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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24화 (1,281/2,000)

1524화. 흑풍성(黑風城)

*

비슷한 시각, 한립의 지기화신과 낙풍은 한정족이 머무는 섬에 도착했다.

그들은 여러 장로들과 족장을 죽이고 섬 곳곳의 한구 조각상을 파괴한 뒤 한구의 죽음과 앞으로 한정도가 오몽도에 귀속되었음을 선포했다.

한정족 족인들은 이런 사실을 믿지 못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한구가 나타나지 않고, 조신의 비호를 상징하는 빛의 장막도 사라지자 결국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연이어 낙풍과 지기화신은 곡골부인의 족인이 머무는 섬에 가서도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굴복시켰다.

그 후로 오몽도의 새로운 조신 류석의 위명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오몽도와 사이가 좋지 않던 여러 섬의 조신들은 당황해 줄행랑을 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전에 만났던 다른 섬의 조신들도 한립과 어떻게든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자 살가운 얼굴로 찾아와 안부를 전하고 갔다.

심지어 산선 두 명이 오몽도로 들어와 외족공봉(外族供奉)을 받기를 원해 한립은 그들이 각각 한구, 곡골부인의 섬을 대신 관리하게 했다.

결국 오몽도가 인근 해역 패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한립은 처음 한구와 곡골부인을 죽일 때만 얼굴을 비추고 나머지 일은 지기화신과 낙풍에게 맡겨두었다.

* * *

몇 달 뒤, 오몽도 사합원의 밀실 안.

한립 앞에 낙풍이 진중한 얼굴로 서있었다.

“꽤 오랜 시간 폐관수련에 들어갈 생각이네. 게다가 내 화신도 수련에 바쁠 테니, 오몽도는 전적으로 자네가 관리해 줘야겠어.”

“안심하고 수련에 매진하셔도 됩니다. 족내의 일은 제가 게으름 피우는 일 없이 착실히 처리하고 있겠습니다.”

한립의 말에 낙풍이 서둘러 답했다.

“내가 머무는 사합원 밖으로 강력한 진법을 펼칠 것이야. 누구도 접근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내 화신을 찾아가게.”

“존명!”

낙풍이 떠나고 한립의 몸에서 물빛이 길쭉하게 늘어나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의 지기화신이었다.

한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 진법 원반 두 개를 꺼내 지기화신에게 건네주었다.

표면에 하얀 점들이 빼곡하게 박혀 있고 둘레를 따라 구궁팔괘도와 16 방위가 각인되어 있어 퍽 기이해 보였다.

성이자모반(星移子母盤)이라 불리는 원반은 큰 대가를 치르고 무상맹을 통해 교환한 것으로 공간을 넘어 물품을 전송해주는 법보였다.

* * *

보름이 지난 어느 날 밤.

기운을 숨긴 그림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오몽도를 떠났다.

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푸른 둔광을 일으킨 그림자는 흑풍해역 중심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 * *

흑풍도는 흑풍해역의 중심부답게 굉장히 광활했다.

섬이 아니라 흑풍대륙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고 주위에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섬들이 바둑알처럼 널려 있었다.

흑풍도는 영맥이 밀집되어 있어 천지영기가 농후하고 유일하게 외부로 통하는 전송진이 설치되어있는 곳이었다.

매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사들과 범인들이 각종 자원을 들고 흑풍해역 곳곳에서 몰려들어 수많은 천지재료들이 거래되고 또 사방팔방으로 흘러들어갔다.

몇몇은 흑풍해역의 산물 절반이 흑풍도에 모여 있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번화한 섬이었다.

흑풍도 남부 연안지대에 위치한 성은 거대한 짐승이 엎드려 있는 것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성 안에도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있고, 사방팔방으로 뚫린 넓고 깨끗한 대로에는 행인들이 가득했다.

공중에도 건물들이 떠있어서 그 사이를 수사들이 휙휙 날아다녔다. 흑풍도 제일의 성이라 불리고 전송진이 있는 흑풍성(黑風城)이었다.

