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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523화 (1,280/2,000)

1523화. 본명팔령항(本命八靈缸)

*

한립은 약간 실망했지만 이런 감정은 금세 사라졌다. 녹색 영액이 변한 수정 알갱이가 중수 정련 속도를 높이는 것만 해도 역천의 능력이었다.

본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길 바라는 것은 과한 바람이었다.

물론 이후 기연을 얻어 시간법칙의 신비를 알아낼 수 있다면 그도 시간법칙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좋게 말하면 원대한 꿈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상상에 불과했다.

삼대지존법칙이 아니라 삼천 대도 중 하나를 진정으로 장악해 진정한 진선이 되는 것도 산선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수행을 회복하긴 했지만 아직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어서 실력을 키우고 잃어버린 기억과 보물들을 찾아 또 다시 악독한 수에 당하지 않게 방비해야 했다.

흑풍해역은 꽤 외진 곳이었지만 만일 원한을 가진 이가 종적을 발견해 찾아오면 큰일이었다.

원영을 봉인까지 해두었으니 그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만한 수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첫째, 처음 비승해 도착한 비선대로 가서 그를 인도했던 고승을 찾아가 그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는 것이었다.

허나 넓디넓은 북한선역에서 고승을 찾을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았고, 그의 말을 믿어도 될지 의심이 들었다. 또한 진선경 후기의 강자를 무턱대고 찾아간다는 것은 결코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두 번째 단서는 선계에서 내려온 수배령과 옥함에 봉인해 둔 검푸른 신비 사슬이었다. 수배령을 내린 자나 사슬의 주인이 그의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실마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길을 택하든 실력이 따라줘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루빨리 실력을 키우려면 잃어버린 보물과 금동, 해 도인을 찾아야 할 텐데…….”

또한 화신이 신속히 대량의 중수를 정련하는 방법도 있었다. 흑해중수경에는 양만 충분하면 중수가 강적을 상대할 때 필살기가 될 수 있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허나 녹색 액체로 계속 수정 알갱이를 만들어내도 경전에 적힌 수량을 이루려면 하루 이틀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 * *

한 달 뒤, 이른 아침.

사합원 정원에 녹이 슨 소박하게 생긴 팔각형 청동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여덟 개의 면으로 이루어진 거대 항아리에는 각각 입을 크게 벌린 기린(麒麟), 도철(饕餮), 기우(夔牛) 등 고대 진령을 닮은 흉악한 괴물들이 각인되어 있었다.

괴물들 옆으로 원형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는 여덟 개의 커다란 주술문자가 금색으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항아리 아래 청석 돌판에는 날카로운 병기로 그은 반원형의 문양이 여덟 개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꽃송이처럼 보였다. 항아리 안에 담긴 맑은 물은 거울처럼 아주 잔잔했다.

이때 한립은 그 옆에 서서 항아리를 만져보는 중이었다.

본명팔령항(本命八靈缸)이라 불리는 이 항아리는 3일 전 무상맹 진법원반을 통해 비싸게 구한 물건으로 누군가를 찾는 데는 특화된 보물이었다.

다른 보물과 달리 이 항아리는 혈맥 혹은 의식이 연결된 인물이나 물건만 찾을 수 있었다.

한립이 높은 가격을 치르고 이것을 구한 것은 본명비검과 서금충 등 애지중지하던 보물들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한립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손바닥을 뒤집어 눈알 크기의 극품영석 여러 개를 꺼내 들었다. 물빛 흑은 황토빛을 반짝이는 영석들이었다.

항아리 둘레를 따라 빙글 돌며 물과 흙 속성 영석들을 여덟 마리 짐승의 입에 끼워 넣은 그는 원래 자리로 돌아와 웅얼웅얼 읊조리기 시작했다.

화앗.

태양이 정원의 담을 넘어 첫 번째 빛줄기로 항아리를 비추었을 때, 항아리 안의 맑은 물이 은은한 금빛을 머금었다.

한립은 두 손을 항아리에 대고 복잡한 주문을 외워갔다.

그의 주문 소리가 커지자 항아리 아래 반원형 문양들이 푸른빛을 반짝이고 항아리 각 면의 주술문자도 밝은 빛을 분출했다.

동시에 고요하던 항아리 안에 물결이 일고 항아리 표면의 짐승들의 입에서 밝은 빛이 번득였다.

