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0화. 익숙한 기운
*
단전으로 들어간 허상들은 바로 반짝이는 거대 손들로 변해 검푸른 사슬을 붙들고 잡아끌었다.
“끌어내라!”
한립은 심장과 폐가 찢기는 것 같은 극통 속에서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자 단전 안의 거대 손들이 밝은 빛을 발하며 괴력을 발휘해 사슬을 바깥으로 끌어냈다.
촤르륵…….
엄청난 힘에 검푸른 사슬에서 날아오르던 주술문자들이 분분히 터졌고, 사슬은 조금씩 원영 밖으로 끌려 나왔다.
원영의 몸속에서 끌려 나온 사슬은 다시 돌아가려고 격하게 몸부림쳐댔다.
그러나 한립의 코웃음 소리와 함께, 단전 안의 거대 손들이 거원, 채봉, 뇌붕 등 허상의 모습으로 돌아가 부리로 물고 끌며 검푸른 사슬을 그의 배 밖으로 끌어냈다.
몸 밖으로 나온 사슬은 굵기가 어린 아이 팔뚝만 했고 길이는 웬만한 사람보다 길었다. 표면의 검푸른 주술문자들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아직 희미하게 법칙파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탓!
한립은 미리 준비해둔 하얀 옥함을 꺼내 사슬을 잡아채고는 그 안에 넣고 뚜껑을 닫아버렸다. 이어서 은색 부적이 옥함에 달라붙었다.
부드러운 은빛이 부적에서 흘러나와 옥함을 감싸고 사슬의 기운을 봉인해 외부와 단절시켰다.
그제야 한립은 한시름을 놓았고 빠르게 수결을 맺어 주위를 맴돌고 있던 진령 허상들을 흩어버렸다.
이때, 단전 안에 따듯한 기운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건…….”
놀란 그가 의식으로 단전 안을 살피니 줄곧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금색 소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방을 살피는 중이었다.
소인의 금빛은 사슬의 구속으로 타격을 받은 듯 조금 어둑했고, 그 아래서 푸른 파문이 둥글게 퍼지고 있었다.
바로 오랜 세월 봉인 당했던 그의 법력이었다.
땅속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오르는 듯했는데 부드럽고 잔잔하게 솟아오른 맑은 기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전을 가득 채웠다.
드디어 원영의 봉인이 풀린 것이다.
‘됐어!’
천천히 눈을 뜬 한립은 오랫동안 끙끙 앓던 이를 뽑은 것처럼 속이 시원해졌다. 그 후, 며칠이 지나도록 은색 거대 깃발이 사라진 사합원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리고 어느 날 오몽도 상공에 불쑥 둔광 하나가 솟아올라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섬 안의 적잖은 이들이 빛이 번득이는 것을 보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둔광은 오몽도에서 꽤 먼 해역에 이른 후에야 멈춰 섰다.
“…….”
푸른 장삼을 걸친 체격이 좋고 평범하게 생긴 청년은 한립이었다. 바닷바람에 장삼을 휘날리는 그의 몸에서 강성한 기운이 느껴졌다.
명실상부한 진선경 초기의 수행이었다. 단전을 따뜻하게 채운 기운을 처음에는 법력이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정순한 선령력이었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시험해보고자 이곳까지 날아왔다. 시원하게 포효를 한 그의 몸에 뇌전빛이 튀어나와 주변 수백 리를 찬란하게 뒤덮었다.
치치치직!
번쩍이는 뇌전들은 해수면 위를 미친 듯이 내달리거나 고공에서 바다 속으로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이에 잠잠하던 바다가 크게 출렁였다.
그 모습에 한립은 품에서 암녹색 작은 병을 꺼내 공중으로 던졌다. 녹색 빛을 머금은 병은 바닷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돌다 사라졌다.
다음 순간 해수면 위로 광풍이 일고, 오색구름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콰르릉!
마른하늘에 벼락이 내리쳤다.
거대한 병 입구가 교룡 머리처럼 구름 속에서 쑥 튀어나와 암녹색 주술문자들을 분출했다.
주술문자들이 병 입구를 떠난 순간 푸른 안개로 변해 터졌기에 인근 바다에는 법칙파동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쿠르릉!
무수히 많은 은색 뇌전들이 오색구름 속에서 응결되고 있었다. 그 아래로 사나운 파도가 하늘을 떠받치는 해수 기둥이 되어 용처럼 솟아올라 한데 뭉쳤다.
