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1화. 중수(重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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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에 또 3일이 지났다.
해역 수백 리를 가린 푸른 빛구슬이 아무 징조도 없이 갑자기 수축해 거의 투명하게 변한 영액을 둘러쌌다. 그 안에서 응축된 천지원기가 영액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쿠쿵.
푸른빛의 장막은 다시 한 번 수축하며 정순한 천지원기를 영액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공중의 영액이 물방울 크기의 반투명한 수정 알갱이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쉭!
이때, 바싹 마른 손바닥이 튀어나와 그것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의 주인은 당연히 한립이었다.
그는 지금 바싹 마른 모습으로 의복이 헐렁하게 늘어져 펄럭이고 있었다. 옷을 입은 게 아니라 마치 푸른 장삼을 걸어두는 옷걸이 같아 보였다.
그러나 원기를 크게 잃은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고 피로한 와중에도 눈동자가 찬란히 빛났다.
그는 고개를 들고 고공의 작은 병이 암녹색 빛과 표면의 눈과 코를 잃은 것을 보았다.
거의 보일 듯 말듯하게 흐릿해진 작은 병의 모습에 그는 조금 놀랐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며칠 만 달빛을 받으면 원래대로 회복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립은 작은 병을 불러들여 수정 알갱이를 자세히 살폈다. 분명 아주 익숙했는데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돌연 눈을 감은 그는 미간에서 수정 알갱이를 향해 수정실을 쏘아 둘둘 감았다. 잠시 후 번쩍 눈을 뜬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조사해보니 수정 알갱이는 법칙의 힘을 함유한 천지영물로 그 안에 함유된 법칙의 힘이 놀랍게도 이전에 얻은 외눈박이 거인의 눈알과 똑같았다.
그저 수정 알갱이가 함유한 법칙의 힘이 거인 눈알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만 달랐다.
작은 병이 지닌 여러 가지 신통과 이전에 보인 기이한 현상을 생각했을 때 절대 흙 속성 법칙의 힘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오몽도로 돌아가 진법 원반을 통해 무상맹에서 알아보든지 다른 방법을 써야 알아낼 수 있을 듯싶었다.
그가 단약 여러 개를 꺼내 복용하자 정순한 원기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며 안색이 좀 나아졌다.
즉시 둔광을 일으켜 오몽도로 돌아간 그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사합원 밀실로 조용히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근방 천리의 천지영기가 사합원으로 몰려들어 커다란 영기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는데, 이미 이상 현상에 익숙해진 오몽도 수사들과 범인들은 조신이 무언가를 하나보다 생각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영기는 저녁까지 지속적으로 몰려들다가 차차 흩어졌다.
그러고 나서는 밤하늘의 북두성광의 힘이 드리워 일곱 줄기의 거대한 별빛 기둥을 형성하고 사합원으로 떨어졌다.
낮에는 영기가 몰려들고 밤에는 별빛이 드리우는 일이 한 달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밀실 안의 푸른 빛덩이 안에서 누군가 서서히 돌고 있었다. 푸른빛이 번득 사라지고 나타난 한립은 기력이 충만한 얼굴이었었다.
소북두성원공을 수련했고, 워낙 근골이 단단한 덕에 무지막지한 원기 손상 상태에서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일정 기간 달의 힘을 흡수한 장천병도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한립은 녹색 영액이 변화한 수정 알갱이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고심했다. 다른 손바닥을 뒤집어 불러낸 외눈박이 거인의 눈에 의식을 불어넣어 보니 과연 둘이 함유한 법칙의 힘은 똑같았다.
그는 눈을 뜨고 결정을 내렸다. 수정 알갱이를 만들려고 거의 인간 육포가 되다시피 했는데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그는 무상맹의 푸른 가면을 쓰고는 미간을 짚고 주문을 외웠다.
팟.
찰나의 순간 물빛이 떠올라 그 앞에 거대한 진법 원반 허상을 만들어냈다. 그는 외눈박이 거인의 외형을 대략 묘사하고 그 정체를 알아내는 이에게 넉넉한 보상을 약속했다.
그는 수정 알갱이와 가면 등을 넣어두고 푸른빛으로 변해 사합원을 나섰다.
솨아아아.
오몽도 인근 해역에 백 리에 달하는 거대 소용돌이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해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에 나타난 한립은 바로 소용돌이 속을 뛰어들어 해저로 내려갔다.
한립과 똑같이 생긴 남색 지기화신이 바위에 정좌해 있었다. 가슴 앞에서 두 손을 포갠 지기화신은 검은 물의 정화를 전신에서 반짝이며 흑해중수경을 수련 중이었다.