짐승들의 입에서 물빛과 황토빛이 쏘아져 나와 항아리 물속에 남색과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음양의 태극 도안을 비추었다.

한립은 신중하게 손을 들어 수면 가까이 가져갔고, 검지손가락 끝에서 금빛 정혈 한 방울이 새어나와 느릿하게 떨어졌다.

퐁!

마치 의식 세계에 물방울이 떨어진 듯 물소리가 한립의 마음을 울렸다. 핏방울은 물속에 들어가서도 녹지 않고 팽이처럼 빙글빙글 회전했다.

이 때문에 물에 어린 남색과 노란색의 태극 도안이 섞여 산과 강 같은 기이한 그림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한립은 때맞춰 새로운 주문을 외웠고 핏방울은 지령을 들은 것 마냥 우뚝 멈춰 서서 작은 금색 단검 모양으로 변했다. 분명 그의 본명비검인 청중봉운검과 생김새가 똑같았다.

“가라.”

단검은 부들부들 떨며 쾌속으로 물속을 헤치고 다녔다.

청동 항아리가 크기는 했어도 그 정도 속도면 금방 벽에 부딪쳤어야 하는데, 금색 단검은 항아리 벽과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고 헤엄쳤다.

신기한 것은 물에 뜬 산과 강의 풍경이 단검의 이동 방향에 따라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약 일각이 지나 금색 단검은 흐릿하게 밀집된 선들 위에 멈추었다. 정확히 어딘지는 알 수 없어도 흑풍해역 밖, 그것도 동쪽으로 꽤 먼 곳인 것은 분명했다.

한립이 손가락을 움직여 금색 단검으로 가져갔다. 본명비검의 정확한 상태를 감응해 보려는 시도였다.

“이건…….”

손끝이 금색 단검에 닿은 순간 한립의 의식세계가 미세하게 요동쳤다. 익숙한 기운을 감지한 그가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눈을 뜬 그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틀림없이 해 도인의 기운이야!”

기쁨 뒤에는 여러 가지 궁금증이 뒤따랐다. 청죽봉운검이 해 도인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그들의 거리가 가까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금동도 이곳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

다시 주문을 외기 시작한 그는 손바닥으로 항아리 물을 살살 내리쳤다.

찰랑.

금색 단검이 핏방울로 돌아가더니, 몸을 부르르 떨고 머리 잃은 파리처럼 항아리 안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러다가 이제는 아예 묵직하게 항아리 바닥으로 가라앉아 사라졌다. 정혈이 없어지고 청동 항아리에 꽂아둔 영석들도 어둑해져 빛이 가셨다.

한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서금충왕의 위치는커녕 대략적인 방향도 알아내지 못했다.

서금충왕과의 한 줄기 의식연계가 남아 있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청죽봉운검과 해 도인의 소식을 알았고 그들이 같은 방향에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항아리가 알려준 방향으로 이동하다보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혈맥과 의식 감응으로 그 둘을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한립은 당장 출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곳 일을 마무리해놓고 가야 했다.

* * *

보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어느 흑풍해역 모처에는 백여 개의 회백색 소형 섬들이 드문드문 퍼져 있었다. 크기가 제각각인 섬들은 비취색 벽에 박힌 하얀 진주 같아 보였다.

섬들은 숲이 거의 없어 영기가 희박하고 짐승은커녕 흔한 바닷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적막한 분위기를 풍겼다.

사실 이 섬들은 투명한 보호막으로 둘러싸여 있어 평범한 진성경 수사가 의식으로 살펴봐도 쪽빛 바다밖에 볼 수 없었다.

그 섬들 중 한 곳의 산 속.

사내와 여인이 돌로 된 원형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사내는 우람한 체구에 구멍이 숭숭 뚫린 가면을 쓴 한정족 조신 한구였고, 남색 장삼을 걸친 미부인은 그와 힘을 합쳐 한립을 상대했던 곡골부인이었다.

“그 자가 이곳은 찾아내지 못할 거란 말을 믿어도 되겠지요?”

곡골부인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찻잔을 들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거의 전 재산을 털어 환광진인에게 구한 이 환리진(幻离陣)은 진선경 후기 수사라도 발견하지 못할 테니까요. 겨우 일개 현선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혹시라도 그 자가 이곳을 찾아내도 진안을 제거하기 전에는 우릴 찾아내지 못할 겁니다.”

한구 수사는 이렇게 말하면서 눈빛이 흔들렸다.

