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2화. 역천의 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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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궁금증이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보수는 잠시 후 전달될 겁니다.”
한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허상은 말없이 사라졌다. 그는 상당한 양의 보물을 꺼내 진법 원반의 물품 전송 지점에 그것을 두었다.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태비의 눈 때문이 아니라 장천병이 체내의 선령력을 미친 듯이 빨아들여 응결해낸 수정 알갱이 때문이었다. 아직 시도해 보지는 않았지만 일회성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 법칙의 힘을 함유한 천지영물을 그것도 시간법칙을 지닌 것을 무한정 만들어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영약의 성장을 촉진하던 영액에 시간법칙이 함유된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곧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시간법칙의 힘을 지닌 영물이 선계에서도 진귀하다면 수정 알갱이에 대한 것은 비밀에 붙여야 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그것을 거래에 사용해서도 외부에 노출해서도 안 된다.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금방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기억을 떠올려 보려 노력했다.
‘수백 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게 이것 때문은 아니겠지?’
벌떡 일어나 밀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털썩 주저앉아 수정 알갱이를 꺼내들고 의식을 불어넣었지만 한나절을 있어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한립은 손끝을 미간에 가져다 대고 파멸법목을 불러냈다.
두 눈에서는 남색 빛이, 파멸법목에서는 검은빛이 쏘아져나가 한데 뭉쳤다.
주문을 외는 소리와 함께 미간에서 방대한 의식의 힘이 흘러나와 빛덩이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세 줄기 빛은 곧 검은색과 남색이 교차하는 커다란 눈알로 변해 수정알갱이를 응시했다. 파멸법목과 명청령안을 결합해 사용하는 비술이었다.
짙은 남색 빛 한 줄기가 눈동자를 빠져나와 수정 알갱이를 둘러쌌다.
“엇!”
한립의 얼굴에 희색이 어렸다.
흐릿한 수정 실 한 가닥이 알갱이 안에 보일 듯 말 듯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비술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절대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 * *
보름 후, 오몽도 인근의 어느 암초.
파도가 철썩철썩 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했고, 암초 위에는 한립이 수정 알갱이를 이마에 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여러 날 동안 경전을 뒤적인 결과 법칙의 힘을 함유한 재료를 연구하는 것만으로 법칙의 힘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후 비슷한 공법을 익힐 때에는 그 경험이 도움이 된다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좋은지는 스스로 천천히 알아봐야 했다.
삼대 지존법칙 중 하나인 시간법칙이 걸린 일이기에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한참 뒤, 천천히 눈을 뜬 한립은 수정 알갱이를 떼고 고개를 저었다. 며칠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알갱이 속 시간법칙을 감응해 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물론 예상치 못한 결과는 아니었다.
한립은 천 장 아래 바다 속의 지기화신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사실 수정 알갱이가 함유한 시간법칙의 힘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었다.
알갱이 중간의 금색 실이 하루가 다르게 짧아졌다. 이 속도면 다시 보름이 지난 후에는 시간 법칙의 힘이 완전히 소실되고 말 것이다.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써버려야 한단 말이지…….”
한립이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전방 해역의 거대 소용돌이가 점점 누그러지고 남색 지기화신이 솟아올라 그 옆에 섰다.
한립이 던져주는 수정 알갱이를 받은 화신은 검은 빛을 일으켜 머리 위의 법칙의 실을 서서히 수정 알갱이 쪽으로 이동시켰다. 수정 알갱이 안의 법칙의 힘을 조사하려면 당연히 법칙의 힘을 써야 했다.
다만 수정 알갱이 안의 시간법칙은 지존법칙이었기에 적잖은 위험부담을 안고 가야 했다.
그때 물의 법칙을 함유한 실이 번득 수정 알갱이 안으로 들어갔다.
웅!
수정 알갱이가 돌연 눈부신 금빛에 휩싸였고, 한립이 자세히 살피려 하자 이변이 일어났다.
