. 안으로 들어서자 몸이 후끈해지고 여러 재료의 짙은 약향이 물씬 풍겼다.

    대청은 넓은 갱도들이 사방에 뚫려 있었고, 갱도 양쪽 벽에 드리운 청동문 안에서 불빛이 번들거렸다.

    한립이 구경을 마치기 전에 노 관사가 그를 데리고 갱도 중 한 곳을 통해 접객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짧은 소매의 흑자색 웃옷을 걸친 평범한 체구의 적발 노인이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는 중후한 기운을 지닌 대승기 수사였다.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적발 노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선배님, 이쪽은 천약재의 주 대사입니다. 인계 갑 등급 연단대사인데 이번에 선배님의 실력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고맙네, 주 대사.”

    한립은 노인을 향해 예를 취했다. 상대의 수행이 자신보다 낮지 않음을 알고 있던 적발 노인이 마주 예를 올렸다.

    “연단 실력을 검증하고 싶으시다니 저와 법력 회복용 화양단(華陽丹)을 세 알씩 제련하는 것으로 하시지요. 완성된 단약의 품질로 수준을 평가하는 겁니다.”

    “화양단?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는데 약방을 이곳에서 구입할 수 있겠나?”

    “예?”

    한립의 말에 적발 노인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럴 것 없습니다. 화양단이 인계 단약 중에서는 중급이지만 그 약방문은 널리 퍼져 있어 구하기가 쉽습니다. 얼마 하지도 않으니 제가 그냥 알려드리지요.”

    적발 노인은 하얀 옥간을 건네주었다. 옥간을 받아 의식을 불어 넣은 한립은 내심 탄식했다. 약방문은 얼마 안 해도 단약 제련에 필요한 재료들은 하나 같이 비쌌다.

    그가 모든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으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적발 노인은 그다지 무표정한 얼굴로 화양단 제련에 주의할 점을 알려주었다.

    한립은 그의 당부를 들으며 모든 주의 사항을 묵묵히 암기했다.

    반 각 후, 노 관사에게 재료가 들어있는 저물대를 받아 든 두 사람은 각자의 연단실로 들어갔다.

    철컹!

    청동문이 굳게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연단실은 영계에서 보아왔던 것과 조금 달랐다.

    커다란 보라색 구리 연단로에는 불을 피울 곳도 보이지 않았고, 불을 일으키는 주술문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대신 벽과 지면에 새겨진 복잡한 주술문자가 영기를 가두는 금제를 이루고 있었다.

    휙!

    그는 마음을 다잡고 손끝에서 은백색 화염을 뿜어 연단로 속으로 날려 보냈다.

    화륵!

    불길이 일자 한립은 적정 온도가 되기를 기다려 정해진 순서대로 재료를 넣기 시작했다. 영약들이 하나씩 들어갈 때마다 연단실 내부에 뿌옇게 수증기가 일었다.

    * * *

    대략 한 시진 후.

    연단로 안에서 펑! 하는 가벼운 폭음이 들리고 위쪽에 뚫린 틈으로 보라색 연기가 피어올라 뭉쳐졌다.

    적발 노인이 말하길 이때 화운초를 넣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한립은 하얀 영초를 손에 쥐고 왠지 모르게 망설였다.

    인계에서 영계에 이르기까지 그가 제련해온 단약의 수는 대단히 많았다. 약을 쓸 때는 원칙적으로 주재료를 임금으로 삼고 보조 재료를 신하로 두어 조화를 이루어야만 했다.

    화운초는 선계 특유의 영초가 아니라 영계에서도 사용해 보았는데 약효가 평범한 편이라 보통 약성을 중화하거나, 여러 재료들이 조화롭게 섞이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막 끓어오르기 시작한 연단로 안의 재료들은 이제 막 각각의 약성을 발산하고 있어 바로 섞어버리면 오히려 단약의 품질을 떨어트릴 수도 있었다.

    고민하던 그는 자신의 판단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연단로가 내뿜는 보라색 연기가 흐릿해질 무렵에야 뚜껑을 열고 화운초를 집어넣었다.

    곧 확연히 짙어진 약 향기를 맡곤 한립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때 연단실 벽의 주술문자들이 빛을 발하고 스스로 금제를 발동하고는, 실내에 작은 소용돌이가 생겨 단약에서 흩어지는 영력을 모아 연단로 속으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 * *

    두 시진 후, 이미 연단실을 빠져나온 적발 노인이 노 관사와 같이 한립이 있는 연단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각이 지났을 때 청동문이 서서히 열리고 한립이 하얀 자기 병을 든 채 걸어 나왔다.