“처음부터 그 자를 건드리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아, 화신은 망가지고 거처로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다니……. 수사만 아니었으면 골우도(骨憂島)에서 근심걱정 없이 잘 지내고 있었을 거예요!”

“이제와 그런 말이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가 말이 좋아 지선이지 솔직히 흑풍해역에서도 말석에 자리한 선인들이지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야 십만 년이 흘러도 지금의 경지를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이번에는 판단을 잘못 내려 이 꼴이 되었지만 위험이 지나기를 기다리다 화신을 다시 제련할 수만 있으면 반드시 재기할 수 있을 겁니다.”

“화신을 다시 제련하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요? 그러지 말고 제 말대로 어떻게든 흑풍해를 떠날 방법을 생각해 보시죠.”

곡골부인이 찻잔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건의했다.

“그야말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일단 떠날 방법이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조신이 되어서 자신이 영역을 떠나면 법칙의 힘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돼 평범한 산수조차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한구의 반박에 곡골부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한구가 엉덩이에 바늘이 꽂힌 사람처럼 돌 의자에서 튀어 올라 소리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바깥에서 콰릉! 하고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리더니 여러 섬들을 가린 투명한 보호막과 섬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섬마다 먼지가 뿌옇게 일고 깊은 고랑이 생기며 암석파편이 도처로 튀어 바다로 펑펑 떨어졌다.

거대한 파도 속으로 작은 섬들이 붕괴되어 가라앉았다.

먼지 속에서 나타난 두 인영은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서쪽 방향으로 빠르게 달아났다.

그들이 막 천 리를 이동했을 때 전방에 또 다른 둔광이 멈춰 섰다.

큰 체구의 청년을 발견한 그들의 표정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한구는 어쩔 수 없이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류 선배님, 저희들을 한 번만 봐주시지요.”

한립은 곧장 공격을 하지는 않았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오랫동안 섬에 모아둔 보물과 재료들을 전부 바칠 테니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한구는 소매 속에서 한 손은 푸른 옥 조각을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은밀히 수결을 맺고 있었다. 그 옆의 곡골부인도 아무 말 없이 소매로 손을 가린지 오래였다.

푸른빛을 일으킨 한립이 그들을 향해 한 걸음을 뗐을 때, 둘 다 소매 속에서 찬란한 푸른빛을 내뿜고 흐릿하게 사라졌다.

순식간에 수만 리 밖에서 빛이 반짝인 뒤 한구와 곡골부인이 나타났다.

“신행결(神行玦)을 준비해 둔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현선의 몸을 지닌 자가 아무리 빨라봐야 우리를 바로 쫓지는 못할 테니까요.”

한구는 떨리는 마음으로 주위를 살폈다.

“신행결은 효과는 좋은데 발동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두 사람이 동시에 술법을 펼쳐야만 해서 하마터면 그곳을 벗어나지 못할 뻔했습니다. 이곳도 안전하지 않으니 서둘러 가시지요.”

곡골부인도 여전히 걱정스러워 보였다. 한구가 막 답을 하려는데, 멀리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사분들이 지기화신보다는 빠르시군요.”

한구와 곡골부인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라 다시 신행결을 발동하려는데 한립의 신영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곡골부인은 절망했고, 한구도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한립의 손에는 어느새 곡골부인이 사용하던 검은 장검이 들려있었고, 그 칼끝에서 거대하기 짝이 없는 검 그림자가 높다란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올라 고공의 구름층들을 꿰뚫었다.

혼비백산한 한구와 곡골부인은 마지막 담력을 쥐어짜 강력한 법보를 불러냈다.

한구는 소매를 펄럭여 수많은 얼음 가시가 박힌 하얀 수레바퀴를 소환했고, 곡골부인은 두 팔을 뻗어 불러낸 회색 인형을 몸속으로 흡수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한립이 손목을 아래로 꺾었다.

쉬이익!

기다란 파공음과 함께 거대한 검 그림자가 두 수사를 향해 거꾸로 떨어졌다.

이에 한구가 가면 아래로 피를 뿜어 얼음 수레바퀴에 넣자 피를 머금은 보물이 날카롭게 울며 거대한 얼음 봉황이 되어 날아올랐고, 곡골부인의 몸에서는 짙은 안개가 꿀렁꿀렁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검 그림자가 커지며 태양을 가렸고 한구와 곡골부인은 검 그림자에 매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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