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526화 (1,283/2,000)
  • 1526화. 도단(道丹)

    *

    성 밖을 나와서도 한동안 걷던 한립은 번득 날아올라 사라졌다. 오백 리의 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려한 산봉우리는 울창한 수풀과 산허리를 휘감은 구름 덕에 제법 풍경이 수려했다.

    산봉우리 앞에 내려선 한립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미약한 영력 파동들이 그물처럼 산봉우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곧장 산문 근처의 처마지붕이 덮인 대전으로 들어간 한립은 정면에 유양산 풍경이 금실로 수놓아진 12폭 짜리 병풍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아름다운 병풍 앞에는 커다란 자홍색 목재 탁자가 거울처럼 번들거리고, 그 우측에 짐승의 머리를 닮은 향로에서는 푸른 연기가 하늘하늘 피어올랐다.

    푸른 연기 뒤로 청삼 노인이 한 손에 고서를 들고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었다. 대전 안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자 한립은 노인에게로 걸어가 헛기침을 했다.

    이에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는데 얼굴에는 한가로운 시간을 방해받은 듯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동부를 빌리러 왔습니까?”

    “한적한 곳에 있고, 방해를 받지 않을 만한 곳이 있는가.”

    한립의 질문에 노인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습니다. 열에 아홉은 한적한 곳을 원하지요. 다들 자기가 무슨 진선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봅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립은 대승기 수사를 넘어서는 영기의 압력을 폭발적으로 내뿜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기세에 노인은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노인은 대경실색해 벌떡 일어나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제, 제가 눈이 삐었나 봅니다. 귀한 분을 알아 뵙지 못했으니, 용서를…….”

    노인의 태도에 한립은 기세를 거두고, 작은 영석 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조용한 동부를 내주고, 남는 것은 가지거라.”

    “예, 물론입지요! 망일애(望日崖) 갑(甲) 등급 동부가 한적하니 좋은데 어떠십니까?”

    영석을 받은 노인은 즐겁게 거대 병풍 어딘가를 짚으며 말했다. 산 절벽에 점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좋군. 그곳으로 하지.”

    한립의 말에 노인은 영석을 챙기고 동그란 검은색 철패를 내주었다.

    잠시 후 대전 밖.

    한립은 철패에 법력을 주입해 은은하게 금빛이 어리는 것을 확인했다. 노인의 말에 따르면 철패는 동부의 열쇠이자 유양산 금제를 드나들 수 있게 해주는 증표였다.

    철패를 몸에 지니지 않고 유양산에 날아들면 진법에 의해 제지당할 수 있었다. 태양이 서쪽으로 지기 시작하자 그는 몸을 날려 산 정상을 향해 날아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교적 널찍한 동부에 들어선 한립은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금제 외에 스스로 몇 개를 더 펼치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밀실로 들어가 앉은 그의 눈이 반짝였다. 오늘 흑풍해역 제일의 성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마광 수사.”

    그의 그림자가 왜곡되더니 그 속에서 거무튀튀한 그림자가 튀어나와 마광으로 변했다. 여전히 어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선계의 연단사 등급에 대해 아십니까?”

    “제가 알기로 선계의 연단사는 크게 인계, 지계, 천계로 나뉩니다.”

    “역시 지계연단사 보다 더 뛰어난 천계연단사도 있었군요. 제 추측이 맞다면 인단사(人丹師)는 보통 수사들을 위한 단약을 제련하고, 지단사(地丹師)는 선인들을 위한 단약을 제련할 텐데……. 천단사는 어떤 점이 특별한지 모르겠습니다.”

    “인단사와 지단사는 수사의 말씀대로입니다. 도단사(道丹師)라고도 불리는 천단사는 선계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연단사로 그 판단 기준은 단 하나이지요. 바로 도단을 제련할 수 있는가입니다.”

    “도단이요? 다른 단약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소위 도단이란 천지법칙의 힘을 함유한 단약을 이릅니다.”

    “천지법칙의 힘을 함유했다……. 설마 도단을 복용하면 바로 법칙의 힘이라도 깨우칠 수 있단 말입니까?”