    “선배님께서도 제련에 성공하셨나 봅니다. 축하드립니다.”

    노 관사가 웃으며 맞이했다.

    “품질이 어떤지는 노 관사와 주 대사가 봐줘야 알 수 있겠지.”

    한립은 자기로 된 병을 노인에게 넘겼다. 노 관사가 자기 병을 열자 농염한 약 향이 확 퍼졌다.

    그 냄새에 적발 노인도 안색이 변해 한립이 제련한 단약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때 관사는 양손에 두 사람이 제련한 화양단 세 알씩을 들고 있었다.

    모양은 똑같았지만 한립의 단약이 조금 더 작아 보였다. 한립이 적발 노인에게 무언가 물어보려는데 노인은 뜻밖에도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가버렸다.

    노 관사는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고 주 대사의 뒷모습이 갱도 끝으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묘한 눈빛으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충격을 받아 저러는 듯하니, 너무 예의 없다 나무라지는 말아주십시오.”

    한립은 상대의 말뜻을 알아듣고 웃으며 손을 저었다.

    “관사가 평가해주게.”

    “정말 이전에 선계의 고급 단약을 제련해 보신 적이 없으시다면, 선배님께서는 연단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신 것이 분명합니다. 불 조절이 아주 뛰어나 불순물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요. 주 대사의 단약과 비교해도 확실히 품질이 뛰어납니다.”

    노 관사는 연단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단약을 보는 눈은 정확했다.

    “그렇다면 선계 연단사 중 어느 정도 수준이겠는가?”

    “화양단의 품질로 보아 이미 갑 등급 인단사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신중한 노 관사의 답에 한립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가진 바 실력을 전부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인계 중급 단약인 화양단 제련의 난이도를 보면 그가 자신만만해하던 실력도 기껏해야 병(丙) 등급 지단사 수준에 불과할 듯싶었다.

    “선배님의 실력이면 지계연단사가 되는 것도 머지않은 듯 보입니다.”

    노 관사는 한립이 그다지 기뻐하지 않자 아첨하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하, 노 관사의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군.”

    한립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반드시 천단사가 되어 적합한 도단의 약방을 구해 작은 병으로 만들어낸 수정 알갱이를 재료로 도단을 제련할 생각이었다.

    남들은 평생 가도 보지 못할 법칙의 재료가 충분하니 노력해볼 만했다.

    “저, 흑풍성에는 얼마나 머물 생각이신지요?”

    주저하던 노 관사가 이렇게 묻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려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 다른 뜻이 있어 여쭌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그저 저희 천약재의 외부 공봉 연단사로 와주실 수 있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선배님의 연단 실력이면 곧 학 대사 다음 가는 실력자가…….”

    “오래 머물 생각은 없네. 호의만 받아두지.”

    손을 저어 노 관사의 해명을 끊은 한립은 짧게 답했다. 노 관사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본인이 싫다니 어쩔 수 없었다.

    한립은 망원단 약간을 구입해 화양단 제련 비용과 함께 값을 치르고 훌쩍 떠났다. 물론 그가 값을 치러 만든 여섯 알의 화양단도 함께였다.

    천약재를 나선 그는 바로 임시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규모가 큰 상점을 위주로 구경을 하고 다녔다.

    단약을 사느라 모아 두었던 영석도 바닥났고, 앞으로도 돈 나갈 곳이 많아 불필요한 재료와 법보를 처분해 극품영석으로 바꿔둘 셈이었다.

    사람들을 따라 큰길을 걷다보니 길목 전체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건축된 누각이 눈에 들어왔다.

    새빨간 진흙과 붉은 벽돌을 이용해 지은 3층 누각은 금칠을 한 기둥에 유리로 만들어진 기와지붕까지 돈 냄새가 풀풀 풍기는 곳이었다.

    대문 위에는 우보재(尤寶齋)라 적힌 대형 편액이 걸려 있었다.

    “우보재라…….”

    상점의 이름을 소리 내 읽은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계단을 올라 1층 대청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적지 않아 홍목(紅木) 진열대마다 세네 명이 둘러서서 다양한 법보와 기물들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푸른색 시종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서서 설명을 해주거나 진열대에서 물건을 꺼내 보여주었다.

    쓱 둘러보니 진열대에 놓인 물건들은 화신기 수사 이하가 쓸 만한 중등품 밖에는 없었다.

    이때 시종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곁의 손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웃으며 다가왔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소인이 안내를 해드릴까요?”

    “물건을 사러 온 것이 아니라 팔러 왔다.”