신념의 힘이 공간을 뛰어넘어 지기화신 체내로 들어와 물의 법칙 파동을 발산하는 법칙 실 한 줄기를 만들어냈다.
법칙 실을 본 한립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신념의 힘으로 법칙의 힘을 응결하는 지선의 길은 확실히 신기한 점이 많았다.
겨우 오몽도 주민들이 제공하는 신념의 힘으로 지기화신이 이렇게 빨리 법칙의 실을 응결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화신 체내의 법력은 꽤 되었지만 신념의 힘으로 오염이 되어서인지 약간 혼잡했다.
한립은 지선이 되어서도 다른 이들과 달린 지기화신이 흡수한 신념으로 본체를 오염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본체는 신념의 힘으로 응결할 수 있는 법칙의 힘을 누릴 수 없지만 선령력을 정순하게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어차피 지기화신을 제련한 것은 원영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한립의 시선이 자기화신의 두 손 위로 향했다. 어린아이 주먹보다 작은 검은 구슬은 그윽하게 물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흑해중수경의 수련은 듣던 대로 더디기 짝이 없었다.
오몽도로 돌아오자마자 화신을 이곳으로 보내 중수를 응결하게 했는데 한 달이 넘도록 수련한 성과가 겨우 저만큼이었다.
흑해중수경을 창립한 인물도 시냇물 수량의 3성 중수를 만들어내는데 50만 년이 걸렸다는 소리가 사실인 듯했다. 손을 까딱하자 중수 정어리가 날아와 그의 손에 들렸다.
아주 소량인데도 무게는 작은 산과 엇비슷했다. 그는 옥병을 꺼내 그것을 잘 담아두고 오몽도의 거처로 돌아가려 했다.
“흠?”
그런데 오몽도 상공에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주변 만 리의 천지원기가 모여 거대한 영기의 소용돌이를 이루고 폭포수처럼 오몽도의 어느 궁전으로 쏟아져 내렸다.
평소 낙풍이 머무는 곳이었다. 오색 빛이 흘러들어 형성된 오색바다 안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멀리서 궁전 방향을 쳐다보던 그가 흐릿하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엄청난 광경이었지만 섬 주민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고 낙 가 인물들, 특히 연허기 합체기 수사들만이 격동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오몽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합체기 수사가 대승기 경지에 이를 때 나타나는 장면이었다.
궁전에 앉은 낙풍의 얼굴은 희색을 띠었다 노기를 띠었다하며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었다. 마치 시험을 치르고 있는 사람 같았다.
팟.
푸른빛이 반짝이고 그 옆에 조용히 나타난 한립은 낙풍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운파동이 격렬해져 무언가 위험에 처한 듯한 느낌이었고, 궁전을 감싼 오색빛의 바다도 불안정하게 떨다가 주변으로 빛줄기를 날렸다.
쿠쾅쾅!
궁전 옆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고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멀리 달아나야 했다. 한립은 이를 지켜보다가 손가락을 튕겨 온화한 수정빛을 낙풍의 미간으로 날려 보냈다.
낙풍이 잔뜩 찡그리던 표정을 풀자 흔들리던 기운 파동과 궁전 밖 바다도 안정을 되찾았다.
점점 더 많은 영기의 실들이 내려와 궁전 자체가 거대한 빛의 고치로 변화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웅!
부르르 몸을 떤 고치 안에서 이상한 향기가 퍼져 나와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퍼석!
빛의 고치에 기다란 균열이 가고, 금빛 꽃송이들이 날아오른 틈에서 천상의 음악이 들려왔다.
우와아아아아!
궁전 밖 낙가 수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고 그 소리가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궁전 안, 푸른빛의 고리에 둘러싸인 낙풍은 피부가 옥처럼 맑게 반짝여 이전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천천히 눈을 뜬 그는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준비가 부족해 하마터면 심마의 겁을 넘지 못할 뻔했는데 돌연 이질적인 힘이 외부에서 들어와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덕분에 무사히 대승기에 이를 수 있었다.
낙풍은 몸을 일으키려다 옆에 서있는 한립을 발견했다.
“류 선배님께서 도와주신 것이었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낙풍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한립을 향해 대례를 올렸다.
“별것 아닐세. 나도 자네가 이렇게 빨리 대승기에 이를 줄은 몰랐군. 축하할 일이야!”
“전부 선배님께서 내주신 수련자원 덕분입니다.”
낙풍은 진심을 담아 공손히 답했다.
“앞으로도 나를 위해 일해 준다면 그런 자원은 부족함 없이 줄 것이네.”
합체기 수사였던 낙풍은 심부름을 시키기에 수행이 부족한 감이 있었는데 이제 대승기에 이르렀으니 여러 가지 시킬 일이 많아졌다.