    “선계에서 법칙의 힘을 장악해 진선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길고 긴 세월 각종 공법을 익혀가며 부단히 수행을 해 법칙의 힘을 깨우치는 것이고, 둘째는 천지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로 만들어진 도단을 복용해 그 법칙의 힘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마광은 무표정하게 설명했다.

    “그럼 도단만 복용하면 수만 년, 아니 수십만 년의 수련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단 뜻이 아닙니까.”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운이 좋아 도단을 복용해도 관련 법칙의 힘을 깨우칠 확률은 극히 낮거든요. 물론 실패한다고 해도 이후 관련 법칙의 힘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은 되겠지만요.”

    “법칙의 힘을 깨우치는 확률은 도단의 품질에 좌우되겠군요.”

    “그렇습니다. 도단이 법칙의 힘을 함유한 것은 맞지만 법칙의 힘을 함유한 모든 단약이 도단은 아닙니다. 단약을 제련한 후에 겉에 도문(道紋)이라는 무늬가 나타나야 도단으로 불리고, 도문이 많을수록 품질이 높은 것이라 들었습니다.”

    “도문……. 품질이 가장 높은 도단은 도문이 얼마나 되는지도 아십니까?”

    “가장 많은 경우 9개로 그걸 구품도단이라 칭하지만 거의 전설로나 전해지는 물건이지요. 일품도단만 해도 천지조화를 담은 영물로 여겨져 선계에서도 보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어쩐지 선계에서 연단사들의 지위가 높다 했습니다.”

    한립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간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수사가 영계에서 제법 실력이 있는 연단사였던 것은 압니다. 이런 질문을 할 때는 천단사에 관심이 있어서겠지요. 허나 인단사 천여 명 중 지단사 한 명이 나오기 힘들고, 십만 지단사 중 도단사 한 명이 나올까 말까입니다. 높은 등급의 도단을 제련하는 천단사는 더욱 희소하고요.”

    마광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하하, 연단이 원래 많이 경험할수록 느는 기술입니다. 법칙의 힘을 지닌 재료 자체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데, 연습해 볼 기회나 있겠습니까.”

    “그것도 문제지만, 도단의 약방문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 안 되는 제련법은 선계의 거대 세력들이 손에 쥐고 있으니까요. 선계의 천단사도 영계의 연단종사와 마찬가지로 거대 세력에 소속된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손에 꼽힙니다.”

    마광의 말에 한립도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렇지. 도단에 관해 전해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도단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 하여 같은 약방문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천단사의 수가 제한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해진 수량이 다 차면 그 뒤로는 도단의 제련법을 알아낼 수 없다더군요.”

    “그렇게 이상한 일이 있단 말입니까?”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해 보았다는 사람은 없지만 다들 믿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도단의 약방문을 얻어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요.”

    “…….”

    한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라 해도 도단의 약방문을 얻으면 함부로 남에게 보여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도단과 천단사에 대해 제가 아는 바는 여기까지입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광 수사. 그런데 한 가지 더 여쭐 일이 있습니다.”

    마광이 그림자 속으로 몸을 날리려는데 한립이 그를 말렸다.

    “무슨 일입니까?”

    “선원석에 대해서도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좋은 물건이지요! 전투 중에 쾌속으로 체내의 선령력을 보충할 수 있고 수련 속도도 높여 주어 어디에서도 쉽게 구하기 힘든 물건입니다.”

    “선인들의 화폐처럼 쓰인다던 이유가 있었군요. 선원석 1개를 제련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진성 후기 선인이 1년을 허비해서 겨우 하나를 제련해 냅니다. 진선 중기라면 10년은 걸리고 초기면 100년 이상을 잡아야 하지요.”

    “100년!”

    한립은 저절로 얼굴이 굳었다. 전송진 비용이 선원석 5개라 했다. 제련하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으면 스스로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안 될 말이었다.

    “이것도 하품 선원석이 그렇다는 겁니다. 영석처럼 선원석도 하품, 중품, 상품, 극품 네 등급으로 나뉘고 등급이 높은 선원석은 보통 고계 선인만이 제련할 수 있습니다.”

    “쉼 없이 선령력을 주입해야 하는 것 외에 다른 부작용이 있는 겁니까?”