뇌전이든 해수든 병 입구로 들어가면 기이하게도 가루로 변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깐 사이 온 하늘을 헤집고 다니던 은색 뇌전이 사라지고 수백 개의 거대 수룡들만 남아 고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광경에 한립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의 손짓에 고공의 오색구름이 흐릿해졌고 그 안에서 녹색 작은 병이 서서히 하강했다.
동시에 고공으로 치솟던 해수 기둥도 끌어당기는 힘이 사라진 탓에 바다로 쏟아져 내렸다. 병을 회수한 한립은 손끝으로 표면의 이파리 형태의 문양을 쓰다듬었다.
“이제 선령력도 있으니 한 번 시도해봐야겠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뜨끈해진 단전에서 선령력들이 경맥을 타고 흘러가 작은 병 속으로 흡수되었다. 병이 내뿜는 암녹색 빛은 빠르게 강렬해졌고, 덜덜 떨렸다.
잠시 후 녹색 태양처럼 변한 병이 바다를 비취색으로 물들였다. 빛이 강해질수록 떨림도 강해진 병은 한립의 손을 벗어나 언제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한립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질 때쯤 병 입구에서 대량의 암녹색 주술문자들이 뿜어져 나왔다.
옥석에 또렷하게 새겨진 주술문자들은 금전문으로 이루어졌고 특이한 기운을 발산했다. 구결을 자세히 살피던 한립의 표정이 묘해졌다.
“……낯설지 않아! 기억을 잃기 전에 본 적이 있는 거겠지.”
그는 말을 마치고 곧장 작은 병을 문질러 암녹색 주술문자들을 병 속으로 불러들였다.
한립은 병을 높이 던져 입술을 작게 달싹이며 방금 본 구결을 외웠고, 그의 손끝에서 선령력이 날아가 병 속으로 주입되었다.
주술소리를 타고 해역의 천지원기가 호응하듯 기이한 파동을 만들어내더니 푸른빛의 장막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가 주위를 외부와 격리시켰다.
이때 한립의 몸에서 홀연히 물빛이 튀어나와 머지않은 곳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바로 그의 지기화신이었다.
지기화신의 머리 위에서 반짝거리는 남색 빛의 실들은 분명한 법칙파동을 품고 있었다.
한립은 화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보고 의아해졌다. 그러나 곧 고공의 작은 병에서 녹색 액체가 한 방울 천천히 굴러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시선을 돌렸다.
영액은 하강하지 않고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유유히 떠있었다.
잠시 후 기이한 장면이 펼쳐졌다. 돌연 은빛을 반짝인 작은 병에 검은 실선이 두 개가 생기더니 천천히 눈처럼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은백색 눈동자를 지닌 평범하게 생긴 눈이었다.
두 눈은 나타나자마자 한립을 흘끗 보고는 놀랍게도 스스로 두 줄기의 은빛을 방출해 영액을 감쌌고, 두 눈 아래 입이 생겨나 영액을 향해 반투명한 빛의 화염을 내뿜었다.
콰릉!
바로 그때 천지 속에 연속으로 우레 소리가 울리고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은 비밀스런 파동이 생겨났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래쪽을 훑었다.
아래쪽 해수면이 파동에 영향을 받아 돌풍에 무섭게 출렁이던 높은 파도들이 산산조각 나 하얀 거품으로 변하고 있었다.
휭! 바람소리가 커지며 동시에 천지원기를 함유한 수정 실들이 반투명한 물고기처럼 이쪽을 향해 헤엄쳐왔다.
수백 마리에 불과했던 것들이 수천, 수만 마리로 늘어났고 잠시 후에는 아예 그 수를 세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무수히 많은 빛의 실들이 겹겹이 중첩되어 빛의 띠를 이루고 영액을 향해 날아들었다.
빛의 실은 수량이 늘어날수록 빠르게 소용돌이쳐 거대한 나선형 탑을 이루고 해수면 위에 우뚝 솟았다.
쾌청하던 하늘에 백 리에 달하는 거대 구름이 나타나 빛을 가리고 주변 만리의 천지원기들이 난동을 부리며 한립이 있는 구역으로 밀려들었다.
수만 리 밖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파급력이 커서 몇몇 섬에서는 수사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한립이 있는 해역을 응시했다.