“선배님 덕에 낙 가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낙 가 전족은 영원히 선배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절대 딴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
진중한 낙풍의 맹세에 한립은 빙긋 웃으며 무슨 말을 하려다 표정이 달라졌다.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건 없네. 오늘 자네가 대승기에 이른 일은 섬 전체의 경사이니 어서 가서 족인들과 시간을 보내게.”
한립은 말이 끝나자마자 흐릿하게 변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낙풍은 ‘류 선배’의 신출귀몰한 행동에 익숙해졌기에 그가 사라진 자리를 향해 허리 숙여 인사를 한 뒤 의복을 정돈하고 궁전 밖으로 나섰다.
사합원에 나타난 한립은 빠른 걸음으로 밀실로 들어갔다. 오는 동안 얼굴에 쓴 푸른 가면에서 하얀 빛이 반짝반짝 거렸다.
웅웅.
그의 손짓에 하얀 빛이 가면을 벗어나 앞쪽에 작은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체형을 알 수 없는 가면을 쓴 허상이 나타나 두 눈만 남색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제 임무를 수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외눈박이 거인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한립은 인사치레를 건너뛰고는 곧바로 물었다.
“제가 각종 기이한 짐승들에 관심이 많아서 수사께서 질문하신 외눈박이 거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희귀한 흙 속성 영수로 보이는데, 임무에 서술된 묘사로는 확신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주시면 더 정확한 답변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식견이 뛰어난 분이십니다. 거인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한립은 상세하게 외눈박이 거인의 외양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대충 적어 놓은 설명만으로 흙 속성 신통을 지녔다는 것을 알아냈다면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수사께서 말씀하시는 외눈박이 거인은 태비(太蜚)입니다.”
“태비라…….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주 보기 드문 천지영수로, 저도 들어보기만 했지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혼돈에서 탄생한 짐승으로 태생적으로 흙 속성 법칙을 지녀 흙을 자유롭게 다루고 성년이 된 후에는 진선경 수사에 상응하는 실력을…….”
가면을 쓴 허상은 술술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랬군요. 그 외에 특이한 점은 없습니까?”
“특이한 점이라……. 아, 하나뿐인 눈이 간혹 변이를 일으키면 선인들이 열광하는 시간법칙의 힘을 지니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변이를 한 태비가 나타나면 그 지역에 평지풍파가 일어나고는 했지요.”
“시간법칙이요…….”
그 말에 한립의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시간법칙! 시간법칙이라고!’
그도 태비가 펼친 신통이 시간법칙과 연관이 있을 거라 의심했지만 상대의 말을 들으니 외눈박이 거인이 변이를 한 태비일 가능성이 아주 컸다.
“하하, 그렇습니다. 삼대 지존법칙이라 불리는 시간법칙을 지니고 있기에 변이 태비가 출현하면 엄청난 소동이 벌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삼대 지존법칙이요?”
한립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가면 허상이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내며 한립을 위아래로 훑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삼대 지존법칙도 모른단 말입니까?”
“예, 저는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괜찮으시면 제게 가르침을 주시지요.”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니 가르침이랄 것도 없습니다. 소위 삼대 지존법칙이라 함은 시간법칙, 공간법칙, 윤회법칙을 뜻합니다. 만법(萬法)의 근원이라 불리는 이 삼대규칙에서 다른 3천 법칙들이 탄생했다고들 하고요.
지존법칙은 선계에서도 가장 희소하고 신비한 법칙들입니다. 심지어 성조들도 지존법칙을 장악한 이가 많지 않았고 그 이하의 선인들은 삼대 지존법칙을 한 번 보기도 어렵지요.”
“3천 법칙…….”
“그렇습니다. 3천 법칙은 각각 일종의 대도(大道)를 대표해서, 어느 대도를 통해서든 종국에는 도조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선계에 알려진 법칙의 힘이 3천여 가지라 3천 대도라는 말이 나왔고요.”
“그런 것이었군요.”
“삼대법칙을 합유한 재료는 선계에서도 무가지보(無價之寶)로, 평범한 경로로는 손에 넣기 어렵습니다. 최근에는 태비 자체도 보이지 않아 관련 소식을 고가에 사려는 이들도 허다합니다. 혹시 뭔가 아는 게 있으시면 맹 내에서 거래하셔도 좋을 겁니다.”
허상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하하, 제가 태비의 행방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저 이전에 관련 자료를 보았던 것이 떠올라 호기심에 알아본 것이지요.”
“하긴, 저도 태비에 관한 자료를 읽고는 흥미롭다고 여기기는 했습니다.”
한립이 웃어넘기자 허상은 눈을 반짝이면서도 같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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