    “선원석을 제련하는 동안은 수련을 병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강제로 시키지 않는 경우, 다들 선원석을 제련하며 시간을 허비하기를 원치 않지요. 그래서 어느 등급의 선령력이나 굉장히 구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마광의 이야기를 들은 한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거래를 통해 선원석을 구하는 것도 희망이 없어 보였다.

    마광은 그가 말이 없자 그림자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 * *

    한밤중에 둔광 하나가 유양산 정상을 번갯불처럼 지나쳐 사라지더니 수십 만 리 밖, 외진 해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이 고공으로 손을 뻗어 입술을 달싹이자 공중에 뜬 작은 병이 덜덜 떨기 시작하더니 주변의 천기원기가 불안정해졌다.

    푸른빛이 둥그런 빛의 장막을 이루고 서서히 확산되자 그 안의 해수면이 높은 파도를 출렁였다.

    칠일 밤낮이 흐르고 작은 수정 알갱이와 거의 투명하게 변한 작은 병이 서서히 내려왔다.

    미리 귀원단 한 알을 복용한 한립은 피골이 상접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초췌한 기색으로 두 보물을 거두고 비취색 옥병에서 망원단을 꺼내 입에 넣었다.

    단약은 싸한 느낌을 주며 뱃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서늘하던 기운이 따뜻한 기류로 바뀌어 사지를 돌다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뜨끈해진 단전에 천지영기가 급속도로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영기는 단전 안에서 정순한 선령력으로 바뀌어 갔다.

    노 관사가 이러쿵저러쿵 단약의 효능을 설명할 때는 별 감응이 없었는데 직접 복용해 보니 확실히 비싼 값을 했다.

    잠시 운기조식을 한 한립은 흑풍성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가 천약재로 들어서자 눈썰미가 좋은 노 관사가 한눈에 그를 알아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재빨리 미소를 띠우고 살갑게 다가왔다.

    “어서 오시지요! 선배님께서 오실 줄 알았으면 제가 마중을 나갔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곳에서 사간 단약들이 효과가 썩 괜찮더군.”

    한립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배님께서 자주 찾아주시면 저희 천약재의 복이지요. 자, 위로 모시겠습니다.”

    노 관사를 따라 올라간 5층은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시종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난번 구입하신 망원단을 가져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단약들을 보여드릴까요?”

    “급할 것 없네. 구입하기 전에 몇 가지 물을 것이 있으니까.”

    “하문하시지요.”

    “약효가 무척 빨리 돌고 효과가 좋은 것으로 보아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연단사의 실력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겠더군.”

    “바로 그렇습니다. 선배님께서도 연단에 정통하신 모양입니다.”

    “정통할 것까지는 없고, 그저 이런저런 연단술을 익히기는 했네.”

    “괜찮으시다면 어느 등급의 연단사신지 여쭈어도 될까요?”

    노 관사는 뭔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워낙 외진 곳 출신이라 다른 연단사들과 실력을 겨뤄 본 적이 없네. 천약재까지 온 김에 연단사 한 명을 청해 교류를 나누며 내 실력이 어떠한지 알아보고 싶군.”

    한립은 짐짓 부끄러워하는 척하며 운을 띄웠다.

    보일 듯 말 듯 이마의 주름이 깊어졌던 노 관사는 재빨리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걱정 말게. 모든 비용은 내가 부담할 것이네.”

    “그리 말씀하시는데 저희 천약재가 선배님의 흥을 깰 수 없지요! 자, 가시지요.”

    한립이 덧붙이자 노 관사는 거리낌 없이 답했다.

    노인은 곧장 한립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가 후원으로 통하는 좁은 복도로 들어섰다. 후원 깊은 곳에는 원형 문이 있어 내부를 살필 수 없었다.

    문 앞에 이른 한립은 허공의 투명한 빛의 장막이 공간파동을 일으키는 것을 감지했다. 전송진법 같았다.

    걸음을 멈춘 노 관사가 뒤를 돌아 말했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먼저 들어가 이야기를 해두겠습니다.”

    보라색 영패를 꺼내 허공을 비춘 노인은 허공에 나타난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