쿠쿵!
느닷없이 수정 알갱이가 터져 주변 허공이 세밀한 파문으로 가득 찼다. 밝고 어두운 그림자들이 빼곡하게 어른거리는 파문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너무 가까이에서 벌어진 일이라 미처 피하지 못한 한립은 급히 진극막을 응결한 채 괴력과 충돌했다. 그는 바위에 맞은 것처럼 퍽! 하고 날아가 기혈이 뒤집혀 쿨럭 피를 토해냈다.
수백 장 밖에서 간신히 멈춰선 한립은 그와 지기화신이 서있던 암초가 사라지고 주변 바다도 괴력에 밀려나 수백 장의 동그란 진공지대가 형성된 것을 알아차렸다.
화신도 재빨리 물의 법칙으로 보호막을 펼치기는 했지만 오른쪽 팔과 몸 절반이 터져나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중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목숨이 오락가락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건!”
한립의 시선이 화신 머리 위의 법칙 실에 고정되었다. 남색으로 빛나던 물 속성 법칙 실이 조금 더 굵어져 희미하게 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법칙 실에서 희미하게 시간법칙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에 깜짝 놀란 마음을 다잡고 서둘러 화신을 불러와 입에서 영화(嬰火)를 뿜었다.
화신을 뒤덮은 불길 속으로, 여러 가지 재료들이 날아가 녹아들었다.
* * *
꼬박 하루가 지나고, 해저에 내려선 한립은 원래 모습을 회복한 지기화신을 살펴보고 있었다.
가부좌를 틀고 가슴 앞에서 두 손을 모은 지기화신의 머리 위로 법칙 실이 웅웅 떨며 이전보다 밝은 빛을 발산했다.
해수면에는 하늘에 닿을 듯한 거대한 파도가 넘실거렸고 이전보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형성돼 수천 리 밖의 오몽도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파도가 철썩이며 섬이 심하게 흔들리자 범인들은 물론이고 수사들도 안색이 급변했다.
연허기 이상의 수사들이 분분히 날아올라 이변이 일어난 원인을 파악하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지시를 받은 것처럼 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섬 곳곳에 보호막이 펼쳐지고 불안해하던 이들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때 해저의 한립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지기화신의 겹쳐진 두 손 사이로 깨알만 하던 검은 중수가 서서히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깨알 크기이던 중수가 빠르게 회전하며 쌀알, 콩알, 심지어 손톱만 하게 커졌다.
한 시진이 못되어 달걀 크기로 커진 검은 중수를 눈앞에 둔 한립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화신 머리 위에 있던 금빛이 수정 알갱이 속 금색 실처럼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 * *
시간이 흘러, 보름이 지나갔다.
해저에 앉아 있는 한립 앞에는 법칙실의 금빛을 거의 잃어버린 지기화신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이에 지기화신이 중수를 정련하는 속도도 느려졌다.
법칙 실 표면의 금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화신 주위로 미친 듯이 출렁이던 바닷물도 얌전해졌으며 해수면의 거대 소용돌이도 이전 크기로 돌아갔다.
한립은 화신 앞의 검은 중수 덩어리를 쳐다보았다.
수정 실에 함유된 시간법칙의 힘은 화신이 펼친 법칙 실과 융합되었고, 화신의 중수 정련 속도를 대폭 증가시켰다.
그런데 융합이 안정적이지 못해 시간법칙의 힘이 지속적으로 유실되었고, 그 힘이 다하고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제야 수정 알갱이를 활용할 길이 열렸다.
이 속도 대로면 1성 중수를 정련하는데 천오백 년 정도면 충분했다. 그는 진수대(眞水袋)를 꺼내 중수를 담고는 해저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오몽도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의 지기화신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중수 정련을 계속했다.
* * *
보름 후.