    “그러시군요. 그럼 저를 따라가시지요. 저희 관련 업무는 해 대사와 호 대사님께서 전담을 하셔서요.”

    한립은 시종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목재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은 1층과 달리 상점이 아니라 고급 객잔이나 다실처럼 독립된 방들이 있었다.

    “해 대사님, 호 대사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시종이 낭랑하게 외치는 소리에 달칵 방문이 열렸다. 안에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고개를 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서는 한립의 수행이 남다른 것을 보고 서둘러 일어나 인사를 했다. 유생 복장의 청포 중년인은 시종을 돌려보내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해무량이라 하고 이쪽은 동료인 호대유라 합니다. 수사는 어찌 불러드리면 되겠습니까?”

    짧은 수염 노인은 아직 끝나지 않은 바둑에 신경이 쓰이는지 연신 바둑판을 힐끔거리다 고개만 까딱 숙였다.

    “저는 류석이라 합니다.”

    “이곳에서는 그나마 저희 둘이 보는 눈이 있어 물품 감별과 구입을 맡고 있습니다. 이곳으로 올라오신 걸 보면 팔고 싶은 물건이 있으시겠지요?”

    중년 유생이 온화하게 웃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수령종(水靈鐘)을 갖고 왔으니 가격을 매겨주시지요.”

    한립은 마주 웃음 지으며 손바닥 위로 작은 남색 종을 불러냈다.

    반짝이는 종 표면에 오밀조밀 주술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몇 줄기의 광채가 용처럼 그 위를 떠다녔다.

    해무량은 물건을 보자마자 눈을 빛냈고 짧은 수염 노인도 드디어 바둑판에서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수령종을 받아 꼼꼼히 살피고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입을 열었다.

    “대승기 이상의 수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법보지만 공격도 수비도 할 수 없고 일정 구역의 영기를 묶어두는 기능밖에 없는 물건이군요.”

    한구를 죽이고 그의 저물대에서 찾은 수령종은 짧은 수염 노인의 말대로 기능이 너무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처음 팔아버릴 물건을 떠올렸을 때 수령종이 떠올랐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물 속성 공법을 수련하거나 물 속성 영물을 가둬두려는 수사에게는 이보다 좋은 물건이 없을 겁니다. 합리적인 가격을 책정해 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흠……. 극품영석 3개면 어떻습니까?”

    호대유가 침음하다 가격을 제시했다. 한립도 적당한 가격이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으로 강한 한기가 맴도는 하얀 구슬을 꺼내 들었다.

    구슬이 등장하자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해 해무량과 호대유가 마시고 있던 찻잔의 찻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두 사람은 눈을 반짝이며 구슬을 살폈다.

    반 시진 후 한립은 해무량와 호대유의 열의 가득한 배웅을 받으며 우보재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은 한립이 떠나기 전에 또 판매할 물건이 생기면 좋은 가격으로 구입할 테니 다시 찾아달라고 당부했다.

    한립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문밖에 서있는 그들을 보고 우보재 시종들과 구경하던 손님들이 놀란 눈빛을 보냈다.

    해무량과 호대유는 한립에게서 다섯 점의 보물과 재료 한 가지를 구입하고 아주 흡족해했다.

    사실 우보재에서 내놓은 물건은 한립이 팔아치우려는 물건의 1, 2할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저녁까지 규모가 큰 상점들을 돌다 흑풍성을 떠나 유양산으로 돌아갔다. 한립은 밀실로 들어가 금제를 모두 발동시키고 푸른 양머리 가면을 꺼내 썼다.

    파앗!

    두 손가락을 미간에 대고 낮게 주문을 읊자 가면에서 푸른빛이 새어나와 커다란 진법 원반을 만들어냈다. 원반 오른쪽을 살핀 그는 소매를 털어 여러 보물들을 그곳으로 보냈다.

    오늘 용모를 바꿔가며 극품영석과 바꾼 법보와 재료들 중에 교십육의 검은 송곳과 같은 진귀한 보물은 해당되지 않았다.

    대부분 홍월도에서 임무를 수행하며 얻은 이 보물들은 무상맹 회원의 유골에서 찾아낸 것이라 괜히 바깥에 내놓았다가는 소란에 휘말릴 수 있었다.

    그래서 전부 무상맹을 통해 거래할 참이었다. 그는 물건을 내놓고 시선을 원반 좌측으로 옮겨 손끝으로 글자를 써넣었다.

    푸른빛의 글자가 하나씩 날아 들어가고 금방 도단 약방에 관한 정보를 구한다는 임무가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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