이제 막 날이 밝았는데도 흑풍성은 시끌벅적했다. 연안에 위치한 섬답게 성 밖의 여러 부두에 배들이 속속들이 들어와 범인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흑풍성에서 조금 떨어진 연안의 널찍한 백옥 부두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들 먼 바다를 보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열일곱 정도로 보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년도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모설이었다. 그는 비린내가 나는 바다 바람을 마시고 눈살을 찌푸렸다.

내륙 출신인 그는 흑풍도에 온지 벌써 2년째인데도 바닷바람이 싫었다.

“이야, 모 수사! 일찍도 나와 서있구나!”

뒤를 돌아보자 구레나룻을 기른 풍채 좋은 거한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조 형님, 농도 잘하십니다. 제가 이전에 형님보다 먼저 나온 적이 어디있다고요.”

모설은 웃으며 답했다. 조호란 이름의 거한은 생긴 것은 무섭게 생겼어도 성격이 좋아 남들과도 잘 지냈다.

그 역시 외지에서 온 산수로 평소 모설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설아, 이번 달 수확은 어떻더냐?”

조호가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별롭니다. 며칠 동안 한 건도 못했어요. 형님은요?”

“어제 돈 많은 고객을 만나 쏠쏠하게 벌었다. 조금 더 열심히 하면 올해 안으로 화영수(化嬰水)를 살만큼은 모을 수 있을 게다.”

“그럼 미리 축하드려야겠네요. 형님의 영근 자질에 화영수를 구하면 금방 원영을 응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바다로 나가 요수를 죽여 더 빨리 영석을 모을 수 있을 테고요!”

모설은 부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이제 막 금단을 이룬 그는 원영기에 이르려면 한참 멀었다. 그 말에 조호가 더욱 밝게 웃으며 모설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설이 너는 아직 어리니까 괜찮다. 이 형님 나이가 되면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게야.”

그때 멀리서 둔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설과 조호는 하던 말을 멈추고 얼른 고개를 들어 하늘 끝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구름을 가르고 망루가 달린 거대한 선박이 나타났다. 길이가 무려 천 장에 이른 듯 보였고, 거의 2, 30층은 되는 선실마다 네모난 창문이 잔뜩 박혀 있었다.

거대 선박은 점점 속도를 줄이며 그곳에 멈춰 섰다.

쿠르릉!

부두 바닥의 문양들이 머금은 빛이 한데 뭉쳐 굵은 빛기둥을 이루고 공중의 선박으로 솟구쳤다. 거대 선박 아래에도 복잡한 문양들이 나타나 진법을 이루고 빛기둥을 흡수했다.

빛기둥은 사슬처럼 부두와 선박을 연결해 천천히 배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부공운주(浮空雲舟)라 불리는 흑풍해역에서 유명한 선박이었다.

흑풍해역은 변경 지역으로 진선계 전체로 보면 바다 속의 좁쌀만 했고, 북한선역에서도 외진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생활하는 수사들에게는 광활하기 짝이 없었다.

진선이라고 해도 흑풍해역 전체를 날아서 가로지르려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흑풍해역은 거대 섬들이 분산되어 있고 해역 곳곳에 각종 요수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어 진선 일부를 제외하면 마음대로 돌아다니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흑풍도 제일의 상단이 그것을 돈 벌 기회로 보고 엄청난 자본을 들여 부공운주를 만들자 상황은 달라졌다.

특수한 제련법으로 만들어진 부공운주는 한 번에 만 명을 태우고도 진선보다 빠른 속도로 해역을 누빌 수 있었다. 빠르고 안전한 운송수단인 만큼 이용료가 상당히 비쌌지만 수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쿠릉.

부공운주의 하얀빛이 기다란 통로로 변해 부두로 이어졌고 수사들이 통로를 따라 내려왔다. 모설과 조호는 얼굴에 웃음을 띠우고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선배님, 흑풍성으로 가십니까? 소인이 성 사정을 잘 아는데 어디든 가려는 곳을 알려주시거나 처리할 일이 있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모설이 열정적으로 막 부두에 내린 흑색 장포 사내에게 말을 붙였다. 조호도 다른 사람을 붙들고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 외에도 비슷한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흑포 사내는 모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흑풍성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모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한 채 다음 사람에게로 갔다.