오몽도에서 꽤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 복잡한 문양들이 새겨진 9개의 은색 돌기둥들이 별빛처럼 은빛을 반짝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신묘한 진법이었다. 진법 중앙에 앉은 한립은 열댓 개의 옥병과 목갑 등 단약 용기들을 늘어놓았다. 하나같이 뚜껑이 꽉 닫혀 있는데도 맑은 약향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한참 후, 눈을 뜬 한립이 장천병을 불러내자 그의 체내에서 선령력이 흘러나와 병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병 표면의 암녹색 이파리 문양이 더없이 밝게 빛나 그의 손이 요란한 녹색빛에 휩싸였다.
쉭!
잠시 후 한립은 날아오른 작은 병을 향해 열손가락을 튕겨 푸른 법결들을 던져 넣었다. 천지원기가 요동치고 병 안의 녹색 액체가 또르르 굴러 나왔다.
병 표면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눈과 입은 은색 빛과 화염을 분출해 녹색 액체를 에워싸고 활활 타올랐고, 천지원기는 작은 병을 감싸고 거대한 빛기둥이 되어 하늘과 땅을 연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체내의 선령력이 마구 빠져나가 영액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감지했다. 이번에는 놀라지 않고 수결을 맺어 미리 펼쳐 놓은 진법으로 푸른빛을 날렸다.
쿠릉!
진법이 발동해 강렬한 하얀빛이 떠올라 커다란 하얀 구슬을 이루고 그를 중심으로 회전했다. 주변의 천기 원기가 분분히 하얀 구슬 속으로 흘러들어 한립의 선령력을 보충해 주었다.
동시에 그는 푸른 옥병을 불러내 녹색 단약을 꺼냈다. 청화단(靑花丹)은 그가 지금 구할 수 있는 최상의 회복 단약이었다.
아직 선령력 유실이 심하지 않지만 그는 단숨에 단약을 삼키고 운공을 시작했다.
얼마 후 진법 둘레의 아홉 돌기둥으로 법결들이 날아가 무수히 많은 별빛 주술문자들을 불러냈고, 밤하늘의 성광의 힘이 내려와 일곱 줄기 별빛 기둥으로 변해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닷새가 지나지 않아 한립은 또 얼굴이 팍 상하고 말았다.
가장 좋은 단약을 준비하고 천지영기를 끌어모으는 진법으로 보조를 했는데도 체내의 선령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전처럼 정혈을 태우는 비술을 사용해 선령력으로 전환해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피골이 상접한 한립은 그나마 처음 수정 알갱이를 응결했을 때보다는 혈색이 남아 있었다. 손에 든 반투명한 수정알갱이를 보는 그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며칠 뒤.
한립은 오몽도 근처의 또 다른 암초 위에 자리를 잡고 여러 겹의 보호막을 두른 채 공중의 수정 알갱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지기화신이 앉아 똑같이 여러 겹의 보호막을 두르고 있었다.
한립의 손짓에 화신 머리 위의 법칙 실이 표표히 날아와 천천히 수정 알갱이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번에는 직접 시간법칙의 힘을 감응해볼 생각이었다.
지존법칙의 힘이 화신의 중수 제련 속도를 높였다면 그에게는 어떤 효과를 불러올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법칙 실이 수정 알갱이로 스며들어도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한립은 내심 멍해졌다.
이전과 똑같이 시간법칙을 함유한 수정 알갱이에 물의 법칙의 힘을 들여보냈지만 융합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네다섯 번을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굳은 얼굴로 손을 저어 물 속성 법칙 실을 화신 머리 위로 돌아가게 하고, 수정 알갱이도 그쪽으로 보냈다.
웅! 쿠쿵!
그러자 물 속성 법칙 실을 품은 수정 알갱이가 폭발했다.
충분히 준비를 해두었기에 한립과 지기화신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고 법칙 실 표면에 흐릿하게 금빛이 어렸다.
“화신에게만 소용이 있나보구나. 본체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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