수백 리에 달하는 푸른빛의 장막 밖 고공에는 진선경 수사들도 몇 명 떠있었다. 그들은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보물이 세상에 나온 줄 알고 신이 나서 와봤더니 장막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중에서 진 수사의 의식이 가장 강대하지 않습니까? 이곳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도 수사이고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준수한 청년은 곁의 파파노인을 향해 물었다.
“제 의식으로도 내부를 염탐할 수 없었습니다. 허나, 상황을 보면 누군가 강력한 법보를 제련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누군가 이곳에서 지기화신을 제련하고 있는 게 아니고요?”
유순하게 생긴 홍의(紅衣) 사내가 기다란 눈꼬리를 접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아닐 겁니다. 저도 진 수사의 생각과 같습니다.”
“저 역시…….”
“여기서 이야기 나눠봐야 결론도 안 날 터인데, 들어가서 살펴보시죠! 우리들이 힘을 합치면 겨우 한 명을 어찌하지 못하겠습니까?”
갑자기 추악한 생김새의 검은 피부 거한이 수사들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그러나 참을성 없는 입과는 달리 몸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앞서 이야기를 한 파파노인이 그를 훑고 냉소했다.
“제 의식을 차단할 만한 금제를 펼칠 수 있는 존재라면 진연도(秦淵島)에서는 건드릴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게 내막이 궁금하시면 직접 들어가 보시지요? 노부는 됐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노인은 붉은 빛줄기로 변해 돌아가 버렸다. 이에 남은 이들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들도 오랜 세월을 살아온 늙은 여우들이었기에 섣불리 먼저 나서지 않았다. 파파노인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들은 더 이상 구경할 마음이 없어졌다는 듯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으며 각자 갈 길을 갔다.
진 노인의 말대로 이곳에서 그들의 실력을 초월하는 실력자나 선배가 법보를 제련하고 있다면 둘러싸고 구경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책을 잡힐 수 있었다. 그 ‘선배’가 볼 일을 마치고 이 구역을 알아서 뜨기만 하면 솔직히 관여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립은 그들의 이런 생각을 알지 못했고 다른 이들을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막 몰려든 천지원기가 거대한 빛기둥이 되어 구름을 뚫고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푸른빛으로 어스름하게 가려진 한립은 갑자기 체내의 선령력이 웅대한 힘에 이끌려 은색 빛과 화염에 둘러싸인 녹색 영액으로 마구 흘러드는 것을 느꼈다.
“……!”
흠칫 놀란 그는 재빨리 수결을 맺어 선령력의 흐름을 늦추었다. 조금 전 나타난 지기화신은 신념의 힘을 전환한 법력을 몇 호흡 만에 소모해 버렸다.
한립은 손짓을 해 지기화신을 회수하고는 안색을 굳혔다. 전력을 다해 통제하려는 데도 선령력이 외부로 유실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침음하다 단약 여러 개를 불러내 입에 털어 넣었다. 단약의 함유한 영력이 체내에서 선령력으로 전환된 후에야 단전이 텅 빈 것 같은 공허감이 약간 해소되었다.
고개를 들어 암녹색 영액을 보는 그의 눈에 복잡한 시선이 어렸다.
* * *
장장 닷새 후.
해역의 이상 현상은 그대로였고 그 한가운데 위치한 한립은 죽을 맛이었다. 누군가 그를 보았다면 그의 꼴을 보고 화들짝 놀랐을 것이다.
정기를 과도하게 소모해 눈은 움푹 들어가고 피부는 노랗게 떴으며 입가 피부는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두 눈만이 여전히 밝게 반짝였다.
며칠 동안 체내의 선령력이 계속해서 빠져나가 이제는 바닥이 났고 이전에 쌓아둔 적지 않은 고계 단약도 거의 떨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단약을 복용해도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아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듯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견딘 것은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끝까지 버티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거라 속삭였기 때문이다.
“후우…….”
한립은 길게 숨을 내쉬며 꺼내 놓았던 단약 몇 개를 거두고 두 손으로 이상한 수결을 맺었다.
주문을 외는 소리가 이어지자 그의 피부가 불그스름하게 변하고 얼굴도 제 모습을 되찾았다.
말라비틀어져 죽어가던 나무가 단비를 만나 살아나는 듯했다.
정혈을 태워 생기를 되찾는 비술을 사용해 체내의 선령력을 늘린 것이었고, 비술의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