하지만 선박의 승객들이 절반 이상 내릴 때까지도 아무도 모설을 고용해 주지 않았다.

“그럼요! 제가 도와드릴 것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선배님!”

조호는 이미 고객 한 명을 구했는지 얼굴이 밝았다. 합체기 수사인 상대는 손을 휘저어 남색 빛으로 조호를 휘감은 다음 흑풍성 방향으로 날아갔다.

모설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어렸다. 나이가 어린 편이라 믿음이 가지 않는지 항상 일거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때, 청포 사내가 표표히 내려와 바로 흑풍성으로 날아가지 않고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선배님, 흑풍성은 처음 오셨나 봅니다. 흑풍성은 규모가 큰 만큼 길도 복잡하고, 사방에 금제가 펼쳐져 있어 안내하는 이 없이는 원하는 일을 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소인 흑풍성에서 나고 자라 모르는 곳이 없습니다. 선배님을 도와드릴 수 있을 겁니다.”

모설은 사내에게 다가가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길잡이군.”

“옙! 이 일을 한지도 4, 5년째입니다. 중품 영석 딱 다섯 개에 모시겠습니다.”

청포 사내가 대답하자 모설은 희망이 보였는지 평소보다 가격을 더 낮게 불렀다.

“그러지, 마침 길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푸른빛으로 모설을 휘감아 흑풍성으로 출발했다.

“이름이 무엇이지?”

사내는 모설을 아래위로 훑다 이채를 띠고 물었다.

“모설이라 합니다.”

“모설? 여자 아이 이름 같군.”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인데, 확실히 그렇긴 하지요.”

사내의 말에 모설이 민망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까 흑풍성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는데 바닷가에서 자란 이들은 흔히 피부가 검게 변하면서도 다홍빛을 띠는 경우가 많다. 네 피부와는 확연히 다르지! 넌 산골출신 같구나.”

사내의 말에 모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썰미가 좋으십니다. 소인 산촌에서 자란 것이 맞습니다. 외지인은 흑풍성에서 길잡이 노릇으로 먹고살기가 어려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배님…….”

“길 안내만 제대로 하면 출신이야 상관없다.”

청포 사내는 고개를 푹 숙인 모설을 보고는 추억에 사로잡혔다가 이내 손을 저었다. 사내는 바로 두 달이 걸려 흑풍도에 도착한 한립이었다.

그는 눈앞의 성을 보고 무척 놀랐다. 그의 안력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성 상공에는 거대한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은 금세 흑풍성 인근에 도착해 성벽에 뚫린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문을 발견했다.

“선배님, 각 문마다 드나드는 이들이 다릅니다. 현지 거주민과 수사들은 보통 별도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외지에서 온 범인과 상인들은 은량을 내야하지요. 선배님처럼 처음 흑풍성을 찾은 수사들은 저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모설의 손끝이 왼쪽의 반달 모양 문으로 향했다.

한립은 대답 없이 그를 데리고 문 쪽으로 날아갔다. 검은 장포를 입은 수사 몇이 성문을 지키고 서서 외지 수사들을 상대로 입성 비용을 거두고 있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수사들과 똑같았지만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지선의 도병(道兵)과 비슷한 존재였다.

성문 옆에 수행에 따라 지불해야할 비용이 새겨져 있었는데, 연허기까지만 명시가 되어 있고 합체기 이상에 대해서는 적힌 바가 없었다.

“합체기 이상의 수사들은 입성 비용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냐?”

“맞습니다. 그런 존귀한 신분의 수사에게 어찌 비용을 거두겠습니까.”

“그렇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도 입구에 다다랐다. 한립은 영석을 꺼내지 않고 뒷짐을 진 채 성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 도병의 손에서 빛이 번뜩 날아가 한립을 스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모설은 깜짝 놀란 얼굴로 허둥지둥 하품 영석 2개를 꺼내 도병에게 바치고 한립을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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